만년필에 관한 소고

2012.05.15 01:55

헬로시드니 조회 수:2770

만년필을 사용한지 몇 달이 지났다. 쓰다보면 이렇게 불편할 수가 있나하는 생각과 이렇게 좋을 수도 있나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이 불편한 것도 이전엔 더 불편한 것이 개량된 결과라니 기술의 발전이란 신기할 따름이다.
만년필은 처음 사면 잉크를 채워야 한다. 잉크를 주입하는 방식은 피스톤이나 나사식 방식의 컨버터가 있고 카트리지 주입 방식이 있다. 요는 둘 중 어느 방식이든 잉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기껏 잉크를 채워 글씨를 쓰려해도 바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그럴 경우 젖은 휴지를 촉 끝에 갖다대거나 드라이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써야 그제서야 잉크님께서 종이에 강림하신다. 다른 사람이 시필을 위해 빌린 후 내가 다시 쓰려해도 안나오는 경우도 있다. 만년필 뚜껑을 연 상태로 오랫동안 두어도 역시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실수로라도 떨어뜨리는 경우는 대재앙이다. 모처럼 느낌이 와 폭풍처럼 글을 쓰려면 헛발질이 일쑤다. 잉크의 흐름이 끊기니 나던 흥도 사그러진다. 또 펜 촉의 각도와 방향을 유의해서 써야한다.
 
물건을 쓰는건지 상전을 모시는건지 때때로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잉크가 다 떨어지면 밥(잉크)을 채워넣어 줘야 사용이 가능하다. 만년필이란 상전을 모시는 이들 중 몇몇은 밥 주는 것 역시 즐거움의 하나라니 중증이 따로 없다.
 
내가 모시는 분은 파커 45라는 영국제 만년필이다.
길들여지지 않아 ‘여우’라 이름 붙여진 분도 계신데 이 분은 편식이 워낙 심해(카트리지) 절로 사이가 멀어졌다.
파커 45는 연배가 꽤 되시는 분이다. 구식의 영국인인데 까탈스럽게 굴긴 하지만 막상 접하면 이보다 부드러울 수가 없다.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구식 넥타이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또 다 해지고 꽉 조이는 넥타이라 진지를 잡수실 때마다 드시는 파카45님이나 수발하는 나나 아주 고역이다. 새 넥타이 하나를 맞춰드리니 그것만 유독 새것이라 어색한 감이 있지만은 식사에서 불편함이 없어졌으니 만족하고 있다.
 
만년필은 구식의 물건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볼펜이나 여타 다른 펜의 편리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전들을 모시는 이유가 있다.
 
첫째, 필기감이다. 다른 펜과 비교했을 때 손으로 느껴지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남다르다. 잉크에 따라서도 필기감이 달라져 잉크를 바꿔 사용하는 맛이 있다.
 
둘째, 글씨를 교정하는 효과가 있다. 쓰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말은 손으로 쓴다는 말이다. 만년필로 쓸 경우 글씨가 좀 더 좋아지는 효과가 있고 자연스레 필기법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셋째, 구식이라는 점이다. 만년필은 편리하지 않다. 오히려 이 점에 매력이 있다. 사용자는 일부러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점에서 남과 다른 특별함을 가진다. 그 특별함이 다르다는 멋을 가져다주고 때로는 이를 즐기게도 된다.
만년필은 구식이라 주인도 가린다. 그렇게 까탈을 부리던 이들이 한번 길들여지면 주인의 버릇까지 알아 필요할 때 잉크를 착착 내놓는다. 다른 이가 펜을 잡기라도 하면 그동안 못부렸던 까탈을 그 다른 사람에게 온통 쏟아붓는다.
구식이고 불편하기에 차분히 무언가를 써야할 때 만년필을 잡게 된다.
 
지금도 손 안에 파카45는 까탈을 부린다. 아, 열받는데 볼펜을 쓸까 살짝 생각할 즈음이 되니 그제야 고분고분해져 말을 잘 듣는다. 내가 펜을 길들이는걸까? 펜이 나를 길들이는걸까?
 
“난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는게 무슨 뜻이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여우가 말했다. “그건 너무나 잊혀져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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