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6 22:39
튈르리 궁의 습격 - 카루젤 광장의 전투 (1792년 8월 10), 장 뒤플레스 베르투아
언젠가 주명철 교수(서양사학, 한국교원대)는 팟 캐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대혁명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튈르리 궁 습격 사건'을 꼽으면서 말하길, "...그 사건은 프랑스 민중이 스스로 공화국을 건설하기로 한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었죠....민중 스스로 왕정을 끝장내기로 하고 궁으로 쳐들어 간 겁니다...."
대혁명기의 확실한 분기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튈르리 궁의 습격 사건을 들어야 한다는건 분명해 보입니다. 대혁명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보면 확실히 이 사건 서술부터 작가들의 사관도 드러나기 시작하거든요. 이 튈르리 습격을 기점으로 혁명이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고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대충 어떤 부류들인지는 감이 오실 겁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구에게는 민주 공화국 건설의 확실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이지만, 누구에게는 혁명이 방향을 잃고 폭력 정치로 일변하는 어떤 기점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이래서 역사라는게 정말 재밌는 듯 합니다.
제가 보기에 튈르리 궁의 습격은 분명한 사인으로 보였습니다. 이제 테니스 코트에서의 그 선언을 - 그 인권선언 말입니다 - 그냥 종이에 적어두고 혁명가 너님들끼리 돌려보면서 뿌듯해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현해 보이라구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 스스로 그것을 실현해 보이겠다.
프레리알 봉기, 1795년 5월 20일 상퀼로트(노동자 출신 혁명가들) 최후의 투쟁을 묘사한 역사화
이 그림 딱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엎질어진 물 다시 담으라고 그러지?'
우선 이 상황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이 프레리알 봉기는 상 퀼로트들의 최후의 반란입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정파 내 사민주의자들(그러니까 그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쿠통같은 사람들...)을 처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방토즈 법 같은 소농민을 위한 토지개혁 법이나 소상인과 저소득층을 위한 여러 법안들을 폐기하고 곧바로 반동 정치를 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자본가들을 위한 정치를 시작한 셈인데 이에 반발한 상 퀼로트들이 그에 뜻을 같이한 국회의원 6명의 지도 아래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겁니다. 바로 지난 해에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로 상 퀼로트의 뜻을 그런대로 많이 반영했던 로베스피에르 일파가 일소되었거든요. 그런데 더 깨는 건 그 사민주의 자들을 없애는 쿠데타에 이들 상 퀼로트들이 상당히 가담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이 상 퀼로트 반란의 지도자인 국회의원 6명 중 구종과 롬 같은 의원들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핵심 의원들이었는데, 자기들 손으로 공포정치 한다고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목을 벨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물론 그들에게도 사연이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사상적으로 위험하다는 이유로 당내 극좌파인 에베르 파(훗날 공산당의 전형이 되는)를 숙청했고 - 이 때 상 퀼로트들의 지지를 많이 잃었죠. 역시 같은 이유로 당내 우파였던 당통 파(부르주아 자본가 혁명가들)도 처형한 바 있습니다. 그 전에는 중앙집권제에 반대하는 분리주의 파들이었던 지롱드 파도 숙청했고...여튼 이런 이유로 당내에 잔존했던 극좌파와 극우파가 서로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키는 희대의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테르미도르 9일의 반동이죠.(1794년 7월 27~28)
그런데 상술한 바 이런 원한으로 상 퀼로트들이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목을 베었다 한들, 이건 제 손으로 자기들 무덤을 파는 일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후 불어닥친 자본가들의 혹독한 반동정치에 절망한 그들은 눈물로 후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 이거 제가 비유법을 쓴게 아닙니다. 진짜로 이 사람들은 테르미도르의 그날 이후 후회와 절망 때문에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고 - 역사와 국가 앞에서 지은 죄 때문에 말입니다 - 본인들이 그렇게 절망에 차서 쓴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속죄하는 마음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고 증언한바 있습니다. 결과는...지도력 실패로 금방 진압되고 마는 것으로 종결되고 말죠.(이에 가담한 국회의원 세 명은 자살하고 나머지 셋은 단두대 행...) 이후에도 평등주의자들의 난(바뵈프)부터 수도 없이 반란과 쿠데타가 터집니다. 총재정부는 어떻게든 수습하면서 어찌어찌 정부를 이끌어가긴 합니다만 결국 브뤼메르 쿠데타(1799년 11월 9일)가 터지면서 미래의 황제 폐하께서.....
아마도 대혁명이 200년 하고도 수십년이 지난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들 중의 하나가 이런 아이러니, 혹은 정치가들의 권력욕이 아닌 순수한 민중의 의지로 혁명가 - 정치가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여과없이 볼 수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공포정치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를 주도한 로베스피에르나 쿠통은 인권 변호사 출신 법률가로, 흔히 권력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 경찰과 군대에 대한 지배권도 없고 사적인 정치 조직도 없이 - 오로지 자신의 논리에 의한 법안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민중을 설득하고 그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연설 하나로 이 기간 국정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 사람들 다들 초선 아니면 재선 의원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어떤 지역적 정치 기반이라는 것도 없었어요. 덕분에 공포정치의 핵심 인물들 중 하나인 생 쥐스트 같은 경우는 그 젊은 나이(25세) 덕에 무슨 운동권 투사같은 이미지만...사실은 이 분 검사 출신 국회의원인데요. 물론 초선...) 부언하자면, 이 시기 정치란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겁니다. 종래의 왕과 귀족이 주도하는 밀실 정치는 혁명으로 무너졌습니다.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힘의 근원은 국민이라며 스스로의 국회인 국민의회, 그리고 국민공회도 만들었죠. 이는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의 힘의 원천은 직접적으로는 파리 시민, 혹은 프랑스 국민 전체였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의회는 언제나 민중에게 열려있었습니다. 프랑스 인이라면 누구나(여성들도!) 들어가서 국회의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어떤 안건들을 논의하는지 보고 들을 수 있었죠. 그러다 그들은 혁명의 대의에 충실한 의원들에게 더 없이 열광을 하다가도 어느 의원이 민중의 대의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거나 혁명의 대의에 참여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보이면 야유를 퍼붓다가 어느 순간엔 진짜 자기네 집 부엌칼이라도 들고 들어가서 문제의 의원들을 직접 타도하기도 하고...(지롱드 파 의원들이 이렇게 타도됐죠) 그러니 공포정치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반혁명파를 없애고 온전한 민주국가를 구현하기 위한 민중의 의지를 반영한 것에 불과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이런 점이 더 무섭긴 합니다. 이른바 대중독재, 인민독재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준 것이라고나 할까...
이 그림이 이 대중독재, 인민독재가 어떤 것인지 정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왕의 행정부가 혁명으로 기능이 정지되면서 새로 선출된 혁명의회가 행정부 기능도 겸하게 되었죠. (현재의 의원 내각제 비슷한 것이긴 합니다만 국정의 최고 수반인 총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릅니다. 대신 의장이 있긴 한데, 그 역할도 국회의원들을 위한 회의 진행을 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선출된 사람들로, 자기들끼리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 민중을 위해 구상한 법안을 만들고 그것을 통과시킨 뒤 직접 집행에도 관여하는 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제출하는 법안이 정말 중요한데, 바로 이 법안들이 새로 건설하는 공화국의 밑그림을 만드는 발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정치 구조는 이 시기가 바로 혁명의 기간 - 그러니까 전통적인 신분제에 기초한 왕정을 부수고 모두가 평등한 시민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바로 그 과도기에 이뤄진 특수한 것이라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더 확실히 얘기해 볼까요? 머리 한쪽에 한번 조선 시대의 경국대전을 띄어보세요. 그리고 다른 한 쪽으로는 현재 대한민국 헌법을 띄어보시구요. 그리고 이 둘이 바뀌는 걸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 것도 한번에 말이죠. 그 과정이 어떨것 같습니까?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 같나요?
공포정치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미 모든 상황이 다 끝나고 그 주연들이 역사의 인물로 사라져버린, 수 백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전혀 답이 안나온다는 겁니다. 특히나 유럽에 비해 훨씬 더 전제정치가 발달한 여기 이 동아시아의 정치 시스템의 역사에 익숙한 저로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전제군주와 민주국가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요? 입헌군주제요? 여지껏 삼권을 다 장악하고 나라 다스려온 왕들에게 어디 한번 그 권력 다 내놓으라고 해 보시죠.(대한제국 때 고종황제가 독립신문 필자들을 어떻게 했던가...-_-;;) 그리고 문제는 전제왕정이나 신분제도라는 것도 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또 다른 민중이 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대혁명 때 모든 프랑스 인들이 민주 공화국 건설에 찬성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지방의 농민들은 여전히 왕에 대한 충성심 혹은 신분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게다가 이들은 국가 건설에 대한 논의가 격해지자 아예 중앙정부에서 독립하여 따로 자치지역을 구상할 계획도 세웠죠. 그들 말로는 스위스나 미국과 같은 연방제를 구성한다는 얘기였지만 위대한 프랑스는 하나여야 한다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상하는 혁명가들에게는 씨알도 안먹히는 얘기였죠. 게다가 이들이 지방이나 해외의 망명귀족들과 연계해서 입헌군주제를 구성하려는 움직임까지 포착되자 공화정을 지향하는 혁명가들에게는 이들은 곧 반역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대혁명의 영향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 왕정들이 대불군사동맹까지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혁명전쟁이 시작되고....그러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공포정치는 바로 이런 더 없이 현실적인 상황에서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한 발 밀리면 반역자가 되어 모두 죽게되는 그런 상황말입니다. 반란이 성공하고 세상을 제대로, 그것도 확실히 바꿔 놓아야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이지 사실 지금 이들이 처한 상황은 혁명이 완수된 것이 아니었죠. 나라 전체가 혁명파와 반혁명파로 나뉘어 내란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우외환이라고 밖으로는 유럽 동맹국들과 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안으로는 내전이 밖으로는 혁명전쟁이...그러니 경국대전을 대한민국헌법으로 바꾸는 그 과정에 그에 반대하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그들 편을 드는 왕당파 민중들까지 함께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민중이 생각이 다른 민중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죠.
1870 Max Adamo Der Sturz des Robespierre anagoria
테르미도르 9일의 국민공회 상황을 묘사한 역사화,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을 반대파들이 독재자라고 외치며 의정연설을 방해하고 있다.
이 학살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에 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랄까...저로서는 뭐 한국의 역사도 아니고 남의 나라 역사인데요. 그래서 이 문제는 그냥 유보해 두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이들 역사에서 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조선시대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염원이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과정이 아름답고 평화롭게는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분제 국가에서 만인평등을 외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에 반역죄로 사지가 찢어지는 능지처참을 당해 저자거리에 걸리는 형벌에 처해질 겁니다. 전통사회의 신분제는 이런 가혹한 형벌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거 다들 아실테니...그리고 그 기간도 정말 엄청 깁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헤아려 보면 못해도 수 천년은 될걸요? 그러니 이런 세상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문제는 이것을 한번에 엎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천천히 개혁을 통해서 할 것인가 인데...피치자 입장인 저로서는 만일 기회가 온다면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을것 같습니다. 내게는 한번뿐인 인생인데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후손들에게 온통 억압적이기만한 세상인데, 이걸 단번에 엎을 기회가 내 앞에 주어진다면 이걸 내가 그냥 놓치고 보낼 수 있을까? 하는거죠.
테르미도르 9일의 국민공회 소요사태를 그린 다른 그림. 이 쿠데타는 연단에 오른 생 쥐스트의 연설을 반대파들이 방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생 쥐스트가 자신의 연설에 갑자기 방해를 받자, 어쩌지 못하는 순간에 테르미도르 파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사방 연단에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반대파들에 둘러싸인 로베스피에르 주위로 독재자를 타도하자! 라고 외치는 고함소리가 사방을 울리는 사이에 그의 연설을 중단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테르미도르 이야기.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의 이름들 중 하나입니다. 번역하면 '열월'이라고 하던데 발음 자체는 참 예쁘지만 한국식으로 하면 10.26사태나 12.12 사태 같은거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여튼 일은 이렇게 진행이 됐습니다. 거듭된 공포정치로 혁명정부 그 자체는 상당한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대외 전쟁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고 전쟁 때문에 동원되는 국가총동원체제와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로 나라 전체가 어느 정도 안정되는 듯한 분위기가 보였죠. 그런데 바로 그 때 위기가 찾아왔던 겁니다. 대외의 불안정한 위험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혁명가들이 서로 품고 있던 열정과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공과를 분명히 처리해야 하는 지방 반란의 책임도 있었죠. - 특히 방데와 리옹에서 벌어진 반혁명파에 대한 학살은 워낙 규모가 대단해서 누군가는 꼭 책임을 져야할 상황이었습니다. (방데 반란에 가담한 농민이 얼추 30만이 넘는다는데, 그 중에서 살아서 도망친 생존자들이 4천~5천에 불과했다니 정말 그 참상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지경...) 그곳 방데와 리옹 학살에 책임이 있는 열혈 혁명가들도 로베스피에르의 추궁이 두려워 서로 뭉치기 시직했습니다. 여기에 처형된 극좌파 에베르의 잔당과 역시 처형된 당통의 부르주아 잔당 의원들까지 가세하면서 물밑에서 동맹이 형성되기 시작했죠.
갑자기 상상이 되는군요. 국회에서 다투던 의원들이 말로만 싸우는게 아니라, 정말 칼들고 서로를 위협하면서 반대파들을 끝장내는 상황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간 나라 꼴이...
하지만 200여년 전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테르미도르파 국회의원들은 거의 몸싸움을 하다시피 의회장에서 난동을 부렸고 자신들이 노리던 의원들의 의정 연설을 방해한 끝에 그들이 갑작스런 공격에 넋이 나가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틈을 타 그들의 체포 동의안도 그 현장에서 가결시켰습니다. 죄목은 민주정을 해치고 독재를 행한다는 것이었죠. 독재자! 독재자! 독재자를 타도하자! 사방에서 천둥처럼 비난이 쏟아지자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위험을 전혀 예상 못했던 것일까요?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비난하는 연설을 앞서서 하긴 했습니다만 그로서는 이 연설이 적대감이 있는 동료들에게 불을 지를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했던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건 그 나름대로의 화해 연설이었던가요? 죄우당간 어찌됐든 이미 언급했듯이 자신들을 위한 군대나 경찰조직, 아니 그 어떤 사조직도 없었던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은 국민공회 의원들의 지지를 잃는 순간 꼼짝 못하고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테르미도르 파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생 오귀스탱, 생 쥐스트 그리고 쿠통까지 위협하여 튈르리 궁의 한 방에 몰아넣었습니다. (이 때 어떻게 위협을 했냐면...그러니까 이들은 군대나 경찰이 없잖습니까...모두 국회의원들이거든요. 헌병대에 연락해서 이들을 잡아가라고 할 때까지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을 잡아두어야 했는데, 각자 준비해온 칼을 꺼내서 정적들 목에 대고 위협했....)물론 이렇게 적들을 인신 구속했다고 원하는 대로 상황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파가 점거한 파리 시청을 공격하는 바라스(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의 애인...)와 부르동의 군대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죄수로 전락한 이들 국회의원들을 감옥에서 수감하기를 거부한 상황이 벌어졌던 겁니다. 사실 로베스피에르만 군대나 경찰 지배권이 없었던게 아니라 이런 사정은 다른 위원들도 마찬가지였죠. 반대파들 역시 모두 경찰권이나 군대나 여튼 어디를 사적으로 장악한 사람들은 없었으니 이런 비상 사태에 다들 우왕좌왕 할 수 밖에요. 이런 혼란 상황을 틈타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는 탈출에 성공하고 그들의 지지자인 파리 시장이 있는 시청 청사로 피신했습니다. 역시 로베스피에르의 지지자인 수비대장 앙리오가 시청 밖에 대포와 포대를 설치하고 방어에 나섰죠. 하지만 새벽 1시가 넘어가는 경에 테르미도르 파인 부르동과 바라스가 이끄는 일단의 헌병대가 파리 시청을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예상되는 그림이라면 여기서 본격적인 시가전이 벌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파리의 상 퀼로트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겐 그만한 사정이 있었죠. 로베스피에르는 일전에 극좌 에베르 파를 숙청했단 말이죠. 상 퀼로트의 깃발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제 손으로 없앴는데 이제 와서 무슨 명목으로 구원을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요? 새벽 1시 경. 절망에 빠져 망설이는 그에게 동료 의원 쿠통이 말합니다. " 군대에 편지를 써야 합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 물론 국민공회의 이름이죠. 국민공회란 우리가 아닙니까? 나머지들은 폭도에 불과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던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내 생각으로는 그 대신 프랑스 민중이라 해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새벽 2시 레오나르 부르동이 이끄는 종대가 파리 시청으로 난입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영리하게도 자신의 지역구에 배치되어 있던 헌병대를 끌고 왔습니다. (대체 로베스피에르 의원의 지역구가 어디길래...아, 지방 아라스구나...-_-;; 아라스에서 파리까지 오려면...) 그런데 놀랍게도 앙리오가 데려왔던 수비대원들은 부르동의 헌병대가 도착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로베스피에르의 그 공포정치의 동력이 대체 어디였는지 진심 궁금해질 지경...
헌병대가 파리 시청으로 들이닥치는 순간 모든게 끝났습니다. 군대에 보낼 선언문에 서명하던 생 쥐스트는 별 저항도 못해보고 체포됐고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은 자살하려고 창 밖으로 몸을 던졌으나 다리만 부러진채 붙잡히고 말았죠. 다리가 불편했던 쿠통은 계단에 내동댕이쳐진채 구르다가 헌병대에 붙잡혔고 르바는 권총자살로 즉사...로베스피에르는...동료 르바가 죽을 때 같이 죽으려고 총을 쏘았지만 부상만 입은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턱에 부상을 입은 로베스피에르가 붕대를 감은채 탁자에 누워있다. 그와 함께 사로잡힌 동료들은 그 다음날 바로 재판없이 처형될 것이라고 선고를 받았다.
이런걸 사법살인이라고 하는 거겠죠? 재판없이 동료 의원들을 다 죽이겠다니...그동안 쌓인 원한이 대체 얼만큼일지 도대체 감이 안오는군요. 아니면 이건 두려움?
로베스피에르는 이 상태로 꼼짝없이 15시간을 누워있었습니다. 턱에 부상을 입을 터라 붕대를 감은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죠. 그러니 그가 남긴 유언은 없습니다. 아니, 이 사단이 나기 전 국민공회에서 한 마지막 연설이 그의 유언이 될까요? 아니면 쿠통과 나눈 마지막 대화, 프랑스 민중의 이름으로 요청하노니 부디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군대에 요청하는 서한?
하지만 이 때 그의 동료 생 쥐스트는 인상적인 한 마디를 남깁니다. 그는 시청사 벽에 걸린 '인권선언'을 가리켰습니다. 바로 혁명정부의 이상이 담긴 꿈같은 법전이었죠. "....그래도 우린, 뭔가 해냈어요!..." 생 쥐스트는 이 때 불과 스물 여섯이었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랬던 것인지 다른 혁명가들이 모두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자 거의 자살을 시도한 반면에 그는 전혀 그런 시도 없이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스로 생을 포기하기에는 사실 너무 젊은 나이긴 합니다만....
콩시에주리 감옥에서 형장으로 이송되는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
이들이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전설같은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오는군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 "잘 가라, 최고가격!" 이라고 외쳤다네요.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 기간 통제경제를 강력하게 실시했는데, 이는 소임금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는 했습니다만 반면 소상인들은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죠. 그래서 이후 정권을 장악한 반동정부는 곧바로 통제정책을 해제했습니다만 경제 문제는 더 헬게이트가 열렸다는...결국 이 문제가 테르미도르파의 발목을 잡습니다. 누군가는 이 정책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는데 생전의 로베스피에르의 동료였던 테르미도르 반동파들이 그 타겟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살기 위해 로베스피에르를 배신했지만 - 공포정치를 다 같이 해놓은 마당에 누구한테 그걸 뒤집어 씌운다고 자기들은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건지... - 그들 역시 공포정치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은 다른 동료들에 의해 모조리 숙청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들의 마지막을 보면 진짜 그런 비극이 없습니다. 처형, 자살, 유배, 망명, 추방....한마디로 테르미도르 파는 실패한 - 성공한 쿠데타 세력이었던 겁니다. 진짜 정치 게임이라는 건 복마전이네요.
단두대에 오르는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
테르미도르 10일 오후 내내 22명이 처형됐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맨 마지막으로 목이 잘렸는데,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자기 동료들이 죽는 모습을 다 지켜봐야했습니다. - 대체 그런 심정은 어떤 것일지....전혀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 동생 오귀스탱, 생 쥐스트, 쿠통...특히 동생은 형의 체포 동의안이 가결되자 자신도 함께하겠다고 사지로 들어왔죠. 동생은 그렇다 하더라도 생 쥐스트는 죽기 전까지 로베스피에르에게 어떤 심정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는 전부터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잔당파의 숙청이 더 필요하다고 로베스피에르에게 끊임없이 제기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로베스피에르는 잔당파의 숙청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기 싫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제는 왠만하면 타협하면서 가야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어쨌든 본인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정말 우려한 그대로 터지고 말았는데, 이를 예견하고 있었던 생 쥐스트의 심정은 대체 어땠을지...앞으로도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 그림에서 보니 그런 상념은 다 잊은 듯 하네요. 부상 입고 아무 말도 못하는 동료에게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신념으로 함께 일하다가 그 인연이 무덤까지 이어지는군요.
국민공회(프랑스 제 1공화국 1792년 9월 21일), 프랑수아 레옹 시카드, 1913년작, 파리 팡테옹 소장
국민공회의 제헌의원들이 - 그러니까 혁명가들 말입니다 - 마리안(의인화된 프랑스)에게 고대 로마식 경례를 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로서 국가에 대한 영원한 충성서약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신생 공화국은 로마 공화정을 지향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고...저 뒤에 한 무리의 군인들은 '라 마르세이에즈'를 부른 라인의 부대겠죠. 그런데 저 시간대에 저기 계시면 안되는 분이 자꾸 겹치는 건...제 착각이겠죠.
영화 <프랑스 대혁명>의 주인공들입니다. 맨 위부터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장 폴 마라, 카미유 데물렝, 조르쥬 당통, 루이 앙투안 생 쥐스트
2016.10.16 23:41
2016.10.18 01:28
그런데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그런 세상 법칙이 다 뒤집혔....
2016.10.17 05:30
2016.10.18 01:37
요즘 혁명사에 빠져 있어서 이것저것 자료들을 보고 있는데, 주경철 선생 말마따나 참 매력적인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 중에서 민주주의, 혹은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대혁명을 떠올리게 되죠. 이른바 원조라는 ㅎㅎ
2016.10.18 06:43
올랭프 드 구즈에게는 위의 인물들이야말로 반동적인 독재자들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네요.
2016.10.18 08:05
올랭프 드 구즈는 왕정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영국식 입헌군주파였죠. 왕정 지지자가 공화파 보고 반동적이라고 생각할리는 없고…오히려 공화파들 눈에야 구즈가 반동적 세력이죠 ㅎㅎ 페미니스트들도 스펙스럼이 다양하답니다. 200년전에 첫 출연한 여성해방론자가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구체제 옹호자라는게 좀 개인적으로 섭하긴 합니다만…
2016.10.18 08:42
2016.10.18 09:04
구즈가 공화주의자로 전향했다군요? 그건 아닙니다. 구즈는 끝까지 입헌군주파였습니다. 구즈는 아버지가 귀족입니다. 어머니는 아니지만...그녀는 이를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이런 성향이 감히 그 시절 남자들과 공적인 정치논쟁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주었죠. 확실히 아이러니하긴 한데, 그 시절이 신분제 사회라는 걸 잊으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구즈가 로베스피에르의 공화파와 맞선겁니다. 구즈의 공포정치 비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지요. 제가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님 말씀대로 민중, 흑인노예해방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그토록 외친 구즈가 왜 하필 그 해방정책을 가장 앞서서 시행했던 로베스피에르파에 맞선 것인지...자기 말대로 대혁명 기간에 여성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로베스피에르 일파에게 가장 협력해야 했거든요. 그가 만든 대혁명 기간의 민법 조항이 그래도 당시 여성에게는 가장 해방적인 정책이었죠. '5인이상 여성집회 금지조항'같은 어처구니없는 여성억압 정책도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 때 혁명가들 중 로베스피에르가 만든 민법 조항이 여성들에게 가장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즈는 여성해방과 민중해방을 외치면서도 그나마 자신에게 가장 정치지향적으로 가까운 사민주의자 로베스피에르 일파에게는 공포정치를 한다고 맹공을 퍼부었죠. 이게 정말 안타까워요. 사실 구즈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으로 보였겠지만...
2016.10.18 09:35
도대체 인권선언문과 혁명정부의 어디에 여성해방의 요소가 있었다는거죠? 인권선언문을 보완한 여성권선언문을 발표하자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단죄한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왜 협력하지 않았냐고 지금 묻는건가요?
2016.10.18 09:44
인권선언에 기초한 혁명정부의 민법조항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그 시절 로베스피에르가 입법한 민법조항이 여성에게 가장 우호적이었다는 겁니다. 이혼과 상속 그리고 자녀양육에 관한 법령 말입니다. 물론 구즈는 공적인 법률 조항에서도 여성에게 평등하게 되길 원했지만 그건 이뤄지지 않았죠. 그래서 구즈가 인권선언 미러링을 한 것이구요. 미러링 원조 구즈 ㅎㅎ
2016.10.18 09:48
그리고 구즈가 사형을 당하게 된 건 인권선언 미러링 해서 그런게 아닙니다. 미러링은 인권선언 발표 당시에 한 것이고 한 것이고(1791년) 그 이후 공포정치가 강화될 때 로베스피에르를 강도높게 비난하는 벽보를 붙이면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했기 때문이죠.(1793년) 일단 사실 관계는 명확하게 구분합시다. 제가 보기에도 인권선언 미러링은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농담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구즈가 쓴 로베스피에를 비난하는 선전벽보를 보고 있는데 확실히 쎄긴 하네요. 공포정치를 종교재판에, 로베스피에르를 이단심문관으로 비유하면서 비판하고 있어요. 화끈하네요. 이때가 전시만 아니었어도 이 정도 비판은 당연히 할 수 있는건데 말이죠.
2016.10.18 10:02
여성권선언문이 단죄당한 것과 집회금지법위반으로 사형당한 것 모두 독립된 사실이며 혼동한적 없습니다.
2016.10.18 13:08
여성인권선언문이 법적으로 단죄당한적은 없는데요. 지금 1793년 혁명 재판소에 고발된 구즈의 기소장 보고 있는데, 그가 예전에 쓴 여성인권선언에 대한 고발내용은 없습니다. 로베스피에르 개인에 대한 공격과 공포정치에 대한 선동적 비판이- 종교재판소의 이단심문관 같다고 - 검사의 공소 내용의 전부입니다. 전에도 님같이 착각하는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근친상간으로 사형선고 받았다고 인터넷에서 헛소리 하고 다니는 바람에 참 짜증났었는데…여튼 페미니스트가 받은 부당한 학대에 그토록 분노하는 마음에는 공감합니다만 사실관계는 명확히 합시다.
2016.10.18 09:09
그리고 프랑스의 여성참정권이 2차 대전 이후에 실현된 건 혁명정부가 아니라 나폴레옹 제정기의 영향이 큽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대혁명이 끝난 이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혁명 기간 내내 진행된 페미니스트들의 여성해방운동에 불만이 컸고 특히나 지난 이집트 원정 기간에 접하게 된 이슬람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토로한 적도 있죠. " 여자들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무슬림들이 옳았다. 우리는 여자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었다. " 좀 거칠게 얘기하면 이후 루이 14세 시절보다 더 후퇴한 나폴레옹 민법전의 후진적 조항들은 어느 정도는 유럽에 끼친 이슬람의 영향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 하면 인종 차별한다고 할까봐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ㅎㅎ
2016.10.18 09:39
하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건 로마탓이라고 합시다.
2016.10.18 09:41
일견 부분 맞습니다.ㅎㅎ 괜히 나폴레옹 제정기 내내 로마제국식 신고전주를 정치선전으로 채택했을까요.
2016.10.18 10:10
그렇죠. 박정희야 배운게 메이지 유신인데 자기 잘못이 아니죠.
2016.10.18 13:15
그게 그렇게 결론이 납니까? 원래 잘못된 인간이 잘못된거 보고 더 배우는 겁니다. 그렇게나 페미니스트 혁명가의 비참한 죽음에 억울해하시는 분이 무슬림 전통문화가 제국주의 시절에 서양에 역수입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못가시나 봅니다 ㅎ
2016.10.18 09:21
1792년 국민공회 전당대회에서 지롱드파를 물리치고 로베스피에르가 승리하자 구즈는 이런 서한을 보냅니다.
...로베스피에르, 난 그대를 측은히 여기고 그대를 혐오한다. 우리의 영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라. 내 영혼은 진정으로 공화주의자의 것이요, 그대의 영혼은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다. 내가 군주제를 택한 것처럼 보였던 것은 이 통치 형태가 프랑스 정신에 더 적합하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미라보처럼 내가 입헌군주제를 고수하려고 했던 건 모두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산악파의 공화정에 반대하고 자신이 입헌군주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영혼이 공화주의자라는 은유법을 잘못 이해하신듯. 구즈는 공화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포정치가 불가피하게 펼쳐질 것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한다고 강하게 로베스피에를 비판하고 있죠.
2016.10.18 09:40
1793년에 선 혁명법정에서는 자신이 공화주의자의 영혼을 가졌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향한 것이라...지금 구즈의 마지막 진술서를 보고 있는데 진짜 안타깝네요. 구즈가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하는 건 구구절절 옳습니다. 다만 지금은 프랑스가 내전 상황이고 혁명도 진행중이고 전 유럽의 전제왕정들과 전쟁 중이라....그녀의 주장이 다 반역행위가 된 것이 안타깝군요.
2016.10.18 10:59
혁명을 지지했고 지롱드당의 일원이었으며 체포 당시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벽보를 붙이고 있었음에도 공화주의자 칭호조차 얻을수 없네요.
2016.10.18 12:54
2016.10.18 16:37
페이양파: 우파, 입헌군주제 주장
브리소파, 지롱드파: 좌파, 온건 공화정 주장
이건 고등학교때 배우는거 아닌가요?
2016.10.18 12:56
일단 입헌군주제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신 듯 ㅎ 혁명 초기에 지지세력이 많았던건 혁명에 참여했던 부르주아 자본가와 귀족들이 입헌군주제를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입헌군주제도 국민투표를 합니다. 당시 영국이 그런 제도였죠. 물론 세금 납부에 따라 선거권 여하가 달라지긴 합니다만. 그런데 공화파들 입장에서는 영국식 입헌군주란, 부르주아가 결국 귀족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고 그만 혁명을 끝내자는 얘기였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죠.
2016.10.18 13:47
2016.10.18 14:13
그건 나중에 입장 노선을 바꾼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난 파리 민중이 튈르리 궁을 습격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감옥을 습격해서 옥에 갇혀있던 귀족과 성직자들 1200명을 살상했어요. 9월 학살이라고 하죠. 공화국 결의는 이런 민중의 분노에 역풍 맞을까봐 두려워서 채택한 겁니다. 솔직히 지롱드 당 입장에서는 말이죠. 이게 바로 민중독재의 민낯이죠…파리 민중 입장에서는 국왕 일가가 망명을 시도했다가 바렌느에서 잡혀온 이래로 국민의회가 이를 조용히 넘기고 있는것에 무척이나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런 끔찍한 살상이 벌어진 것이죠.
공화국 결의 이후 국민의회가 국민공회로 바뀐 이후에 정파투쟁이 격화되면서 그들은 비밀리에 기존의 입헌군주제를 토대로 한 지방분권제를 추진했고 이에 분노한 상 퀼로트들이 무장 봉기해서 이들을 의회현장에서 체포하여 모두 길로틴으로 보내버리죠. 이 당시 분위기는 본문에 제가 수록한 프리레알 봉기와 비슷합니다. 왕당파 죄수의 목을 베어 피가 뚝뚝 흐르는 목을 창에 꿰어 들고 협박하는거죠. 이래도 입헌군주제 할래? 네 입으로 지껄인 인권선언 안지킬거야?
지롱드의 지도자 브리소가 국왕처형에 동의했다는걸 생각해 보면 이는 명백한 배신행위였기 때문에 당시 파리 민중의 지롱드 당에 대한 분노는 상당했죠. 체포를 피해 도망친 지롱드 파들이 자살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2016.10.18 14:54
2016.10.18 15:05
9월 학살은 성난 민중이 저지른 우발적 사건 맞습니다. 파리코뮌은 이를 사후 추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파리 코뮌의 핵심 위원이었던 당통이나 마라같은 사람들이 민중을 부추기고 선동한건 사실입니다만 그들이 무슨 경찰이나 군대같은 기구도 없는 상황에서 파리코뮌이 무슨 대단한 권력 기구라고 민중에게 학살 명령을 내릴까요. (위키에 보니 그렇게 나오는데 수정이 좀 필요할 듯) 이후 수립된 인민공회에서도 민중의 분노가 두려워 이 학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따지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이 학살 사건은 후세의 역사논쟁에서 주요쟁점으로 떠 오르죠. 그런데 국왕 일가가 도망치다가 바렌느에서 잡혀왔어요. 그들이 프랑스와 전쟁중인 적국으로 도망가서 과연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외국에서 민중을 학살할 군대를 끌어오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론을 토대로 국왕 부부에 대한 사형판결도 결정되었던 것이죠.
로베스피에르는 원래 사형폐지론자 맞습니다. 그에 대한 훌륭한 연설문도 있어요. 괜히 인권변호사 출신이라고 하겠습니까 ㅎㅎ 정치적 상황이 그를 그렇게 몬 것이죠. 그 말고도 역시 공포정치를 행한 동료 쿠통도 인권변호사 출신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상대가 전제왕권인데요.
한국사를 한번 대입해 볼까요? 구한말 동학농민군 진압하려고 조선 정부가 어떻게 했던가요? 청나라 끌어들여 일본 끌어들여…영국제 자동소총 든 일본군에게 죽창 든 농민군이 뭐 상대가 되겠습니까…그때 희생된 삼남지방 농민군 숫자만 얼추 20만이 넘습니다. 최근의 일본학자들 연구 발표를 보니 그새 숫자가 더 늘어났더군요. 새로 더 자료들이 나왔나…농민군 희생자 수가 30만에서 40만까지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요…한 세기의 시차가 있긴 합니다만, 동학농민전쟁을 생각해 보면 당시 프랑스 혁명정부의 입장이나 프랑스 민중의 심정이 좀 이해되실 듯. 시민혁명 앞에는 바로 이런 현실이 놓여있는 것이죠.
2016.10.18 15:36
점점... 9월 학살조차 혁명정부 책임이 아니라니 방데학살은 물어보나마나겠네요.
혁명정부에 학살책임 없다는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이긴 합니다.
2016.10.18 15:43
본문 안보셨나요? 방데 학살 얘기도 했는데요. 그리고 왜 학살이 혁명정부 책임이 아닙니까. 파리 코뮌이 바로 혁명정부의 일부인데요. 학살에 책임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학살이 불가피하다는 얘깁니다. 혁명정부와 민중의 입장에서는요. 그리고 무슨 혁명파들이 순진한 민중 충동해서 학살을 행한게 아니라 민중이 학살을 원하고 혁명파들이 그 의지에 동조하여 학살을 감행한 겁니다. 방데 학살이 아직까지도 프랑스 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혁명파 민중이 왕당파 민중을, 같은 프랑스 인들끼리 마구 죽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왕조를 없애고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그럼 왕당파들 학살없이 가능한 얘깁니까? 물론 그 규모가 문제가 되긴 하겠습니다만, 일단 본문부터 다시 읽고 오세요. 방데 학살과 연관해서 그 얘기 계속 했으니까요.
2016.10.18 16:21
당통이 선동하고 감시위원회 통해서 학살명단 인원만 선별적으로 처형했던걸 어쩔수없이 동조하고 추후승인했다고 표현하는건 너무했다고는 생각안하시나요?
우리 공화국 역사에서도 자유민주주의수호와 조국근대화라는 시대적 사명 앞에 불가피했던 희생들이 항상 있어왔죠.
삼두정치의 인물들을 권력이라곤 없는 백면서생 인권변호사로 묘사하는건 황당하다못해 신선한 해석이네요.
2016.10.18 16:33
사실 당통도 뒤에서 그렇게 학살 충동질하고 다녔지만 가장 앞장 서서 나선건 마라입니다. 그래서 코르데에게 암살당한 것이고. 그런데 이건 좀 해석을 잘 하셔야죠.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나 대혁명기의 혁명가들은 군대나 경찰권이 없었고 사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공포정치 때 맹위를 떨칠 수 있던건 바로 그 청렴한 인권변호사의 인성과 민중독재의 의지가 시너지를 빚어서 일어난 일인겁니다. 신선한 발상이 아니라 이는 오늘날 대혁명 연구가들이 모두 동의하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시무시한 학살을 통한 민주주의의 구원이기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죠.
2016.10.18 16:43
시민혁명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거 그렇게 좋기만한거 아닙니다. 혁명이란 바로 아우라를 없애는 겁니다. 신비감 같은거요. 별것도 아닌 사람한테 반인반신이니 어쩌구 하면서 신비화하고 권력자들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지 않습니까? 바로 혁명이란 그런 쓸데없는 아우라를 없애는 것이죠. 바로 폭력으로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사람을 엄청 많이 죽이게 되니까 그게 그렇게 마냥 좋기만한건 아니죠. (이상은 주명철 선생 의견)
그리고 당통은 제외합니다. 이 양반은 공포정치기에 활약한 것도 아니고 부정부패가 넘 심했어요. 개인재산 축적도 상당했고… 그런데 공포정치 삼두체제는 청렴한 인권변호사들 맞습니다. 그 사람들 진짜 자기 개인 재산도 없고 특히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는 일생 연애도 안하고 결혼도 안하고 정치에만 매달린 사람들이죠. 그래서 독신 사이코들이라고 지금의 프랑스 사람들이 꽤 조롱하기도 합니다. ㅎㅎ (사실 영화나 드라마같은 대중매체에서는 거의 이렇게 묘사되죠)
그런데 한 편으로는 그런 백면서생들이니까 그토록 대규모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자기가 옳다는 신념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이고. 특히 수정주의 역사학자들. 이 사람들은 이 폭력성 때문에 대혁명 자체를 부정합니다. 프랑스 역사상에 있어서는 안되었다는 일이라고 평가할 정도 ㅎㅎ
2016.10.18 17:09
청렴하고 사심없는 초인이 민중의 의지에 부응해 혁명을 수행한다라...
어째 점점 그 반인반신 얘기에 오히려 가까워지는걸까요?
역사공부란게 이런걸 느끼라고 하는걸텐데... 씁쓸하네요.
2016.10.18 17:17
그 결과 보세요…시체가 산더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죠. 그런데 냉정하게 따져보면 청동기 초기 국가가 건설될 때도 그랬어요. 평등한 석기사회 시스템을 부수고 종래 야생동물에게 하던 가축사육 방식을 같은 인간에게 행해서 노예제를 만들었죠. 그리고 그에 기초해서 수천년 지탱할 인간들간의 수탈 시스템, 바로 신분제를 만들었죠. 종교 이데올로기와 가혹한 형벌제도를 통해 이를 이론적으로 물리적으로 지탱해 왔구요. 이런 구체제를 단번에 박살내고 인민주권을 실현하는데, 손에 피를 안묻힐 수가 있을까요? 어찌 보면 논리적으로 너무 당연한 결과입니다. 끔찍하긴 하지만.
2016.10.18 17:38
암요. 우리도 자유민주주의수호와 조국근대화를 위해서 그래왔었죠.
2016.10.18 18:31
여전히 제 말을 이해도 못하고 있군요. 아니면 알아들었어도 못들어먹은체 하거나. 대혁명때 공포정치를 단행한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체입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는 현재 프랑스 공화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이고 이들의 정치강령은 현재 유럽 사민주의의 전신이에요. 그리고 이들이 200년전에 전제왕정과 싸우던 사람들이란거 잊으셨나요? 어디다 갖다댈걸 갖다대야지…왕정폐지를 위한 폭력하고 권력을 잡아 왕노릇 하려는 독재자의 폭력행위도 구분 못합니까?
2016.10.18 18:40
그런데 사실 한편으로는 님같은 사람들도 이해가 되는게, 역사라는건 맥락을 이해한다는게 중요하거든요. 사실 오늘날의 프랑스의 정교분리정책이나 유럽인들이 거의 무신론자가 되버린건 지난 수 백년간의 종교분쟁과 이단심문 그리고 마녀사냥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이해가 안되는 것처럼 대혁명의 공포정치도 역사상 같은 맥락을 지녔죠. 이전의 독일 농민전쟁이나 러시아의 푸가초프의 난을 진압할 당시 벌어졌던, 혹은 그 전의 프랑스 땅에서 숱하게 벌어졌던 종교전쟁으로 인한 학살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사실 님같은 생각이 들기도 할겁니다. 나도 예전엔 그랬어요. 그래서 대혁명이나 공포정치를 비난했었죠.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역사적 맥락상 지배계층은 엄청난 학살과 폭력으로 피지배계층을 억압했죠. 여기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만 생각할것 없이 우리 역사의 동학농민이나 기타 다른 농민반란이 어떻게 진입됐나 한번 생각해봐도 답이 나올겁니다. 이게 대화와 토론으로 될것 같습니까? 200년전인데요ㅎㅎ 사지가 찢어져서 저자거리에나 안걸리면 다행이지 ㅎㅎ (그런데 실제로 동학농민군들 진압땐 그렇게 했더군요. 일본군측 기록을 보니까 조선의 관군이 포로로 잡은 농민군들 사지를 찢거나 작두로 목을 쓸거나 산채로 화형에 처하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더군요. 아주 환상의 콤비들입니다. 일본군은 옆에서 기관총으로 학살하고.)
2016.10.18 19:35
그러니까 혁명정부가 현재 프랑스 공화정의 모체이지만 여성인권이 낙후했던건 이슬람 문화 유입때문이고 방데학살에 대해 아직도 일언반구없는건 다 지난 일이어서지요. 참 편리하네요. 그리고 제발 종교전쟁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라는 환상을 이젠 좀 버리시길... 공화정부가 종교탄압하고 정교분리정책 채택한건 가톨릭 교권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빼앗기위한 정치적 수단이었을뿐이잖아요.
(그 불가피한 희생이라던 방데학살땐 혁명군인들이 아기를 던져 총검으로 주고받고 여성을 와인착즙기에 넣어 살해하기도 했답니다. 왕당파와 공화파를 가리지도 않고 공평하게 학살했다죠?.)
이승만정권은 대한민국의 모체이고 한국전쟁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심대한 위협이고 그때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과 서북청년단의 학살은 불가피한 희생이란건 왜 안됩니까? 공산주의자완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단건 누군가의 기본 레파토리였던거 같은데...
2016.10.18 21:03
방데 학살에 대해 유감만 표시하고 별반 얘기가 없는건 방데 학살의 책임자들이 모두 처형됐기 때문입니다. 학살에 가장 책임이 큰 공포정치가 세명 - 로베스피에르와 쿠통 그리고 생 쥐스트가 모두 처형됐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을 처형한 테르미도르파 역시 이후 방데 학살의 책임을 지고 처형, 유배, 추방형을 당해 모두 몰락했습니다. 이건 내가 본문에서 얘기했는데요. 아직도 본문을 제대로 읽지 않았군요. 이들 죄목은 공포정치로 독재정을 행한 죄인데, 방데와 리용에서 저지른 과도한 학살 행위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물었죠. 그런데 이건 과도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을 뿐이지, 방데 반란에 대한 진압자체를 처벌하거나 반성하는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방데 반란 농민들은 명백히 왕당파들이었고 이들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이 지역의 분리 독립과 함께 다른 지역까지 와해되서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질 판이었어요. 그런 연유로 지금까지도 방데 반란에 대한 제대로된 정부 차원의 사과가 없는겁니다. 이게 절대로 옳은건 아닌데, 나라를 쪼개서 분리독립 시키려는 자들에 대한 오늘날 프랑스 정부의 태도를 볼 수 있죠.
2016.10.18 21:15
님이야말로 환상 버리시길…혁명정부야 당연히 국정 장악을 위해 교권을 공격해야 했죠. 교회가 거의 왕당파 소굴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프랑스 민중과 오늘날 유럽인 거의는 종교전쟁과 이단심문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교회와 멀어진건 맞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근세 유럽의 종교내란과 마녀사냥 희생자들 보고 그런 말은 못할텐데ㅎㅎ
그리고 여전히 남 말 왜곡하는건 쩌는군요.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자들 축첩제로 여럿 거느리고 집에다만 가둬놓고 살게 하는거 보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당시 유럽 남성들 엄청 부러워했습니다. 그에 대해 자기들도 여자들 가둬놓고 하렘 만들고 싶다고 대화 나누는 자료들도 많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이게 왜 이슬람 탓입니까? 걔네들 그러고 사는거 보고 부러워 하는 프랑스 남자들 탓이지. 이런 유치한 말꼬리 잡아서 왜곡질 하는건 그만 두세요. 이제 슬슬 님 밑바닥이 보이는군요.
2016.10.18 21:21
그래서 님같이 쓸데없이 왜곡하는 사람들 때문에 주경철 선생이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하더군요. 혁명 혁명 하면 뭐 되게 좋은 줄 알고 자기들 군사 정변을 자꾸 혁명이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혁명하면 러시아 혁명을 생각하겠어요, 아니면 중국의 문혁을 생각하겠어요? 다들 프랑스 같은 선진국의 혁명이라니까 그게 마냥 좋은 줄 알고 아무거나 다 갖다가 혁명이라고 하죠. 바로 지금 님처럼 말입니다.
시민혁명의 폭력성이란 건 바로 님이 자꾸 갖다 들이대는 그런 극우파나 왕당파 압제자들에 대한 선제공격이었어요. 여기에 대해 얘기해야지, 어디 극우파 독재정권이 저지른 학살도 구분 못하고 아무거나 비교한다고 들이대니 말이죠.
2016.10.18 21:42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서북청년단의 학살행위나 제주 4.3 사건 그리고 광주학살까지 왜 책임을 못 묻는지 아십니까? 그게 다 그 학살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콘크리트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선거 때마다 얼마나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아시죠? 혁명정부의 방데 학살은 그런겁니다. 압제자와 학살자를 비호하는 콘크리트 세력을 학살한겁니다. 이들은 왕당파였고 여전히 국왕과 귀족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렇게 막나가서 학살을 저지른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죠. 그런 덕에 오늘날까지 프랑스에서는 방데 학살 얘기는 금기사항이라니까요.
2016.10.18 09:56
L'Olympe de Gouges in La fée électronique, 1989, de Nam June Paik (Séoul en 1932),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2016.10.18 09:58
백남준이 만든 올랭프 드 구즈를 기념하는 작품입니다. 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 1989년에 파리 시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200주년 행사 내내 파리 시청 청사 현관에 전시됐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은 이 작품 옆에 로베스피에르를 기념하는 작품도 같이 만들어서 파리 시에 헌정했답니다. 이렇게라도 화해를 ㅎㅎ
2016.10.19 08:36
뭐 이런 논리가 다 있지? 학살당한 방데지방은 그후로도 공화국의 적으로 멸시당해왔고 프랑스정부는 한번도 제대로된 유감이나 사과발표없이 눙쳐왔는데 그걸 정당화하는 작자는 살다살다 첨보네. 반란을 알으킨 왕당파군대야 아이 손목비틀듯 쉽게 진압되었지만 그후의 일방적인 학살은 피아구분없이 자행된게 사실입니다. 아이, 여자를 가릴것없이 죽이라는 공식명령이 남아있는데 그걸 어쩔수없는 것으로 표현하는 역사관은 참 역겹기까지하네요. 뭐 프랑스정부야 세티프학살, 파리대학살에 대해 묵묵부답하는 것과 같은 일관성이 있는 태도라고 이해하는게 편하겠습니다. 학살행위에 대해 정파 가려가며 선택적으로 평가하는 짓거리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헐~
2016.10.20 00:26
방데 반란은 진압해야 하는 것 맞습니다. 이건 오늘날 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대구경북 지역이 박씨 왕조 세우겠다면서 독립선언을 하고 - 뭐 그에 그쳤으면 관련자들이 남들의 비웃음거리로 끝났겠지만 - 만약 방데처럼 실제로 군사행동을 하고 대한민국에서 분리독립하려 한다면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나올것 같습니까? 이거 당연히 군대 파견해서 진압해야 돼요. 명백한 반역행위거든요. 현재 대한민국 법으로도 내란과 외환을 일으킨다면 관련자들은 모두 사형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니 방데 같이 뭐 30만이니 40만이니 학살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가운데....-_-;;.... 지역 반란을 진압해야죠. 명백한 내란죄를 저지른 자들인데요.
2016.10.19 09:14
2016.10.20 00:32
당시 프랑스 여권의 후진성이 이슬람에서 배운거 맞는데요? 왜 헛소리에요. 그게 사실인데...서양 남자들 저 시절에 무슬림들이 하렘 만들어서 여자들 마구 성착취하고 사는거 되게 부러워했어요 ㅎㅎ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유행한 음란 소설들 주인공들은 거의 무슬림들입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지역도 그랬고. 광포한 무슬림이 유럽 기독교 여성들 약탈해서 강간하고 그런 소설들을 서양 남자들 음지에서 엄청 읽어댔어요ㅎㅎ 진짜 가관이죠. 솔직히 자료 찾다가 그런 구절들 보면 무슬림 남자들이 불쌍할 지경이라니까요 ㅋㅋㅋ 그런데 그게 무슬림 탓은 아니죠. 그냥 짐승남 무슬림이라는 성적 환상을 가진 서양 남자들 잘못이지 ㅎㅎ 젊고 예쁜 여자들 강간하고 마구 즐기고 싶은데 선한 기독교 남성의 몸으로는 차마 못하겠고 그러니 무슬림 남성에게 감정 이입해서 안전하게 음란 소설을 즐기는거죠. ㅎㅎ 다 서양 제국주의자 남성 탓입니다. ㅎㅎ
2016.10.20 03:58
잠이 모자라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같은 문단 내에서도 앞뒤말이 맞지않는 글을 쓰게 된다는건 알것같네요.
2016.10.21 00:51
2016.10.20 01:01
....처녀성 검사....언제 이 얘기 하려나 했더니 결국 하는군요 ㅎㅎ 이 단어의 음란성 하나는 진짜 끝내준단 말이죠. 여성인권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남자들도 민망하지 않게 입에 담을 수도 있고. 님 말씀 듣고 보니 구즈가 자코뱅에게 협력하지 않는게 맞다 싶습니다. 여러모로 코드가 맞질 않아요. 산악파 지지자 남성들은 여성들이 정치 토론같은거 하면 몽둥이를 들고 직접 그 여자를 면전에서 패는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었는데 이런 인간들의 수장과 한 팀을 먹는다는건 불가능하겠죠.
다만 아쉬운 건 구즈가 로베스피에르와 혁명정부에 퍼붓는 비판에는 단순히 공포정치 그 자체에 대한 비판만 있을 뿐 여성인권침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 이게 젤 의아해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과 함께 여성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아마도 그 시절 너무 빈번하게 행해진 폭력이라 뭐 따로 얘기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듯?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그 시절엔 그냥 말 한마디 잘못해도 목이 잘려 죽는 일이 많았었기 때문에 한 얘깁니다. 젊은 여자애들이 '난 여전히 왕비에게 충성합니다' 라고만 말해도 그 즉시 현장에서 체포되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는 일이 빈번했거든요. 그런거 보면 구즈가 혁명정부를 '종교재판소'에, 혁명가들을 '이단심문관'에 비유한 건 확실히 탁월한 지적인것 같네요. 이 때 프랑스 민중들 태도는 일견 멀쩡한 사람 마녀 사냥해서 산채로 불태우는 미치광이 기독교도들 행태를 연상시키거든요.
2016.10.20 01:24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혁명의 결실을 무위로 돌린 건 아닙니다. 그건 이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 때 얘기고, 나폴레옹은 행정과 법률을 비롯한 대혁명의 성과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다만 스스로 황제가 된건 병크이긴 한데, 이건 뭐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중간단계라고 보시면 될듯. 사실 유럽 전체가 조선왕조들인데 혼자서 대한민국의 상태로 있는다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이 테르미도르 반동과 이후 총재정부의 표류에서 확인이 됐으니까요. 뭔가 비상조치가 필요했죠.
그리고 '나폴레옹이야말로 프랑스와 혁명을 지킨 공화국의 위대한 수호자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프랑스와 혁명이념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테니까요.' 이 얘기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물론 황제 되기 전까지만요ㅎㅎ 그의 군사적 업적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나폴레옹같은 뛰어난 장수가 없었다면 혁명 프랑스가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졌을 테니까요. 이게 현실이에요. 혁명전쟁에서 패하면 그 길로 대혁명은 끝나는 거니까요. 이 문제는 나폴레옹 제정기가 중간 단계라는 것만 이해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인데요.
그리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들에게 큰 선물 하나를 줬습니다. 아니 비단 프랑스 인들 말고도 다른 유럽인들에게도요. 그건 바로 '민주주의가 패권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몸소 실현해 보였다'는 겁니다. 이게 참 깨는 일이긴 한데, 아마도 나폴레옹 제정기의 융성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부르주아 계급들에게도 패권에 대한 환상을 심어줘서 그들이 이후 왕정을 비롯한 구체제에 등을 돌리고 시민국가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국가라는 것이 마냥 사람들이 '차카게 살아야 하는 나라'는 아닌 것이라는 걸 몸소 실현해 보였다고나 할까? ㅎㅎ 결론은 근대 유럽인들은 나폴레옹 덕분에 민주국가를 건설해도 패권국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열망을 갖게 됐다는 거죠. 이게 뭐 정의로운 일 같지는 않은데, 여튼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2016.10.20 03:52
유럽인에게와는 달리 아이티인에게는 좀 다른 선물을 줬었죠. 12세 이상의 아이티 남성은 모두 죽인다는 계획이요. 혁명정부의 유산인 흑인해방은 개나 줘버리고요.
2016.10.21 00:57
2016.10.20 01:45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방데학살은 제노사이드의 정의에 부합합니까? 아님 단순 학살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적법한 통치행위입니까?
2016.10.20 02:09
방데진압은 적법한 통치행위 맞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로 오늘 역사 모임에서 토론을 했는데, 모두 그렇게 결론 내렸어요. 다만 진압과정에서 과도한 학살을 막기 위해 담당 의원들이 야전현장을 찾아다니며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죠. 결국 공동체 자체에 대한 반역행위는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결론 이었죠. 다만 반란 진압에서 과도한 인권침해 사례가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고 만일 그런 일이 있을 경우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건 원론적인 얘기고...대혁명 때도 테르미도르 반동을 전후해서 방데 학살 책임자들을 수십명 처형한 사례가 있으니까 프랑스가 이 일을 그때 덮은거라고 헛소리는 하고 다니지 마시길...그거 엄연한 역사왜곡이에요ㅎㅎ
하나 덧붙여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얘기 말입니다. 이게 대체 누구 피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대혁명에 대해서라면 이 피는 '압제자의 피'더군요. 거기다 '압제자를 지지하는 일반 민중의 피'도 함께 먹고 자랐다는 겁니다.
2016.10.20 02:20
욕나오네요.잘나신 그 역사모임에서 같은 기준으로 4.3사건도 그렇게 '결론'내려보든지요.
2016.10.20 02:28
님의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그냥 아무 사건이나 다 갖다 붙여서 혼자 ㅂㄷㅂㄷ 하고 있단 말이죠. 제주 주민들이 반역자들입니까? 그 사람들이 제주도 독립시키려고 했어요? 전혀 말도 안돼는 엉뚱한 사례들 늘어놓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드세요?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광주학살에 비유하지는 않는군요 ㅎㅎ
2016.10.20 02:41
학살의 야전책임자임에도 후에 훈장까지 받은 튀로장군이 국민공회에 서신으로 여자와 아이까지 죽여야하냐고 묻자 국민공회는 반역자의 씨를 말리라고 관리감독했었죠? 방데에서 죽은 사람들이 모두 반역자입니까? 제주도에 남로당 지부의 군대는 없었습니까?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관리감독이요?
2016.10.20 03:12
그래서 그 허투로 관리 감독한 국민공회 의원들 모두 그 죄의 댓가로 처형됐다니까요? 님 내가 쓴 본문의 테르미도르 반동 관련 글 아직도 안읽고 있습니까? 그 사건 전후로 국민공회 최고위 위원들 다 죽었어요. 아니면 알고도 계속 헛소리하는 거에요? 방데학살을 비롯한 공포정치의 댓가로 수십명이 길로틴 처형을 당했다고 계속 얘기하는데도 못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척 하는 건지...그리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그 방데 사람들 반역자 맞아요. 앵무새도 아니고 아까부터 계속 반역자들이라고 하는데도 계속 물어보고 난리네요. 아니 이건 뭐 사오정도 아니고 ㅎㅎ
2016.10.20 03:32
순진한건지 아님 그냥 논리가 없으니까 순진한척 하는건지... 테르미도르 반동이 권력투쟁이었지 방데에 대한 책임묻는 사건입니까? 권력투쟁에서 밀려서 적당한 죄목으로 사형당했으니 해결된거래... 토론모임인지 뭔지 다들 손잡고 상담이나 받아보시길 바랍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2016.10.20 11:14
그 권력투쟁의 구실이 방데 사건입니다. 아니, 그럼 30만이 죽었는데 그 시절이라고 이걸 그냥 덮고 지나갈 수 있는 줄 아십니까? 그 동네가 님 망상만큼 그렇게 허술한 동네 아닙니다. ㅎㅎ 그리고 역사 논쟁을 할 때는 자료를 보고 정확한 근거로 논쟁하시길. 지금 님 댓글 보면 어떤 광경이 떠오르냐면, 아무 논리도 없이 아무거나 갖다대면서 빼애액거리는 망상병 환자 같아요.
2016.10.20 11:37
그 30만이 모두 왕당파 반역자라고 본인이 주장하면서 그당시에 혁명정부가 그 죄과를 인정했다구요? 그런 소리 지껄이면 바로 목잘리던 시대라 하지않으셨나?
지롱드가 입헌군주제를 주장한다는 사람이 정확한 근거 운운하는 건 우습지않나요?
2016.10.20 11:46
했던 얘기를 계속 또 해야하나 고민이군요 ㅎㅎ 사실 님과 단 둘의 논쟁이면 끝도 없이 내 맘대로 하겠지만…녹음기를 상대로 논쟁을 할 필요는 없죠.
2016.10.20 15:17
민주주의 딱지 붙이면 학살도 오케이라고 떠드는 확성기를 상대하는 제 심정도 헤아려주시길...
2016.10.21 00:24
민주주의가 그저 차카게 사는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세요. 민주주의는 바로 그 '민주'에 반역하는 자들을 다스릴 수 있는 합법적인 장치가 있어요. 대한민국의 형법 조항에 명시된 내란과 외환에 대한 조항을 한번 살펴보시길. 그 죄를 범한 자들은 모두 사형입니다. ㅎㅎ
세상은 두목이 있고 충성스런 졸개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