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니?"라는 질문

2019.02.17 12:04

어디로갈까 조회 수:1238

아침 밥상에서 아버지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셨어요.
"행복하니?"
- (어리둥절~)...... 행복이 뭐가 그리 중한디?

반문하는 순간, 어느 영화에선가 우리가 주고받는 대사를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라면 항용 가능한 대화라고 제가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행복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질문을 답으로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에요. 행복은 제게 애매모호한 '무엇'입니다. 익숙한 일상어도 소리내어 여러 번 발음하다 보면 낯설고 불투명해지기 마련인데, 행복이란 단어도 접할 때마다 새로운 사물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돼요.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래, 뭐지? 몇 번쯤 되새김질하다 보면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며 어떻게 접근해야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요.

지난 여름 프라하에 갔을 때, 이젠 봉쇄되어 있는 옛수녀원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부재가 곧 존재인 곳으로 자신을 몰고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고요하게, 가장 혁명적인 삶을 펼쳤을 공간. 
그러나 생의 구차한 즐거움에 사로잡혀 사는 저에게 그곳의 청정함은 처연함이기도 했어요. 어둡고 긴 회랑을 돌다가 안내를 맡았던 현지 교수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더랬죠.
"그분들은 이곳에서 행복했을까요?" 
그러자 교수가 오히려 제게 반문하더군요.
"그들에게 행복 따위가 무슨 의미였을까요?" 
순간 제 질문이 얼마나 유치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몰래 한숨을 쉬었습니다.

'행복하니?'라는 질문은 언제 어디서나, 말하기로도 듣기로도 매우 민망스러운 말이에요.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단순함이 묻어나거나, 상대방을 정열만을 좇는 사람으로 가차없이 간주해버리는 어색함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관용어를 절대 옳다고 생각할 만큼의 확신이 제게는 없어요. 우선 저부터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넌 뭘 추구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지만, 그것이 '행복'이 아닌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서양 아포리즘들을 읽다 보면 '행복이란 안심 혹은 평온이다' 라는 밋밋한 정의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과연 그정도의 의미인 걸까요? 찌르는 듯한 혹은 덜덜 떨게 만드는 추위와 공포와 불안과 멀미를 면제받는 것- 그게 우리를 안심시키는 행복에 다름 아닌 것일까요?
십여 년 전 어느 소설에서 '그러나 근본에 있어선 사는 동안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 저는 그 뜻을 이해했었습니다.  외면생활의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와 무관하게, 주인공이 지닌 생생한 내면감정은 인생 자체에 대한 감동이었거든요. 즉 존재론적인 차원의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어느 날, 저는 누군가를 향해 편지에다 이렇게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마워, 너로 인해 나는 행복해."
그러나 그때의 '행복'도 성찰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와 시간에 대한 긍정의 언어 정도일 것 같아요.
현재의 제게 있어 신기루 같고 모호한 성질의 행복이란 삶에서 뭔가를 포기한 다음에나 원하게 될 가치입니다. 일종의 타협과 균형의 장소로서 원하기 시작할 어떤 것.

뻘덧: 식사 후 두 시간 째 아버지는 수십 년 사용해온 사인을 바꾸고 싶다며, A4 용지 수십 장을  늘어놓고 혀를 꼭 무신 채 연구 중이십니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입니다. -_-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1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7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26
125266 보고있는 네이버 웹툰 catgotmy 2024.01.17 224
12526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4] 조성용 2024.01.17 409
125264 [아마존프라임] 일생 숙제 하나 또 해결. '문스트럭' 잡담입니다 [18] 로이배티 2024.01.17 356
125263 프레임드 #676 [6] Lunagazer 2024.01.16 68
125262 결국 대기록(?)을 수립한 '베터 콜 사울' [7] LadyBird 2024.01.16 500
125261 Past lives 감상 [4] Kaffesaurus 2024.01.16 307
125260 스즈키 나카바(일곱개의 대죄 작가) 판타지 골프만화 원작 라이징 임팩트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예고편 상수 2024.01.16 122
125259 아미가 컴퓨터의 데뷰 (feat 앤디 워홀) [2] 돌도끼 2024.01.16 117
125258 다들 듀나님 미출간 단편집 북펀딩 하시고 듀게하십니까! [12] heiki 2024.01.16 414
125257 테레비 선전하는 조지 루카스 [4] 돌도끼 2024.01.16 178
125256 스턴츠 음악 돌도끼 2024.01.16 48
125255 남사친, 여사친이 가능하냐는 질문 [9] Sonny 2024.01.16 541
125254 한때 특별판의 제왕이었던 제임스 카메론 [5] 돌도끼 2024.01.16 179
125253 요구르트 군살 catgotmy 2024.01.16 105
125252 [일상바낭] 먹을라고 출근하는건가… [11] 쏘맥 2024.01.16 303
125251 뉴욕타임즈 첫 구독 할인 [2] catgotmy 2024.01.16 153
125250 [왓챠바낭] 분석하고 따지고 의미 찾기 잘 하는 분들 모집(?)합니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 잡담 [18] 로이배티 2024.01.15 355
125249 힐링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5] LadyBird 2024.01.15 231
125248 에피소드 #72 [2] Lunagazer 2024.01.15 46
125247 프레임드 #675 [4] Lunagazer 2024.01.15 4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