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와 현실, 여성혐오

2019.09.22 16:39

Sonny 조회 수:1645

1. 그나마 페미니즘에 거부감이 적은 이 커뮤니티에서조차도, 여성혐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피로 섞인 댓글이 달리는 게 좀 적응이 안되곤 합니다. 제가 아주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작품들에도 익히 적용되어오던 의문인데도 그래요. 그럴 때마다 오히려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제기의 또 다른 기능을 발견합니다. 커뮤니티 내에서의 토론과 그 결과 찾아지는 결론보다, "당연히 아무 문제도 없는 세계"라는 인식 자체를 흔드는 효과 자체가 더 크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당연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부조리의 중첩입니다. 여성혐오 역시 가장 대표적인 부조리 중 하나일 것이구요.


2. <살인의 추억>이 나쁘다고 이야기를 한 게 아닙니다. 그 영화가 서사로서, 현실을 왜곡하면서 생긴 효과를 진범이 잡힌 이 때 곱씹어보자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많은 분들이 <살인의 추억>의 순기능만을 이야기합니다. 아니오. 그 영화는 순기능도 있지만 여성혐오에 있어서는 역기능 또한 컸습니다. 어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그 작품이 명작으로서 걸쳐있는 위치를 고정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변화한 가치관에서 그 고정성을 한번 흔들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2-1. 댓글에서 모든 현실은 서사로서 재구성될 수 있다는 의견을 봤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현실이 서사로 재구성된다는 뜻은 서사의 재료로서 현실이 소모된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영화라는 서사는 다른 어떤 서사매체보다도 자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고, 이미지적으로 현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큽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세월호를 소환했던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뜻은 무엇인가요. 세월호 사건의 "죽음"을 재구성하여 재현한다는 뜻입니다. 스크린 안에서 아이들이 죽는 걸 또 보고 싶으신가요? 왜? 무엇 때문에? 그걸 단지 개인의 상상에 놔두면 안되는 겁니까? 영화는 반드시 찍어야 하는 게 있는 만큼 절대 찍으면 안되는 것 또한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특히 상업영화들)이 이 기본적인 금기를 어기며 무슨 숭고한 목적의식을 실천하는 듯한 자아도취에 빠집니다. 장준환의 <1987>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그 영화는 민주화 운동의 숭고함을 짚는다는 목적 아래 학생들이 어떻게 고문을 당했고, 어떻게 죽임을 당하는지 오로지 영화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시선의 방향으로 죽음을 있는 힘껏 재현합니다. 우리가 왜 박종철이 죽는 순간을, 심지어 욕조 아래서부터 괴로운 표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봐야 합니까? 영화는 그렇게 죽는 사람의 고통을 착취합니다. 화면으로 재구성된 서사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다 담아버립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그 사람이 차에 치일 때 얼마나 멀리 튕겨져 나갔어? 머리는 얼마나 부숴졌어? 피는 얼마나 흘렸어? 눈알은 튀어나왔어? 숨은 곧바로 멈췄어?" 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미치광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아주 쉽게 그런 대답을 담습니다. 이미지로서요.


2-2. <살인의 추억> "덕분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기억될 수 있었다는 댓글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건 그 영화의 효과입니다. 목적이 아닙니다. 봉준호가 그런 목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역시 분노와 회환을 담고서 그 영화를 찍었겠죠. 그런데 그 영화는 오락영화로서의 성격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뭔가 현실에서의 후속반응을 기대하며 다큐멘터리처럼 찍힌 영화가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장르 영화들도 이런 실패를 엄청나게 합니다) 만약 <살인의 추억>이 현실의 변화를 목적한 영화였다면 그렇게나 흥행이 되고 문화적으로도 유행어를 만든만큼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랬나요? <살인의 추억>은 그냥 "웃기는 대사가 많은", 혹은 "쩌는 대사가 많은" 영화로서 성대모사의 보고로만 이용되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이 개봉하고 인기를 끈 다음에 어떤 프로그램이 생겼나요. 개그콘서트에서 정형돈이 리드하는 패러디 꽁트가 바로 하나 생겼습니다. 그 해 수많은 사람들이 "향숙이?"를 우스갯소리로 외쳤고 <살인의 추억>은 소름끼치는 스릴러이면서 기가 막히게 웃기는 영화로 각인되었습니다. 이 당시 영화를 보고 왔다던 제 친구들이 성대모사를 하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상영된 직후나 지금이나 여전히 농담거리로 더 크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2-3. 만약 이 영화가 한국의 여성혐오와 페미사이드를 주목하는 영화였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논의가 나왔을 것입니다. 이후에 나왔던 나홍진의 <추격자>는 딱히 숭고한 목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영화가 그리는 현실이 워낙 끔찍했고 웃음기가 없었기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불쾌감을 공유할 수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영철이나 다른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도 (가십거리로나마) 많이 나왔었죠. <살인의 추억>에는 그런 효과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습니다. 오히려 2005년도의 한국영화 풍년기를 일컫는 작품으로서 <올드보이>와 VS 놀이를 하는 명작으로 더 굳어졌을 뿐이죠. 만약 이 영화가 댓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적 매체로서 성취했다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질문했어야 합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가리키는 한국사회와 여성은 어땠는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와 여성은 어떠한가. 이 질문이 유의미하게 나오던가요? 아닙니다. <살인의 추억>은 갓띵작이지만 한국은 세계치안1위이고 "꼴페미 계집"들이 피해의식만 공유한다는 이야기가 넘쳐나잖아요?


3. 서영화 배우의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살인의 추억>은 정말 남자들의 재주넘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는 다른 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그나마 덜 착취를 한 편이고 웃는 와중에도 남자들은 자기 일에 열심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띄고 있는 남성적 성격, 즉 여성연쇄살인사건마저도 하나의 거시적인 시각에서의 비유법으로 활용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했던 겁니다. 왜 우리는 여성연쇄살인사건을 보면서도 젠더적인 측면이 아니라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주로 봐야 하는 것일까 하고요. 당연히 그런 측면도 있고, 국가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가리키는 그 진범으로서의 국가에, 우리는 여성혐오나 여성살해의 죄를 물은 적이 있습니까? 오로지 민주주의의 역적이라는 죄목만을 씌웠죠. 그러니까 어떤 분이 댓글에서 지적한 대로, 이 영화는 형사 모두에게 국가폭력의 책임을 물으며 다리를 잘라가고 그 음울함을 전가시킵니다. 그거야말로 이 영화의 성취이면서 이 영화가 여성연쇄살인사건의 젠더를 지우는 효과입니다.


4. <살인의 추억>이 일으킨 부작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땅히 현실에서의 여성을 곱씹어봐야 할 때, 우리는 감정적 공소시효가 다한 지난 사건을 섬뜩하고 웃기는 이야깃거리로 소비하게끔 했다는 겁니다. 이 영화가 일으키는 사유나 유희가 성취점이 아니라고는 못합니다. 이 영화는 나름 좋은 영화에요. 그러나 이 영화는 현실에서의 여성혐오를 상기해볼 때, 그 우선순위를 남성적 유머와 대의에 떠넘긴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질문하고 있습니까? 진범이 잡히고서 죽은 여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를 할 수 있다는 의미를 곱씹고 있을까요? 이 질문을 하지 못한 채로 <살인의 추억>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부작용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여자가 시체로 널부러진 영화가 진지하게 살인범과 사회에 뭔가를 질문하고 있다면, 그 질문의 최종종착지는 "현실의 여자들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주어를 여자로 놓고서 묻는 지점일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389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31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0702
125088 [수정] 연말에는 주위에 '스타벅스 플래너'(다이어리)를 선물하고 있어요. [2] jeremy 2023.12.28 261
125087 프레임드 #657 [4] Lunagazer 2023.12.28 49
125086 '마약과의 전쟁'으로 얻은 것? [4] 왜냐하면 2023.12.28 602
125085 다시한번 전투기를 만들었어요 [6] 돌도끼 2023.12.28 192
125084 스키탈래 죽을래 음악 [3] 돌도끼 2023.12.28 125
125083 십전살수 오십호를 영업합니다. [2] 칼리토 2023.12.28 279
125082 이런저런 잡담... 여은성 2023.12.28 345
125081 [영화바낭] 재밌게 잘 만들었지만 보는 게 고문입니다. '이노센트' 잡담 [7] 로이배티 2023.12.28 454
125080 프레임드 #656 [4] Lunagazer 2023.12.27 85
125079 이선균씨를 비판한 걸 후회합니다 [2] Sonny 2023.12.27 1258
125078 訃告 - 이선균 (1975-2023) [24] 상수 2023.12.27 2069
125077 연말결산 - CGV아트하우스 영화흥행 Top5, izm올해의 싱글, 앨범(국내, 팝) [2] 상수 2023.12.26 354
125076 에피소드 #69 [2] Lunagazer 2023.12.26 66
125075 프레임드 #655 [4] Lunagazer 2023.12.26 64
125074 백만년만에 뽄드칠을 해봤어요 [7] 돌도끼 2023.12.26 257
125073 킹스 퀘스트 4 음악 [2] 돌도끼 2023.12.26 80
125072 [디즈니플러스] 아직은 크리스마스니까! 시즌 무비 '솔드 아웃'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3.12.25 349
125071 프레임드 #654 [4] Lunagazer 2023.12.25 76
125070 [아마존프라임] 코엔 형제 '스타일'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블로 더 맨 다운'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3.12.25 273
125069 최근 본 드라마와 잡담 [6] thoma 2023.12.25 45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