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보낸 메시지

2019.11.16 08:00

어디로갈까 조회 수:762

1. 어머니

"드디어 우리집 단풍나무들이 모두 색을 바꾸었다. 붉고 노란 색들이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답기도 하더라.
나이 드는 일의 장점 한 가지는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정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다.
내가 저 단풍나무들을 심던 시절에 사랑했던 것, 그 사랑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20년이 지나도록.
그러나 이와 똑같은 흐름으로, 세월이 가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장점 또한 나이듦에는 있다.
(후략)"

어머니의 E-mail을 읽노라니 마음의 경계 지역이 산란합니다. 어머니처럼 삶의 가닥들이 명확히 보이는 나이에 이르고서야 인간은 참되게 외로워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돼요.  뭐 젊은 날의 외로움이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대개 해결되는 것이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마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부비대고 옵니다. (이번 주는 다른 일이 있어 못 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 등을 쓸어보는 어머니 손길에서 황량한 회오리바람이 비현실적으로 일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뭐랄까,  지평선만 그어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바람에 휘어진 가는 미루나무 같은 느낌이랄까요. 
어머니가 적시한 '조금도 변치 않은 사랑' 속에는 저도 들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저의 삶의 방식, 저의 침묵, 제가 가리고 보여드리지 않는 얼굴을 견딜 이유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고, 살고 있지도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이해하고, 감사하기.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머니의 '세월이 가면 덧없이 사라지는 것' 속에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사랑 밖에서 그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인 양할 때, 어머니는 아이러니한 소원疏遠을 느끼며 외로우실 거예요. 그러나 저는 이미 어머니와 다른 삶으로 넘어섰어요.  그 고독의 왕국은 너무나 넓어서, '어머니 속의 나'에게 이르기에는 멀고도 멀어졌기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큰 등한은 상대에게 아무런 '현재'도 주지 않는 것이죠. 저는 어머니의 현재지만 어머니는 저의 현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깊고 무거운 관계가 진행되는 방식인 거죠.
어머니의 메일로 인해 '존재의 슬픔'에 대한 은유들을 더듬어보고 있습니다.  현재의 피로한 '나'가 태어나기 전의 따뜻한 어둠을 찾아 해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2. dpf

어제 퇴근 무렵, 커피를 마시며 다음 주 브리핑할 파일을 점검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상 앞 유리 파티션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개를 드니, 노란 국화다발로 목 부분을 가린 dpf가 저를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어요.  메신저로 나누는 퇴근 인사를 생략하고 찾아와 천연히 웃고 있으니 동화 속 소년 같았습니다. 
마주 웃어주고서도 몇 초가 지나서야, 파티션을 통해서는 내 자리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어요. dpf는 자신의 얼굴만 되비치는 유리 앞에서 마치 내가 보인다는 듯 웃고 있었던 거예요.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자리를 향해 미소짓기. 이것은 우리 삶의 보편적 형식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론 실현되기 어려운  미덕인 것이죠.  그가 인사와 함께 던져놓고 간 국화다발로 인해 지금 제 방에까지 '존재의 향기'가 은유적으로 가득합니다. 현재의 피로한 제가 소녀시절의 어떤 생기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랄지 뭐랄지. -_- 

3. 조카(의 공개일기)

"오늘은 그리스의 날이었다. 나는 그리스의 전통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운동장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 이름은 Jack Mason이다. 내가 교실에 들어갈 때 친구들이 **이 멋있다고 말했다. 내 옷이 좀 멋있는 거 같았다. 엄마도 발표회를 보러 왔는데 내가 강당으로 갈 때 보니까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발표회에서  perseus the Gorgon slayer 이야기를  좀 읽었다. Rosie 다음에 읽었다. 다음에는 Oliver와 Whoasif가 읽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어주면 다른 친구들이 연극을 했다. 나는 Rosief를 사랑한다. Oliver와 Whoasif는 좋아한다."

-제가 단 댓글. 
하루를 돌아보며 생각을 헤아리고 기록하고 예측하는 너의 일기를 읽을 때마다 산책하는 기분이야.  생각과 마음을 이러저리 흩뜨려보게 하는 <산책>.
산책이 뭘까? 천천히 걷는 것만을 뜻하는 건 아니야. 
散策 : 책策을 흩뜨리는 의미도 되는데,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울거야. 기억해두고 엄마랑 한문사전을 함 찾아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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