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해질무렵 안개정원>은, 맨부커 상 후보작이었던 동명 소설 원작의 말레이시아 영화입니다. 관심 있었지만 못봤던 영화였는데, 세계 배급을 CJ가 맡은 것 같더라고요. 국내 공개를 기다리면서 원작 소설을 사다가 읽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진한 아픔으로 남은 일제강점기 및 2차대전의 시대는,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격동과 상처의 시기였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해준 이야기였어요. 

작가 탄 트완 엥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받은 변호사로, 윤 링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시대가 개인에게 준 아픔과 그 치유 과정을 매우 지적인 감성으로 엮어냅니다. 

그건 매력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한계처럼 생각 되기도 했어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식인 다운 사유에 머무르는 느낌이랄까요. 그럼 그 이상 뭘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별 답은 모르겠습니다.


윤 링은 일본군의 말레이 점령 이후 언니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되었고 윤 링은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됩니다. 제 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운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기 위해, 어떤 사람은 집에 수집해 둔 우표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곱씹고, 또 어떤 사람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연도 순으로 외우기도 합니다. 윤 링의 언니 윤 홍은 어릴 때 교토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을 매일 매일 떠올리며, 언젠가는 자신의 정원을 가꾸리라는 상상으로 괴로운 현실을 도피합니다. 

언니는 결국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고, 윤 링은 그 수용소의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남습니다. 이후 검사보로서 전범 재판에 관여했고 판사가 되었습니다. 윤 링은 언니의 정원을 대신 가꾸어 주리라 다짐하고 일왕의 정원사였던 남자 아리토모를 찾아갑니다. 아리토모가 왜 모국을 떠나 말레이에 정착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그는 언니를 위한 정원을 만들어 달라는 윤 링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그녀를 자신의 견습생으로 받아들입니다.


말레이 반도는 열대 우림의 땅이며, 여러 인종이 섞여 살아가는 동서양이 만나는 곳입니다. 영국 식민지 시기 이후 남은 유럽인들, 돈을 벌고자 흘러 들어와 정착한 화교 가문들,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말레이 원주민들.. 이념의 대립이 야만적인 폭력과 살인으로 휘둘러지던 시대, 뒤섞인 이국적인 문화들은 슬픈 시대적 낭만을 자아냅니다. 인위적일 만치 섬세하게 가꾸어진 일본식 정원과 일본 특유의 그 절제된 예술 개념은, 야만으로 얼룩진 당시의 현실 속에서 마치 혼자 딴 세상을 건설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정원을 통해 시대를 비추는 이야기 방식은 인상적인 여운을 남겨서, 분명 이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고 싶은 욕구를 일게 합니다. 이 장대한 시대극을 영화로 어떻게 찍었을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_ 비록 수용소에 갇혀 사는 삶은 아니지만, 일상의 비루함을 살아내는 갑남을녀들에게도 비현실의 세계 어딘가로 정신을 보내버리는 순간은 필요하지요. 장한나가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한-노르웨이 수교 몇 주년이라고 그러더군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첼로를 안고 땀에 드레스를 흠뻑 적시며 연주에 몰입하던 어린 장한나를 기억합니다. 11세에 음악 커리어를 시작해서 20대 중반에는 이미 빤한 첼로의 주요 레퍼토리를 끝내버렸으니, 천재에게 새로운 도전은 필연적이었을지 모르지요. 이제 지휘자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이 젊은 음악가는, 무려 데뷔 25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젊습니다.


장한나와 악단이 호흡이 무척 좋아 보였어요. 특별히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한 해석과 기본에 충실한 느낌도 좋았고, 자신들의 실력 안에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열정이 전해져서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협연자 임동혁은 컨디션이 최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장한나와 잘 맞아 보여서 좋았어요.    

악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작곡가가 자신만을 위해 쓴 편지를 읽는 것 같다고, 장한나가 언젠가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지요. 너무 와닿는 표현이라 기억에 남았습니다. 장한나는 무대에 페르귄트 모음곡, 비창 교향곡의 악보를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신만을 위한 편지의 구절구절을 머릿속으로 아로새기면서 연주했겠지요. 또 수트를 땀으로 흠뻑 적시며, 온몸으로 지휘하는 장한나의 작은 뒷모습이 정말 커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창 교향곡은 차이코프스키의 유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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