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게 즐기기

2019.04.24 01:10

Sonny 조회 수:859

일단 게시판에 불을 몇번 지른 장본인으로서 좀 송구하기도 하고 왜 그렇게 불을 질렀는지 좀 설명할 책임을 느낍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신 부분은 그냥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멍청한 글들에 일일히 지적질을 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아무리 키배라 해도 그것이 대화와 교류의 양상을 띄는 이상 수준 이하의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소모적인 일입니다.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이런 규칙이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만 무시보다는 대응의 우선순위를 제가 더 높이 둘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몇개 있습니다.

1. 말은 무시해도 되지만 글은 쉽사리 무시가 안됩니다.

말은 음성으로 뱉은 즉시 휘발되고 청자의 반응이 없을 시 더 무시가 쉽습니다. 그러나 글은, 이런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특히 가시적인 형태로 오랫동안 존재합니다.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은 경우에는 반대하는 반응이라도 보이는 게 그 글을 가만 놔둬서 중립적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좋을 것입니다.

2. 듀게는 리젠율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무시를 하자! 사실 이것이 최상의 대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무시가 될 만큼 양질의 글들이 계속 생산과 순환을 거듭하는 거죠. 누가 여성혐오에 쩔은 뻘글을 썼다고 칩시다. 그 사이로 조횟수도 높고 댓글도 많이 달리고 첨예한 토론이나 이어가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는 양질의 글들이 여서일곱개씩 상하로 올라와있다 칩시다. 이런 경우에는 그 글을 무시하며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듀게는 그런 환경이 아니라서 방치가 곧 전시가 되고 용인이 됩니다. 베스트셀러가 많아야 안팔리는 책이 알아서 묻히는데, 진열할 책도 없으니 신간 책이 가장 앞에 전시되어 베스트셀러 효과를 받게 되는 거죠. 이럴 때는 황교익을 박살낼 때처럼 전력으로 그런 글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3. 무시한다는 건 그 자체로 방임과 같은 효과를 지닙니다.

이를테면 성희롱 피해자에게 하는 가장 얼토당토 않은 위로가 그런 것이죠. 그냥 미친 놈 만난 셈 치고 너가 잊어버려. 분명히 언어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당한 사람이 본인의 감정까지 다 수습해야 합니다. 아주 부조리한 일이죠.

끊임없이 본인의 편견과 차별을 사견이랍시고 공개게시판에 퍼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고와 감정노동은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요. 듀게 회원 많은 수가 그 글들이 취향의 영역에서 넘어갈수만은 없다는 점에 동의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반복되는 섹시즘에 다수 이용자가 애써 무시를 해야합니다. 무시는 쉬운 행위가 아닙니다. 발끈하는 감정을 억누르는 또 다른 감정노동이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다 정확한 정보와 가치관을 가지고서도 화를 억누를 때, 누군가는 해오던 그대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차별을 전파합니다. 딱히 남을 설득하지 않아도 공개적으로 전시되기에는 한참 수준 미달의 글이 무비판적으로 전시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글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는 의견이 되고 마니까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을 좀 질렀고 불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좀 예상외라 느낀 것은, 생각보다 댓글이 많이 달려서 놀랬다는 것입니다. 딱히 저 정도 화재나 사후 듀게 이용의 방향 토론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 입장을 좀 표명하고 그게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사실 싸우지 좀 말자, 무시하고 넘어가자 이런 글들은 생산적인 양질의 글들이 있을 때 더 효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싸우지 말자는 명문보다 오늘 본 영화는 어쨌네 하는 글이 악화를 구축하는 양화로서 더 높은 기능을 발휘할지도 모르죠. 저 또한 당연히 그런 글들을 많이 쓰려고 합니다.

소요만큼 생산을! 듀게 다른 분들도 차별과 편견에 저마다 저항하면서 즐겨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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