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당 투표 이야기.

2012.04.11 21:14

keira 조회 수:740

이번 선거에서 후보 투표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anything but 새누리당>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따라서 비 새누리당 계열에서 가장 세력이 큰 당의 후보를 골랐으니까요. 하지만 정당 투표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이번 선거를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는 제 1의 가치가 무엇인지 결정했어야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진보신당을 찍으려 했습니다. 통합진보당을 제외한 기타 진보 세력이 모두 뭉쳐도 3%가 될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어젯밤까지만 해도 진보신당에 표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소싯적 홍세화 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읽고 많은 충격을 받기도 했고, 진보신당의 정책이 노동자로서의 제 정치적 스탠스에 잘 부합했으니까요. 하지만 가슴 한켠에서 "이게 최선일까?" 하는 질문이 계속 비집고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제가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가장 강렬하게 소망했던 것은 <탈핵>이었으니까요.

 

최근 시사인에서 후쿠시마 사태 1년에 맞추어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흥미가 생겨서 책을 사 읽었습니다. 다 읽었냐고요? 아닙니다. 1장의 세 번째 챕터까지 읽은 다음 덮었고 더 이상 펼쳐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그 책은 봉인될 겁니다.  읽을 때는 빨려들 듯 읽었지만 정서적 후폭풍이 만만치가 않더군요. 경증이지만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저로서는 상태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더 이상 읽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사람들이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일어난 일들이 여태까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해 온 방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라고요. 들판에 나가면 아이들은 흙을 만지고 놉니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들꽃 한 송이를  꺾어 주겠지요. 강아지가 뛰어 다니고 지렁이가 땅 속에서 뚫고 나오고 꿀벌이 하늘을 납니다. 이 모든 것이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어 버렸지요.  사고가 나자 지렁이는 땅속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고 꿀벌은 벌통 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 지표면을 깎아서 시멘트 벙커 속에 넣어야 했습니다. 짐승의 털이 방사능 물질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버려야 했고 버려진 동물들은 사살당했습니다. 도대체 뭘 보러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체르노빌을 관광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이때 들꽃을 꺾는 것도 하면 안 된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닌 게 플루토늄의 반감기는 2만 4천년이랍니다. 인간의 역사는 겨우 1만 년을 헤아릴까 말까 하는데요.

 

남의 나라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게 우리나라는 지금 오래된 원전을 반대를 무릅쓰고 재가동하고 있고, 일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로 인한 진정한 피해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체르노빌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벨라루스에서는 10만명 당 암 발생률이 사고 이후 74배로 폭등했답니다.) 이런 나라에서 <탈핵>을 논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 걸까요. 이명박 대통령은 원전을 없애면 전기료 80만원이 어쩌고 했지만 애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기를 펑펑 쓰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죠. 또 산업용 전기가 싸기 때문에 기업들이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지 않고 산업용 전기로 공장을 돌리고 있기도 하고요.

 

지구 온난화가 전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안이 원전이 되어야 할까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은 다음 제 대답은 <아니다>로 확고하게 정해졌습니다. 어떠한 편의가 주어진다 해도, 확률이 아무리 낮다 해도 사고가 한 번 일어나면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생물들의 목숨을 인간의 독단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특별히 동물 보호주의자는 아니지만 인간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생물에 대한 집단 학살을 저지를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이번 정당 투표에서 녹색당을 찍었습니다. 물론 녹색당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공약을 봤을 때 진보신당의 정책이 가장 균형감 있고 잘 짜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녹색당이 이야기하는 환경도, 진보신당이 주력하는 노동자 인권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결과는 <환경>이었습니다. 진보신당의 공약에도 <탈핵>은 있었지만 진보신당이 그것을 제 1의 목표로 밀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녹색당을 골랐습니다.

 

현재 비례대표 결과를 보니 제 정당표는 소위 '사표'가 된 모양입니다만 저는 제 표가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정치세력도 있다는 것을 녹색당 관계자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그들도 더 열심히 탈핵 운동을 할 힘을 얻겠지요. 그리고 애초에 서구에서 진보 운동, 환경 운동 자체가 자리잡는데 수십~수백년이 걸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포기를 말하기도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신당, 녹색당 모두가 원내 진출에 실패한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요.

 

녹색당, 진보신당 관계자 분들께 마음으로나마 격려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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