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배를 밀며

2012.05.13 01:12

난데없이낙타를 조회 수:2691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장석남, 배를 밀며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 아슬아슬 배에서 떨어진 손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두며, 뵈지도 않는 길에서 

못다한 침묵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네요. 


또 한 번의 사랑이 가고, 다시 또 사랑이 오는 삶을 맞으면서,

최승자 시의 한구절처럼,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지만, 

이순간엔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만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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