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런 일이 없기를 늘 바라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저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들만 주워 읽은 여자입니다. 방관자이기도 하고요.

사실 페미니즘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왔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고, 여성인 스스로를 혐오하기까지 해왔고,

여성 차별? 혐오?의 반대급부로 생겨난 것들에 오히려 편리함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아버지+순종하는 어머니상을 보며 자랐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딸들에게

너희는 남자 낳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 여자는 남자의 자존심을 세워줘야지 자꾸 이겨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

넷째(4남매 중 유일한 남자)를 부엌에 들게 하지 말아라 XX 떨어진다.. 뭐 이런 말들을 하시는 분들이에요.

동생은 이미 성인인데도 빨래를 쌓아놓기만 하고, 차려진 밥을 먹고 그냥 자리를 떠버리는 아이죠.

남동생이 엄마와 외할머니를 무시하려 들 때 편을 들어드리면, 동생 앞을 가로막고 서서 오히려 언니들과 제게 뭐라고 하시고요.

내 아들한테 뭐라고 해서 화가 났다고 하시죠.

아버지야말로 아들 아들 하는 분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병들고 약해지기 전까진 늘 주정과 폭력에 벌벌 떨고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남자 자체를 무서워하면서 살아왔어요.

이게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페미니즘이랑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차별과 혐오, 아니 남성에게 분노했던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그렇네요.

여성인 어머니가 남성인 아버지에게 당하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십수년간 보고 자라왔으며

어머니에게조차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해왔다는 이야기예요.

또한 저 스스로도 그런 관계들이 익숙하고요.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조금은 깨닫게 됐고, 페미니즘에 대해 더 공부해서 좀 올바른 발언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고요.

스스로도 '난 여자니까..' '쟨 남자니까..' 하는 생각의 굴레에서 좀 벗어나보고 싶기도 해요.

다른 많은 여성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저는 제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은 권익을 누리지 못한 대신

좀 편하게 살아온 것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것은 군대 문제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요)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사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뭐라 반박하고 싶기도 한데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것도 있어요.

제가 '남혐'이라는 말에 화가 나는 이유를 알고 싶기도 하고요. (사실 남혐보다는 남성 증오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여혐과 남혐이 똑같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럴만한 근거가 스스로에게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좋은 책들 좀 추천해주십사 하고 글을 남깁니다. 영어로 책을 읽을만한 실력은 안 돼요.

misogyny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았는데 다소 분노에 찬 글들이 많아서 읽기가 힘들더라고요..


2.

남자친구와 이번 강남역 묻지마 살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싸웠어요. 원래 자주 싸우긴 하는데.. 이번 얘기는 애초에 제가 꺼내지 않는 게 현명했겠죠.

저는 이번 사건이 여혐범죄(?)라고 생각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어요. 정확한 것은 더 면밀한 정신감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회에 만연한 여혐이 심각할 정도의 수준이고, 그 살인자도 여혐인 건 맞지만.. 살인으로까지 나아갔다는 건

여혐을 떠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에 여혐이 없었더라면 다른 혐오정서를 구실로 살인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이 사건과는 별개로 여성 차별, 여성 혐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지적 게으름과 무지함, 정신이상에 대한 편견,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뼛속 깊이 스며있는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오는 건가 싶어서 괴로웠고요.

그냥 제발 그만 좀 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이 괴로움을 남자친구에게 토로했는데, 어찌어찌 얘기하다보니


남자친구에게서 '싸움이 커진 발단은 모든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일부 강성 여성주의자들 때문에 온건적인 사람들도 여혐으로 변질된다',

'과격하게 행동하면 반감을 사는 것은 사실이다.' 등등의 말들을 듣고 그에 반박하다보니 입씨름으로 변질됐고요.

잠재적 범죄자라고 취급한 게 사건의 발단이라고 말한다면, 애초에 여혐범죄가 맞다는 주장을 메갈, 남혐 선동이라고 매도한 게 발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디에 주목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이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일부의 잘못을 남성, 여성 전체로 확대하고 일반화하는 것 때문에 이런 소모적인 싸움이 생긴 것 아니냐..

이런 논조로 말했고요. 세 시간동안 똑같은 주제로 싸우다가 지치고 화가 나서

남자친구에게 남탓 좀 하지 말라고, 남자 입장에서만 생각한다고, 내 입 막으려고 하지 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화해하긴 했는데 앞으로 이런 얘기 안 하기로 하고 끝내서 영 찝찝하네요. 

물론 남자친구가 위에 적은 말만 한 것도 아니고, 여성들이 얼마나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인식하려고 노력하고

편향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제 말은 안 듣지만..), 제가 생각하는 한국의 평균 남성보다는

여성의 불평등, 차별,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이 바른 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좋은 사람조차도, 같이 얘기하다보면 결국 여성들에게서'만' 문제점을 찾는 것에 시선이 집중돼있다는 생각이 들고

결국 근본적인 이야기는 하지도 못하게 돼요.

'혐오? 당연히 나쁘고, 성평등은 좋은 거니까 이루어져야 하는 거 맞는데 방식이, 정도가 잘못됐고, 미러링이랍시고 남혐하는 건 '똑같이' 나쁘다.

왜냐하면 블라블라...' 라는 말이 대부분이니까요.

이런 걸로 무슨 마음이 식고 그런 건 아니지만..ㅎㅎ 왠지 모를 좌절감이 들어 마음이 번잡해요.

그리고 남자친구는 됐다 쳐도, 정말 많은 남성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게 사실 진짜 괴롭습니다.

오히려 일베로 지칭되는 사람들보다 더 넘기 힘든 산이라는 생각까지 들고요.

그런 인간들이 여성을 대놓고 비하하고 경멸하고, 종류까지 나눠가며 욕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자신들이 여성보다 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들은 똑같은 수준으로 대해주거나, 무시하거나(그냥 스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응당한 법적 규제가 이루어지도록 나아가면 되지만(물론 이것도 어렵고 힘든 과정이겠지만요)

'나는 아닌데 왜 뭐라고 해!'라고 반발만 하는 남성들이야말로

여성들의 (감히) 강한 모습에 위화감과 반감을 느끼고, 아무것도 타협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태도로 느껴지고요.

오히려 더 어려운 사람들 같아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스스로가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있나 싶기도 해서 괴로워요.



불특정 다수의 남성 일반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며 반발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남자들이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20대 중반 여성으로서, 그래서 20대 남성들이 남자라는 이유로 저보다 무슨 권익을 더 많이 누리는지 모르겠기도 하고요.

이런 문제가 극단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수면 위로 올라오니, 거부감이 들만하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인들이 잠재적 범죄자가 아닌 선량한 사람이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을 법도 한데, 왜 이렇게까지 불쾌해하고 박하게 구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해요..

그리고 도대체 이런 때라도 아니면 언제 들어줄까, 언제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본인들도 은연 중에

여자친구가, 아내가, 어머니가, 여동생이, 누나가 밤 늦게 귀가할 때 혹시나 해코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게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거랑 어떻게 같나요?

정도를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이것이 여성들이 습관처럼 느끼고 살아가는 공포와 불합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는 걸까요.

잠재적 범죄자 취급 당했다고 그럴 게 아니라, 늘 피해자 후보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그냥 좀 들어주고 트집 잡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애초에 피해자, 약자,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문명사회(?)의 덕목 아닌가요?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들이 어떻게 해야 듣는 자세를 취해줄 용의가 있다는 건지. 그런 자세가 부탁을 함으로써 나오는 게 과연 정당한 건지

부탁을 해서 되긴 하는 건지. 부탁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목소리들을 들어줄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정말.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나아가기를 원하는지조차.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살인자가 정신이상이든 여혐이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정말. 아주. 숨통이 트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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