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의 종료를 희망합니다.

2011.09.15 01:36

마르세리안 조회 수:1540

0. 추석들은 잘들 쇠셨는지요. 사실 이 글은 제가 '폴트 라인'을 건드린 안철수다시, 공(共)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라는 글을 쓰고 난 다음에 퍼뜩 든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쓸려고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귀찮음과 게으름. 또는 생각의 미성숙함.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메모의 부재로 늦어지네요. - 메모를 안하는 습관은 언제쯤 고쳐질런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더듬어서 다시 써보려 하고 있지만 글의 흐름이 평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활발한 생각들을 남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이런 얘기들을 하다보면 50%는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50%는 니 앞길이나 잘 가림해라 이러거든요. 제 생각이 맞는지를 교정하는 방법은 이 게시판에 글을 쓰고 피드백을 받아보는 수밖에 없을듯 합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인터넷 듣보 찌질이 덕후의 삶이 그럴 수 밖에요..

 

1.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말처럼 역대 가장 빠른 대선이 시작된 지금. 우리는 많은 대선주자들의 명멸을 지켜봅니다. 가장 빨리 스타트를 끊은 사람도 있고, 여전한 위치에서 수성을 위해 진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링에 오를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의뭉스럽게 눙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음 대선. 대한민국이 무엇을 원하는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대선 주자들은 각자의 답을 내놓고, 그 답이 정답이라고 외쳐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그 답은 무엇일까요.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무엇이 가장 결핍되어 있는가와 관련있습니다.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를 명민하게 알아채고 그 답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다음 대선의 승자가 될 것이겠죠. 정치란 그런 것이고 정치인이란 그 답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은 '공동체'라고 몇번에 걸쳐 지적했습니다. 보편적 복지. 무상급식. 정의. 의로운 사람. 등등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흐름은 우리는 같은 공동체에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 안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아직 한국 사회에 공동체가 결핍되어 있다는 이 논리에 반하는 흐름을 찾지 못했습니다.

 

3.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껏 한국 사회는 '갑'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러합니다. 짧게 짚자면 imf 이후. 길게 보자면 해방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해 온 흐름은 '갑'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한국인들은 모두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갑'이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개인을 넘어서 가족과 집단. 혈연. 집단. 더 나아가 국가까지 예외일 수 없었죠. 모두가 '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위한 희생은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고 오히려 권장된 감마저 있었습니다.  장남의 성공을 위해 나머지가 희생되었고, 혈족의 승리를 위해 가문이 동원됐습니다. 옹골한 지역주의는 각 지역에서 묻지마 당선 열풍을 불러왔습니다. 

 

4. 당연하기도 합니다. '갑'이 되고 난 이후의 안락함은 그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갑이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역설적으로 갑이 된 이후의 평안한 삶을 보장해 줍니다. 공무원에서, 대기업 임원과 노동조합에서, 교수 직에서, 1급 연예인에서 우리는 그러한 갑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갑이 된 이후에는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정년이 보장되고 물가에 연동되는 봉급이 보장됩니다. 학연, 혈연, 지연의 난립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무능한 사람들이 '갑'을 차지하기 위해 피터지게 싸웠는지를 웅변합니다. 이 갑의 싸움에서 진보와 보수의 다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보라고 갑이 되지 않기를 원하지 않았고, 보수라고 별 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특히 통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 '갑'의 세계에 있는 인간이라면 이를 제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5. 역설적으로 갑의 편안함은 을의 불편함에서 촉발되기도 합니다. 저는 갑과 을의 세계가 이렇게 까지 지독하게 왜곡된 세계는 보지 못했습니다. 단견일수도 있겠고 제 지식의 얕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갑과 을은 패자부활전이 봉쇄되었고, 동시에 천당과 지옥입니다. 이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단 한번의 승패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 승패의 싸움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갑은 달콤하지만, 실패한 을은 지독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비정규직의 슬픔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주름진 얼굴에서, 청년층의 갑갑함에서 을의 슬픔은 드러납니다. 

 

6. 수많은 갑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또한 너의 책임일 것이다. 누가 그러길래 지래? 라고 그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이것이 통하던 시대에서는 수많은 을들이 갑이 되기 위해 몸부림 쳤을 것입니다. 희생은 당연했을 것이고. 오히려 권장되었다는 표현은 이 때문입니다. 갑의 위치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남은 을들을 끌어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지금은 과연 그러할까요.  아니리라는 건 모든 이들이 잘 알 것입니다.

 

7. 중언부언하는 말이지만 저는 갑이 힘을 얻는 시대는 공동체가 상실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합니다. 한국의 갑이 존재하는 사회는 타인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타인은 하나의 생명체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가족을 의미하기도 하고, 집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공존할 대상이 아닌 경쟁할 대상, 발밑에 두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회가 어찌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까요. 통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갑이 을에게 드러내보이는 폭력성은 여러차례에 걸쳐 증명된바 있습니다. 굳이 설명과 예를 보태려 하지 않으려 합니다.

 

8. 한국사회의 수많은 정책과 개혁들이 사장되어진 원인도 거칠게 말하자면 갑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갑의 위치에 올라서면 그 누구도 다시 을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락과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인정하지 않고 버티려 합니다. 모든 정책에 어깃장을 놓고 반대 의사를 표시하려고 합니다. 정말 거칠지만 한국 사회 혼란의 밑바닥에는 갑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심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9. 감히 확언하건데, 제대로 된 공동체, 즉 건강한 공동체는 건강한 갑과 을에서 나옵니다. 세상 원리에서 '갑'과 '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평등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인류가 역사를 만드는 이상 이건 불변의 법칙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완전한 평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는 그러한 사회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공동체가 그런 사회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건강한 '갑'과 '을'은 갑이 을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패자부활전이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전망'이 작동하는 사회이겠지요. 아니 적어도 그런 것을 희망하는 사회라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10. 그렇기에 지금 시대의 희망은 건강한 갑과 을이 자리잡는 사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갑'이 종료되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공동체를 만드는 첫 걸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고, 무엇을 쌓아올리느냐는 지금 우리 세대의 몫이겠지요. 이를 외면하는 것은 낯익은 단어로 말하자면 시대정신을 외면하는 것일 껍니다. 그렇기에 말하고자 합니다. 지금 저는 '갑'의 종료를 희망합니다.

 

 

생각해둔 건 항상 100인데 이를 쓰는건 항상 10도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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