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 인터넷, 그리고 여혐논란

2016.09.20 19:21

MELM 조회 수:2079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가 있어요.

2007년 web of science 조사에 따르면 인문사회과학에서 푸코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피인용 2등을 했을 정도로,

문과출신이시라면 한 번 정도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법한 네임드죠.


한국에도 90년대 들어 점차 소개되기 시작했고, 책들도 꽤나 번역되어 있어요.

다만 다수가 동문선에서 나온만큼 번역이 개판인지라 그닥 읽히지는 않았고, 그나마 주저 중 하나인 『구별짓기』 정도가 많이 읽혔죠.

그러다보니 부르디외의 다양한 논의 중에서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계급론이 주로 연구되었고,

그의 이론의 바탕을 이루는 장에 대한 논의는 그닥 활발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어요.


부르디외는 장을 위치들의 구조화된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대충 하나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제도화된 공간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해요.

경제장에서는 돈에 대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예술장에서는 예술에 대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뭐 그런 식이죠.

그리고 저 말은 장들이 각기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강수연이 했다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장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돈이 아니라 가오, 즉 에술적 인정이 필요한 것처럼요.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 시리즈로 돈을 아무리 벌어봤자 노벨문학상 받을 일이 없고, 스티븐 킹에 대한 폄하가 아직도 존재하는게 현실이죠.


이리보면 장이란 개념이 뭐 그리 대단한가, 당연한 소리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보기보다 꽤 큰 파장을 가져왔던 개념이기도 해요.

일례로 문학사회학에서 부르디외 이전에는 사르트르를 따라서 계급적 분석이 주를 이뤘어요. 저자가 되었든 작품이 되었든 계급적 관점에서 분석하는거죠.

그런지만 부르디외가 『예술의 규칙』이라는 책에서 문학장의 고유의 논리를 무시한 체, 단순히 계급적 관점으로 환원하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면서, 적어도 그런 식의 환원른은 설득력을 잃게 되요. 


물론, 부르디외가 돈의 논리나 계급 논리 같은 문학장 외부의 요소들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 건 아니에요.

다만 그런 외부의 영향들은 문학장의 논리에 따라서 '굴절'된다고 이야기해요.

즉, 외부의 요소들이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것은 쁘띠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것이야!)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문학장 고유의 논리(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적이란 것은 무엇인가?)와 부딪침으로서 나타난다는 거죠.

그리고 각 장의 자율성의 정도가 높을수록 굴절의 정도는 커지겠죠.


부르디외는 이 논리를 문학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 분석의 모든 곳에 적용해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분석이고, 이 분석을 통해서 부르디외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단지 나찌즘의 철학적 표현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철학적 표현이 아니라,

철학장 고유의 논리(당시 철학장을 지배하던 신칸트주의와의 대결)를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주장했어요.


서설이 무척이나 길었네요. 이런 부르디외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요 근래 몇 달 동안 넷상에서, 그리고 듀게에서도 벌어진 치열한 여혐논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에요.

기나긴 논란 끝에 주요 발언권자들(언론과 정당)의 입장이 대충 정해진거 같아요. 물론, 그 동안 관망만 하던 보수언론이 뒤늦게 뛰어들어 판을 다시 키우려고 하는 거 같긴 하지만요.

보수언론의 참전을 차치하고 상황을 보면, 적어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발언권자들을 중심으로는 메갈리아 진영이 판정승을 거둔 것처럼 보여요.

물론, 반메갈리아 진영에서는 판정을 인정하지 않고, 니들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반응이 주를 이룹니다만.


진보진영에서 메갈리아가 판정승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직까지 혹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하나의 사회적 실재로 존재한다는 주장에,

진보진영이 강하게 동의하고 있기 때문일 거에요.

그리고 이런 동의 위에서 이번의 여혐논란을 해석하면, 사실 진보진영의 입장은 미리 결론이 나 있는 것이었어요.

반메갈리아는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여성차별의 웹 버전이며, 메갈리아는 그에 대한 저항이다.


시사인의 기사들을 비롯해서 진보진영의 수많은 분석들이 존재하지만, 절대다수의 분석들이 이번 사태를 '젠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젠더의 문제로 환원해요.

그리고 젠더의 문제로 환원되는 순간부터 소위 진보적이라는 한국 남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대꿀멍 하는 거 말고는 사실 할 말이 없어요.

마치 계급적 논의랑 비슷하죠.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계급문제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이란게 대꿀멍하는거 말고는 없는 것처럼요.


그렇지만, 앞에서 부르디외 논의에서 봤듯이, 장은 상대적 자율성을 가져요.

외부적 요소들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장의 논리에 따라 굴절되죠.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젠더 논리가 어떻게 인터넷(그리고 게시판)이라는 공간과 만나서 어떻게 굴절되는가, 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전무한거 같아요.

이번 사건에 있어서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인데 말이죠.

사건의 시발점이 된 곳도 인터넷이고, 사건이 유지되는 곳도 인터넷이며, 심지어 오프라인으로 번졌던 일들도 인터넷에 피드백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이루어지는 일들이죠.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논리, 그 안에서 어떻게 특정한 주장들이 상징투쟁 끝에 영향력을 획득하는지의 논리는 기존의 오프라인과는 완전히 달라요.

미러링이라는 전략 저체가 인터넷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반메갈리아 진영에서 메갈리아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는 과잉들 역시, 인터넷의 특수성에 기반한 것들이 많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논리에 대한 분석이 거의 빠진체, 기존의 젠더논의를 반복하니,

하나마나한 이야기, 재탕에 삼탕같은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이미 결론이 지어진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결국 모든 논의들이 공전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젠더문제가 웹과 만나 어떻게 굴절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제 좀 나왔으면 해요.

아직까지 주로 저널리즘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학계에서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되지 않은 듯 한데,

적어도 학계에서는 저런 환원주의는 피하고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좀 강하게 말하면, 만약 학계에서도 저런다면 그건 지적 퇴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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