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얼굴을 그립니다.

2011.08.28 22:19

미선나무 조회 수:1096

제 앞에는 지금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들 둘이 껴안고 있는 얼굴사진입니다.

이 아이들은 제 남편 직장동료분의 딸들입니다.

지난주 남편이 퇴근 후 동료와 술을 마실 참인데 저도 나오라고 해서

시간 맞추어 나갔습니다. 남자들 이야기에 저 혼자 심심할까봐 스케치북도 하나 껴들고요.

 

동료분은 해사한 얼굴의 30대 남자였습니다.

교포 출신이라 그렇겠지만, 말투가 또박또박하고 다소 어눌한 데서 나이보다 어린 느낌이 났습니다.

남편은 그전에 종종 이 동료 이야기를 하면서 안됐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월급도 적은데, 그나마 한달 번 돈 중 140만원이 두 딸들 유치원비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합니다.

그 아내분도 한국인 옷가게에서 점원 일을 하며 돈을 번다고 합니다.

그렇게 번 돈이 대부분 두 아이 뒷바라지에 들어간다 합니다.

 

현지 교포 출신 사원은 한국에서 파견 나온(제 신랑 같은 경우) 사원보다 월급도 적습니다.

동료분은 점심시간마다 본의 아니게 회사 근처 음식점을 오랫동안 순례해야 한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싼 음식점을 찾기 위해서.

그런 음식점이 맛이 있을 턱이 없고, 또 점심시간마다 음식점을 여기저기 도는 것도 짜증이 나고,

그런 동료의 처지도 안스러워

제 남편이 점심을 그냥 사준 일도 몇 번 있다고 합니다.

 

그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기에

동료분에게 연민 섞인 호감이  쉬이 갔고, 덕분에 그날 술자리는 즐거웠습니다.

(제가 붙임성이 없어, 원래는 남편의 동료와 친구들과 쉽게 하하호호 이야기 나누질 못하거든요)

그러다가 남편과 동료분 두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저는 무료해졌고

술기운도 버쩍 올라서

남편에게 나 그림 좀 그릴게, 하고 스케치북을 꺼냈어요.

브라질 사람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그리고 있으면, 요즘 몸에서부터 감당하기 힘든 술기운이 좀 가시거든요.

마침 우리 테이블 앞자리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남자가 보여, 그 남자를 그렸습니다.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평소 같으면 주저주저 나가는 연필 잡은 손이 그날은 스윽스윽 잘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모델이 카드놀이를 그만두고 자리를 뜨려 하는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분이 제 그림을 보더니

저의 모델을 찾아가 그림을 들고 보여주었습니다.

카드놀이하던 그 분은 몹시 기뻐하더군요.

그리고 그림 밑에 사인과(응? 화가가 아닌 모델이 사인을 하다니=_=)페이스북 주소를 적어주고는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어 칭찬과,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떴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노홍철을 닮은 인도 핏줄의 브라질레이루도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다른 남자도 그렸습니다.

그 때마다 제 남편의 동료분이 그림을 뺏어들고 가서 제 모델들에게 보여주었고,

저의 모델들은 더없이 기뻐하며 칭찬도 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제겐 가장 큰 칭찬이지만...

덕분에 노홍철 닮은 분과 브라질에 와서 처음으로 베이지뉴(볼을 맞대어 키스하는 흉내를 내는 인사)도 해 보았습니다.

 

동료분은 딸들 사진을 제 남편을 통해 전해줄 테니, 자신의 딸들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구요.

그분이 술기운이 좀 올라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잊어버리겠지,했는데

 

 

...다음날 퇴근길에 남편이 사진 한 장을 팔랑팔랑 내밀었습니다.

 

 

저는 덕분에 지금 스케치북을 펴놓고, 사진을 때때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아이가 둘째딸, 오른쪽이 큰딸인 모양입니다.

둘째딸은 엄마를 닮은 것 같은데, 동양아이답게 생긴 애교 있는 이목구비가 예쁩니다.

큰딸은 커다란 빨간 안경을 쓰고 있는데, 똘똘하고 귀염성 있는 인상입니다.

이 큰딸아이는 학교(오전엔 학교에 가고 오후엔 유치원-탁아소 개념인 듯해요-에 갑니다)에서

두달마다 보는 시험에서 늘 1등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 귀엽고 똑똑한 아이들을 위해서

아직도 철이 덜 들어보이는 아이 아빠는 맞지 않는 회사생활을 견디며 얼마 받지도 못하는 월급을 벌어다 주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아빠는, 아이들만 보고 있으면 140만원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깝지 않다고 합니다.

 

 

 

남의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것 같지 않은, 연민과 정과 이러저러 복잡한 마음이 섞인 느낌으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서히 연필을 들어봅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