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추정의 원칙'을 두고 이 게시판의 정의감 넘치는 분들과 달리 저는 대개 원칙은 원칙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박원순 시장 자살 건은 좀 성격이 다르죠.

고소인이 고소장과 함께 수사기관에 물증을 제출했고 피소 사실을 알게된 변호사이자 유력 정치인인 피고소인이 소장 접수 다음 날 자살했다면, 확정되지 않았을 뿐 박시장의 유죄를 추정할 근거로는 차고 넘친다고 할까.

장례 치르고 나면 민주당과 서울시는 유족의 입을 빌어 쿨하게 박시장의 성추행 혐의를 인정할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 출구가 없으니 말이죠.
그럼 논란을 초래하며 강행하는 서울특별시5일장이며 시민분향소며 하는건 다 뭐냐, 민주당 입장에선 그분의 '과'를 덮을 '공'을 최대한 부풀리며 시간을 벌어놔야 하기 때문이겠죠.

민주당과 서울시가 '고인에 대한 예의'를 명분으로 함구하는 동안 친여권 외곽 단체들은 적당히 성명이나 내놓고 기다리면 돼요. 장례가 끝날 무렵이면 들끓는 비판 여론도 좀 사그라들거란 계산도 있을테고. 욕 좀 먹으며 버티다 장례 끝나면 신속하게 박시장의 혐의를 시인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진상 조사 요구를 무력화시키면 됩니다.

추가적인 조사는 하지 않겠다는 민주당과 서울시의 방침 발표를 보면, 혐의를 인정하건 말건 박시장의 유족들이 더 이상의 진상 조사를 원치 않는다 짐작할 수 있죠. '실추된 고인의 명예'에도 불구하고 고소인과의 다툼을 바라지 않으실테니 말예요. 혐의를 인정한다 해도 사실과 무관한 고소인을 향한 위로의 제스쳐로 남게 될겁니다. 이 얼마나 고결한 선택이란 말입니까.

민사로 대응해봐야 피고소인의 죄책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빚만 7억이라니 유가족은 상속을 포기할테고 상속인에 대한 민사 청구는 기각되겠죠. 변호사인 박시장이 몰랐을 리 없고, 금융권 채무 4억여원 소멸도 덤으로 따라오는군요.
유서에 채무 상속과 이행을 당부하기만 했어도 박시장의 사람됨을 좀 낫게 평가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만, 지금은 그 대신 변호사로써의 꼼꼼함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박시장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추행 혐의는 잊혀지고, 고소인의 안녕을 바라는 유가족과 시장님의 어쩌면 억울할 지도 모를 동기를 알 수 없는 자살만이 남게 되겠죠. 아니, 한국 현대사에 남았다는 그분의 거대한 발자국과 함께 재단이니 기념사업회니 하는 것들도 남게 되긴 하겠지만.

쉬운 게임이죠. 이해찬처럼 '후레자식!'하는 호통을 쳐볼 기회도 몇번 있을테고 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진심으로, 서울시와 민주당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짓을 포기하고 중립적인 조사위 구성을 추진하여 고소인이 제기한 의혹에 성실히 답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너무 멀리 가지 않는게 좋을겁니다. 당신들은 일개 정파가 아니라 국정 운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고 미래 세대에 책임이 있는 어른들이예요.
유가족 분들께도 고인의 명예와 진실 규명을 위해 고소인이 제기한 의혹을 회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받으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게 혐의를 시인하는 일 없이 자살한 고인과 고소인의 용기를 대하는 예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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