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이 작품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완전 엄청 좋아하던 아티스트인데 정작 개봉 당시에는 못보고 엄청 뒷북으로 보게 되었네요.


개봉 당시 보지 못한(않은) 것에는 ①(완성도 면에서) "영화 자체가 좀 후지다"라는 평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②(완성도를 떠나서) "노망난 노인네가 은퇴하는 마당에 자기 이전 작품들에 똥칠하고 떠난 망작이다"라는 평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네요.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그 전에 그렇게 아름답고 대단한 작품들을 만들었던 할아버지가 도대체 왜 마지막에 그런 선택을 했냐는

강한 배신감을 느꼈더랬었습니다.

작품을 보지 않았어도 시놉시스와 논평들만으로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요.

이 할아버지를 좋아했던 만큼 배신감도 크고, 또 볼 용기도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방금 본 감상은 이 영화가 이 할아버지의 이전작들 못지 않게 뛰어나게 아름답고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전범을 미화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유명한 반전주의자로,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함께 일본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나 반전주의자야"의 액션 또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럼 나는 도대체 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정리하게 위해 몇 자 써봅니다.





2. 탐미주의자



제 결론 중 하나는 이 할아버지의 본질은 탐미주의자이고,

이분의 반전주의ㆍ환경주의 사상은 이 분의 휴머니즘에 대한 교양학습의 결과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들이나 이 분의 언행을 보았을 때 이 분은 그 방면에 대한 훌륭한 교양인이지만,

(이 수준조차 못 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인 이 세상에서 이 정도면 이 분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본질은 탐미주의자이기 때문에 탐미주의와 휴머니즘 중에 반드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탐미주의를 고를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강렬한 이미지가 떠올랐고

교양인으로서 그것이 배덕하다는 것을 모를리 없지만

진짜 마지막 작품이고 이걸 너무 만들고 싶어서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네, 어느 측면에서 작품의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는 이 작품을 만들던 미야자키 할아버지에 대한 자화상이기도 하겠네요)


이 작품에 쏟아질 비난들과 그 타당성에 대해서 이 할아버지가 몰랐을리가 없습니다.

다만 이 할아버지는 이 아름다운 영상을 도저히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것도 자신이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장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체면보다는 자신의 소원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또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누군가 "당신이 전투기(전쟁무기) 매니아면서 반전을 부르짖는 모순에 대해 답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물은 것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니


여기에 대해 

"하.. 그래 나 실은 탐미주의자야. 

나도 그게 좀 별로라는 거 알지만 이제 늙어서 은퇴하는 마당에 더이상 거짓말하지 않겠어.. 

날 봐 그래 이게 바로 나야"

라고 고백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고백에 대해서는 챕터 4. 에서 상술합니다)





3. 예술, 영감, 욕망, 충동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역시 지로가 꿈속에서 카프로니 백작을 만나 수많은 비행기들의 환상을 보는 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작품이, (어떤 사상이나 계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씬의 이미지에 대한 영감과 충동에서, 그것을 구체화된 작품으로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전투기 덕후, 밀리터리 덕후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 비행기들이 저렇게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장면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는데 그걸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으로, <늑대아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늑대인간 꼬마아이들이 초원을 마구 뛰어다니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 있는데, 

그 작품의 출발지점 역시 바로 그 씬에 대한 이미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의 전투기 사랑은 <붉은 돼지>에서 이미 한 번 보여준 바 있습니다만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 교양인으로서 전투기들의 이미지를 마냥 아름답게만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

근데 이번에는 그걸 해낸 거죠.




전범을 미화하지 않으려고, 또 인물에 대해 중립적으로 그리려고 나름대로 엄청 노력한 것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일단 전범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만들면서 전범에 대해 중립적으로 그린다는 것 자체가 

"전범을 비판하지 않는다"라는 하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고,


이 할아버지가 이 작품을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저 인물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는 장인의 숙명이랄까요.





4. 고백



이 작품을 보면 미야자키의 이전 작품들이 달리 보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 작품들의 본질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이 할아버지의 이전 작품들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엄청 깊이 있거나 심오한 작품들이 아닙니다.

"아니 애니메이션인데 이런 주제의식을!"이라는 버프 때문에

좀 과대평가된 점이 없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분의 작품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점이고,

교양인으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으로 휴머니즘 사상을 담은 작품들을 만들어 왔었지만

결국 이 분의 본질은 탐미주의자에 전쟁무기 덕후..

그게 배덕하다는 걸 알고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전쟁을 반대하는 작품을 만들면서도

전쟁무기와 전쟁씬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




바로 그러한 자신의 자신의 그런 본질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자신의 은퇴작을 통해서는 더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

그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모를리 없으면서도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이고,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들의 본질도 더 잘 드러난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그 점이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는 완전히 솔직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그에 대해 작품을 봐달라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티스트가 작품으로 말했으니 작품을 봐달라고 한 점은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과거 작품들에서 여러 측면에서 드러났던 그의 모순과 한계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 솔직하고 정리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과거 작품들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정리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는 약간은 안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대단하고 훌륭한 아티스트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예술충동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고, 아티스트가 꼭 성인(聖人)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또 이렇게 평가가 가능한 것은 그가 마냥 생각 없는 탐미주의자가 아니라

교양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 나름대로는 힘껏 애써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5. 나가며



제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에반게리온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입문했습니다.


그 중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했을 뿐만 아니라

지브리 자체가 이제 경영난으로 더이상 장편 애니메이션 자체를 만들지 않게 되었다고 하네요.


근데 또 공교롭게 이 영화의 주인공의 성우를 안노 히데아키가 맡았습니다.


영화에서 주요한 대사 중 "인간이 가장 뛰어나게 창의적일 수 있는 기간은 10년이 한계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안노 히데아키는 은퇴하지는 않았지만 그 "10년"이 진작에 끝나서 이미 퇴물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근데 이 할아버지는 놀랍게도 그 기간을 수십년 넘게 유지했죠.

충분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단한 아티스트로 살아오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두 크리에이터와의 이별 작품이 이런 작품이 되었습니다만.

크게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생각한 것처럼 위대한 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존경하고 뛰어나고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할아버지가 제 인사를 들으실 일은 없겠지만,

할아버지와의 이별로 인한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니

할아버지에 대한 인사로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작품들로 인해 그동안 많은 행복과 기쁨을 얻었고,

그로 인해 무척 감사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3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8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53
125974 [KBS1 독립영화관] 교토에서 온 편지 [2] underground 2024.04.12 231
125973 프레임드 #763 [4] Lunagazer 2024.04.12 54
125972 넷플릭스 시리즈 종말의 바보 공식 예고편(이사카 코타로 원작, 안은진 유아인 등 출연) [2] 상수 2024.04.12 293
125971 칼 드레이어의 위대한 걸작 <게르트루드>를 초강추해드려요. ^^ (4월 13일 오후 4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 마지막 상영) [2] crumley 2024.04.12 139
125970 '스픽 노 이블' 리메이크 예고편 [4] LadyBird 2024.04.12 198
125969 리플리 4회까지 본 잡담 [3] daviddain 2024.04.12 218
125968 란티모스 신작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 티저,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놀란영화 12편 순위매기기 상수 2024.04.11 188
125967 [왓챠바낭] '디 워'를 보고 싶었는데 없어서 말입니다. '라스트 갓파더' 잡담입니다 [13] 로이배티 2024.04.11 328
125966 프레임드 #762 [4] Lunagazer 2024.04.11 56
125965 스폰지밥 무비: 핑핑이 구출 대작전 (2020) catgotmy 2024.04.11 91
125964 총선 결과 이모저모 [22] Sonny 2024.04.11 1372
125963 오타니 미 연방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9] daviddain 2024.04.11 407
125962 10년 전 야구 광고 [2] daviddain 2024.04.11 132
125961 22대 총선 최종 의석수(업데이트, 21대와 비교) [1] 왜냐하면 2024.04.11 508
125960 [핵바낭] 출구 조사가 많이 빗나갔네요. 별로 안 기쁜 방향으로. [14] 로이배티 2024.04.11 1153
125959 프레임드 #761 [2] Lunagazer 2024.04.10 74
125958 [핵바낭] 아무도 글로 안 적어 주셔서 제가 올려 보는 출구 조사 결과 [22] 로이배티 2024.04.10 1066
125957 [왓챠바낭]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의 영화 만들기 이야기,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잠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4.04.10 177
125956 간지라는 말 [7] 돌도끼 2024.04.10 357
125955 우리말에 완전히 정착한 일본식 영어? [5] 돌도끼 2024.04.10 37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