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까지 1시간 반 정도 남았기에, 새벽에 스킵해가며 두어 시간 본 조국 청문회에 대한 감상을 바탕으로 현실/장난 동화를 써봅니다. - -)


우아하고 단정한 자태를 자랑하는 두루미 이야기예요. 

그는 대열의 맨 앞에 나서는 기질은 아니나, 품위 있어 뵈는 동작은 뭣이든 적당한 선에서 구사하고 그걸 즐기며 사는 아름다운 새였죠. 

강변 부족들 간의 갈등과 결단의 순간에는 매번 늦었지만, 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어요. 그는 가능한 한 조명이 살짝 비켜간 자리에 앉기를 즐겼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도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예의바르고 품위 있어서 그런 자리에서 절대 고함을 지르거나 자리를 뒤엎는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살살 조심스러웠죠.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항상 눈에 띄었습니다.


그게 인상깊었던 걸까요. 어느날 몸집이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하마가 두루미에게 서로 몸을 바꿔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두루미도 한번쯤은 넉넉한 몸집으로 바람에 날아갈 걱정 따위 없는 삶을 경험해보고 싶었던 터라 둘은 서로 몸을 바꾸게 됐어요.

화창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하마가 된 뒤에도 두루미는 날개의 감각을 살려 강변에서 사뿐사뿐 춤사위를 구사해보곤 했어요. 몸의 감각은 여전히 가벼웠기에 덤불 위로 날아보기도 하고 숨긴 날개를 쭉 펴고 햇살을 쏘이기도 했어요. 


어느날 개미가 길을 가다 앉아 있는 하마를 보곤 "안녕 두루미야~ " 말을 걸었습니다. 하마가 하하 웃으며 답했죠.  "그래 이해해, 네 눈엔 내가 두루미로 보이는 게 당연하지. 근데 사실 난 두루미가 아니라 하마란다."


개미는 눈을 비비고 다시한번 두루미를 쳐다봤어요. 그리고 목소릴 가다듬고 물었죠.

"오, 네가 하마라고? 레알?"

두루미였던 하마는 날개를 쏙 집어넣고 흰 외투의 단추를 잠그며 답했어요. "실은 하마랑 내가 서로 몸을 바꾼거야~"

"정말? 그럼 하마를 너의 정체성으로 말하면 곤란하지~ "

하마가 하악하악 가뿐 숨을 쉬며 답했습니다. "날 좀 믿어줘 개미야~ 난 지금 하마고 앞으로도 하마일 거야~"

개미는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가던 길을 가버렸습니다.  


갑자기 하마는 무척 우울해졌어요. 자신이 안개 속에 서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난 진짜 하마라고~ 두루미였음을 기억하는 개미들아 난 이제 하마라고~  아닌 걸로 보여? 난 두루미일 때도 그냥 하마였어. 이 두꺼운 외투 좀 봐. 얼마나 잘 어울리니! 

솔직히 두루미로 살 땐 우아한 날개로 도대체 뭘 더듬어야 하는지 잘 몰랐어. 공기? 하늘? 근데 그것들은 이미 우리 앞에 있는 거잖아. 도대체 하늘에 또 뭐가 있다고 날개를 새삼재삼 사용해야 하는 걸까?"


하마는 투덜대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어요. 잠시 후, 마침 강가에서 기다란 부리로 강변을 훑고 있는 두루미와 아슬아슬 부딪혔습니다. 둘은 짜증이 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어요.하마는 위용을 다듬으려 애썼고, 두루미는 자태를 갖추려 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마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 음, 있잖아~ 우리 그냥 다시..."

"응, 그러자. 그래야할 것 같아~" 두루미가 답했습니다. 

어떤 생각이고 무슨 마음인지 서로 알아채고 잽싸게 둘은 다시 몸을 바꾼 뒤 다정하게 악수를 나눴습니다. 

"고마웠어."

"나도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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