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작입니다. 32년전... 이니 이쯤되면 '고전 영화'라고 해도 안 어색할 듯. 런닝타임은 2시간 7분. 장르는 걍 이명세 영화구요. 스포일러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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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창호 배우님 넘나 카리스마있게 나오신 것...)



 - 이발소에 앉아 머리를 다듬으며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나레이션을 해대는 안성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간단히 말해 세상 사람들 다 유치하고 속물적이어서 자신의 고매한 뜻을 몰라준다. 이런 얘기구요. 머리 다듬고 수염 다듬어주며 쉬지 않고 개고기 예찬을 하는 이발사 역시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

 안성기의 직업은 나이트 클럽에서 쇼를 진행하는 개그맨인데, 자신의 천재적인 시나리오로 곧 데뷔하게 될 거라는 본인 말곤 아무도 안 믿을 확신을 갖고 있네요. 망상증이 보입니다. 그러던 그 양반이... 어쩌다가 그 어리숙한 이발사 배창호씨와 만화책 취향이 같다는 걸 알고 미래의 주연 배우로 섭외하구요. 어쩌다 극장에서 인연을 맺은 무직의 황신혜까지 끌어들였는데, 때마침 탈영병 손창민이 M16 두 자루를 주고 가는 바람에 팔자에 없던 무장 강도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는 참 요상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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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틸샷 사기입니다. 짤처럼 코믹한 상황이 절대로 아님.)



 - 줄거리 소개를 열심히 하긴 했는데, 뭐 별 의미 없죠. 큰 틀에서 대략 이런 이야기. 라는 걸 따져보는 건 의미가 있지만 이야기를 구석구석 따져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타이트하게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런 일도 벌어지고 저런 일도 벌어지고 하지만 그 전후의 연결은 아주 느슨하구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며 '꿈의 논리'로 전개되는 영화입니다.


 관련 글들을 찾아보면 '다이하드'에 밀려서 개봉이 미뤄지고 어쩌고 하다가... 같은 얘길 하던데. 다 핑계입니다. 요즘 말로 '명예로운 죽음'인 거죠. 사실 이 영화는 '다이하드'는 물론이고 그냥 세상 어떤 영화랑 붙었어도 흥행 실패했을 영화에요. 확신합니다. ㅋㅋ 특히나 1989년의 한국 극장가에서야 말 할 것도 없구요. 뭐 줄줄이 히트작 내고 비평적 찬사를 받던 그 시절에 튀어 나왔다면 그래도 더 팔리긴 했겠습니다만. 그래도 히트 영화는 되지 못 했을 거에요. 왜냐면...


 까놓고 말해서 재미가 없거든요. 와. 말해버렸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이건 절대로 '재밌는 영화'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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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틸샷 사기 2. 짤처럼 에로틱한 상황이 절대로 아님.)



 - 저렇게 적어 놓고 전 재밌게 보긴 했습니다만.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그래요.

 1989년의 한국 사람들 사는 모습들이 (많이 이명세식으로 미화되긴 했지만) 계속 나오니 추억 돋고 좋아요. 그 시절 만화방 풍경 같은 건 그냥 막 좋고 그립고 웃기고. ㅋㅋㅋ 그리고 안성기, 배창호, 황신혜의 젊은 시절 모습들 또한 반갑고 좋습니다. 특히나 황신혜의 리즈 시절 (당시 26세!!) 미모는 뭐 그냥 카메라에 비치기만 해도 눈이 즐겁구요. 또 데뷔작부터 선명하게 박혀 있는 이명세 스타일의 모습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겠죠. 하지만 뭣보다도 가장 큰 재미는, 1989년에 극장을 찾았다가 이 영화를 보고 빡쳐했을 관객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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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웃기는 장면 맞습니다. 아니 웃겨야할 장면인 건 맞습니다. 근데 안 웃기...)



 - 일단 이야기가 정말 느슨합니다. 한 10년 후에야 다들 '그게 이명세 스타일'이라고 이해를 해주지만 이건 데뷔작이잖아요. 대충 어떤 이야기들을 어떤 느낌으로 이어 붙여서 어떤 그림을 만들겠다는 건지 이해는 되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게 자꾸 산으로 가다 돌아오고 그래요. 아마도 이미지와 장면을 중시하는 그분답게 이야기 좀 어그러지더라도 이미지에 집착하다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구요.


 그리고 아마 그나마 이 영화의 호흡을 따라가며 잘 보던 관객들도 결말 부분에 가선 '이게 뭐꼬!!!'라고 외쳤을 겁니다. 이건 정말 지금 봐도 좀 그래요. ㅋㅋㅋ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고 여운도 있고 그런데, 딱 그 결말이 드러나는 순간엔 살짝 욕이 나오더라구요. ㅋㅋ


 결정적으로 영화가 너무 오타쿠스럽(...)습니다. 안성기의 찰리 채플린 흉내 연기가 대표적이고. 안성기랑 배창호가 주고 받는 대사들 같은 것도 당시 시네필들, 만화책 덕후들은 열광했을지 몰라도 별로 대중적이진 않죠. 영화의 어법도 대중 영화라기보단 아트 하우스 스타일이고. 더군다나 1.9.8.9.년이잖아요. 당시에 개봉해서 반응 좋았던 영화들을 보면 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든가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영구와 땡칠이', '서울 무지개'... 뭐 이랬단 말입니다. 이런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개그맨'은 너무나 이질적이에요. 좋게 말해서 당시 한국 영화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고, 나쁘게 말하면 망하려고 작정한 영화였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 런닝타임 2시간 7분!!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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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도 장면도 연기도 종합적 채플린 패러디. 당시에 채플린 영화들이 국내 개봉을 해서 대부분 이해는 했겠지만. 웃기지가 않습...;)



 - 좋게 봐서 '개그맨'은 오파츠를 구경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앞서 말했던 같은 해에 성공한 한국 영화들과 비교할 때 정말 현격한 격차가 있어요. 소재나 주제를 고르는 감각부터 그렇구요. 또 미장센이나 카메라 워크 같은 부분도 그냥 다른 시대 영화 같은 수준에 음악도 (상대적으로) 아주 잘 썼구요. 보는 내내 '그 당시에 영화 매니아들로부터 천재로 추앙 받았을만 하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색감이 그렇죠. 뭐 80년대 한국 영화들 중에도 촬영이 유려하다든가, 장면들이 아름답다든가... 이런 영화가 없었던 게 아닌데. 이명세가 색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스타일 같은 건 정말 한국 영화들 중엔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어요. 아동틱하단 소리 듣기 딱 좋은 원색들을 화면에 덕지덕지 발라 놓는데 그게 유치하단 느낌이 안 들고 예쁘면서 꿈속 같은 느낌을 잘 표현해준단 말이죠. 덕택에 영화의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나구요.


 계속 줄거리가 느슨하고 별 거 없다고 까고 있지만 배우들의 대사나 연기 같은 것도 당시 기준으론 나름 깔끔하고 덜 촌스러운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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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록달록 선명하고 예쁜 색감. 당시 한국 영화엔 이런 거 진짜 드물었다고 기억합니다.)



 - 그래서 뭐랄까... 2021년에 이 영화를 본다면 그냥 순수한 영화의 재미를 기대하며 보기보단 영화 공부하는 기분, 특히 한국 영화사 공부하는 기분으로 보는 쪽이 더 만족도가 높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네요. 시대를 앞서간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이며 이후로 꽤 오랫동안 천재 대접을 받던 양반의 데뷔작이라는 아주 높은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만. '요즘 기준으로 봐도 재밌다!'고 말하기엔 좀 꽁기꽁기한 느낌이 적지 않은. 그런 영화였네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명세 영화들엔 이명세 개인의 취향이 굉장히 노골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리즈 시절 기준으로 따져도 이 분 취향에는 좀 아저씨스런 느낌들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대략 20년 전이니 지금 보면 확실히 할배스럽단 느낌이 있습니다. 정겹긴 한데, 그게 지금 보기에 막 훌륭한 특징이란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니 뭐 이명세도 사람인데 이 정도는 한계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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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황신혜가 예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 또 한 가지 의외였고 놀라웠던 게 배우들의 연기였습니다.

 일단 신인 배우 배창호씨의 경우엔, 신인이시다 보니 안성기 같은 배우에게 이미 디폴트로 장착되어 버린 '80년대식 문어체 연기' 느낌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지금 보기에 되게 괜찮은 생활 연기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맡은 역할도 무식한 일반인 역할이라 대사도 문어체 느낌이 적어서 더 그랬구요.


 황신혜는 분명 젊은 시절 발연기 여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영화에선 무난하게 괜찮습니다. 나중에 심각한 장면에선 조금 튀기도 하지만 캐릭터가 대체로 걍 툭툭 말을 던지는 시크한 캐릭터여서 역시 거슬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안성기는... 좀 복잡하군요. 앞서 말했듯 80년대식 대사톤의 강렬함이 좀 발목을 잡구요. 또 현학적이고 허세 쩌는 수다쟁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그 80년대 느낌이 더 강해지는 게 있어요. 또한 이 분의 채플린 흉내 연기는 정말 '흉내' 같아서 종종 난감해지기도 하구요. 

 그런데 종종 '!?'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만 보면 이 주인공 캐릭터 자체가 좀 복잡하거든요. 그냥 망상병 바보... 이긴 한데 은근히 어두컴컴하고, 종종 위험한 인간 같은 느낌을 풍겨요. 행색이나 평소 폼은 찰리 채플린인데, 성격은 '코미디의 왕'의 '펍킨'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허허실실 몸개그 대사 개그를 치다가 문득문득 펍킨스러운 면모가 튀어나올 때 느낌이 상당히 좋습니다. 솔직히 안성기씨 연기를 그렇게 감명 깊게 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의외로 좋은 인생을 받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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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구할 수 있는 짤이 이런 것밖엔...)



 - 종합을 하자면요...

 재미 없는 것 같은데 재미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볼 때는 좀 허술하네... 했는데 다 보고 나니 자꾸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고. 뭐 그런 묘한 영화였습니다.

 그냥 문자 그대로의 '재미'를 바란다면 굳이 챙겨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은 봐야할 것 같기도 하구요.

 뭐 이러나 저러나 리즈 시절 기준으로도 이명세 영화가 취향에 안 맞았다면 굳이 볼 필요는 없겠죠. ㅋㅋ

 적어도 '이명세 비긴즈'라는 의미가 있으니 영화사적 의미는 충분하겠고. 또 말 했듯이 1980년대의 한국 영화계에 이런 영화가 튀어나왔다는 건 참 뜻깊은 일 아니겠습니까. 잘 봤습니다.




 + iptv에도 있고 '시즌'에도 있어요. 그리고 리마스터 버전입니다. 덕택에 그 시절 한국 영화 치고 상당히 좋은 화질을 보여줍니다. 보니깐 이명세 감독 본인이 색감 재현에 참여해서 직접 조율을 한 것 같더군요. 참 좋은 일인데... 안타깝게도 사운드가 영 별로입니다. 엄청 집중해야 간신히 대사를 알아먹겠다 싶은 장면이 되게 많고, 집중을 해도 제대로 알아 들은 건지 잘 모르겠는 부분도 많았어요. ㅠㅜ



 ++ 어쨌든 황신혜는 예쁘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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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아주 중요하다구요.



 +++ 저만 몰랐겠지만 이명세가 2017년에 예능 프로에 출연해서 단편 영화를 만들었더군요.


https://www.facebook.com/studiolululala/videos/1363931410400070/


 이명세 커리어의 막판 영화들 흥행 성적 같은 걸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지금도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되는 양반이 계속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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