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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스물 두 번째 죽음을 생각하며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파울 첼란의 시,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 전문

다시 한 사람의 해고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살던 김포의 한 임대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져. 3층 집에서 나와 23층으로 발걸음을 옮겨 옥상에 나섰을 때 꽃을 시샘하는 찬바람도 서른여섯 젊은 나이의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을까? 

22번째라고 한다. 쌍용자동차에서 생겨난 희생자가 3년이란 시간 동안에. 올 들어서만도 3번째다. 도대체 어떤 절망이 사람들을 호명하여 등을 떠밀고 가서 차곡차곡 주검으로 쌓이게 하나. 그래서 이제는 이름으로보다 숫자로 목숨을 헤아리고 기억하게 하는가.

이 글, 너무 쓰기 싫었다.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숨진 육신이 하루가 지나서야 사람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가족들은 더 절망할 기력이나 남아있을까? 아니다. 절망은 면역성이 없다. 전이될 뿐. 하지만 무너진 가슴들끼리 부둥켜안은들 시커먼 가슴이 다시 혼자가 되면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총선 일정 접고 이 글 핑계로 일찍 퇴근을 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먹먹했다. 아니 막막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무슨 말을 보태나. 해야 할 사람들이 해야 할 이야기들을 다 하지 않았는가? 

정리해고는 사회적 살인이라고. 이번 죽음 역시 정부와 기업이 저지른 22번째 살인이라고. 이제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회사는 지체 없이 정리해고를 철회해야 한다고. 총선을 앞둔 정치도 말한다. 야당의 승리, 정권교체가 쌍용차 문제와 고통당하는 비정규직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더 이상의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다짐도 뒤따른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쟁’을 선언했다.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했다. 이보다 더한 분노가 있는가. 여기서 더 단호해질 수 있는가.

살아 버티고 있는 이들에 대한 연대도 촉구했다. 순간순간 23번째, 24번째 죽음을 떠올릴지 모를 남아 있는 해고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의 손을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이미 늦었지만 더 이상 늦지 않게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무슨 말이 더 남아 있는가? 그렇게 이어가던 생각의 마디를 끊고 순간 강풍보다 더 서늘한 것이 온몸을 휘감는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생각.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제되고 쫓겨난 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의 실체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죄’에 대해, 어쩌면 우리 역시 깊이 물들어 있는 어떤 안이함의 성격에 대해, 그리하여 분노의 표면 위를 맴돌 뿐 거기서 정지한 채 다시 ‘별일 없이’ 살아가는 내면의 진실이 추궁되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생각 말이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말'로써 죄를 은폐하는 시대

파울 첼란을 생각했다. 지난 세기의 야만을 상징했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중 한 사람으로 ‘시대의 절망을 짊어진 존재’로 살아야 했던, 그러나 끝내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의식’에 시달리다 쉰 살이 되던 해 쎄느강에 몸을 던져 세상을 등졌던. 이태리의 프리모 레비가 그랬고, 오스트리아의 장 아메리가 그랬듯이, 왜 그토록 참혹했던 죽음의 수용소도 견뎌낸 사람들이 다시 주어진 삶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세상의 참혹함과 잔인함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죄인 시대가 있지만, 어떤 이야기가 수도 없이 되풀이되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너무 많이 이야기됨으로써 죄를 은폐하는 시대도 있다. 내가 이 글의 앞에서 인용한 첼란의 짧은 시가 바로 ‘죄가 은폐되는 시대’의 죄악을 묻는 질문이다. 

첼란보다 먼저 파시즘의 시대를 고발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쓴 다른 시의 이런 구절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참혹함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우리의 김남주 시인도 야만의 시대에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것은 야만에 대한 침묵이므로. 이제 군사독재가 피 묻은 몽둥이를 들어 침묵을 강요하는 시대는 적어도 끝났다. 지금은, 이를테면 ‘나는 꼼수다’의 시대이다. 대통령 권력을 조롱해도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거나 칠성판 위에서 전기고문 당하지 않는다.


신뢰를 이끌어내지 못한 우리의 연대 역시 유죄

이야기가 너무 에둘러간다고 생각할 이들을 위해 여기서 멈추겠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이 정권과 자본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주장은 결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여기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별일 없이’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리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주장에서 멈출 뿐, 분노에서 멈출 뿐 배제된 이들의 죽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너무 많이 이야기됨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죄악이 되는 시대. 무노조 경영과 백혈병을 낳는 반도체공장, 온갖 불법과 특권으로 이 나라 제1 권력이 된 이건희의 삼성왕국에 대해 총파업은커녕 불매운동 한 번 벌이지 못한 노동운동조직. 마이크를 잡으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정규직은 표가 안 된다고 귓속말을 하는 진보정치.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이 시대의 배제된 자들을 정치의 최전선에 내세우고자 했을 때 해고노동자들의 조직과 비정규직을 포함한 불안정 노동으로부터 받은 기대한 만큼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에 대한 유죄평결이 아니었는지. 

도대체 어떤 정치가 오늘의 이 절망을 위로할 수 있을까? 질문이 잘못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시대의 고통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생존의 최전선에서 거듭날 수 있을까? 망자와의 진정한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동지들이 눈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김진숙 같은 이의 몫일뿐인 것인가? 어떤 죽음들을 더는 이야기 속에 가두지 않기 위해 우리는 판을 다시 짜야 한다. 더 많은 절망이 죽음들로 변하기 전 우리는 기필코 희망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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