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스위치)

2016.12.04 22:58

여은성 조회 수:619


 1.언젠가 말했듯이 인간과의 협업은 싫어해요. 그것이 일이든 결혼생활이든 인간과 하는 업이라면 잘 될 리가 없다고 여기고 있거든요. 왜냐면 인간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어떤 사람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 빛나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그 사람과 경쟁자가 되면 돼요. 그 사람과 파트너가 된다면 최선을 다하는 모습 따윈 볼 수 없을거예요. (내 경험에 의하면요.)


 하지만 뭐 그게 인간이니까요. 인간들과 몇몇 일들은 재미있게 협동할 수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일들은 절대로 같이할 수 없는거예요. 어느날의 이야기 시리즈니까 옛날 얘기가 나올거라는 걸 알고 클릭했겠죠. 여기까지 따라와준 분들은. 한 10년인가...아니면 좀더 된 이야기예요.



 2.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선한 면이 어머니의 똑똑한 면을 깎아먹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끔씩 어머니에게 선한 면을 없애버리는 게 좋은 거라는 건방진 말을 하곤 했어요 그 시절에는. 하지만 내 말따위보다 훨씬 엄청난 것들을 겪고도 깎여나가지 않은 선한 면이 나의 똑똑한 척 하는 말 몇마디로 사라질 리는 없는 거였죠.


 어느날, 어머니가 어떤 얘기를 가지고 왔어요. 그럭저럭 유명한 편인 어떤투자가의 펀드에 참여하는 게 어떻겠냐고요. 그야 어머니 돈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 같은 건 필요없었으니 그냥 심심풀이 삼아 물어보셨던 거겠죠. 그야 나는 안된다고 했어요. 그게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이란 건 남의 손에 맡겨지면 찾아오기가 어려운 거니까요.


 

 3.어머니는 계약서를 보여주며 빠져나갈 틈이 있는지 한번 보라고 했어요. 그야 빠져나갈 틈 같은 건 없었어요.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수익을 내지 못해도 n년 후에 원금 상환 뭐 이딴 문구들이었죠. 한데, 여기까지 진행된 일이라면 어차피 내 말 같은 건 먹힐 리가 없을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없어도 되는 돈만큼만 맡기는 거라고 했지만 글쎄요...'없어도 되는 돈'같은 건 없는거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봐도 '없어도 되는 돈'이라고 하기엔 존나 많았어요.


 하지만 말했듯이, 이 정도까지 진행된 일이면 어차피 내 말 같은 건 소용이 없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계약서나 공증을 믿는다기보단...이 작자는 그럭저럭 유명한 편이었고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 일단 서류상으로는 원금 손실이 없을 계약이고 해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어요.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 땐 내가 직접 쳐들어가서 받아낼 자신이 있었거든요. 위에 썼듯이 그럭저럭 유명하고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에겐 (나쁜 짓을 안 하고도)받아낼 근거없는 자신이 있었어요.


 똑똑한 듀게분들은 벌써 이 이야기가 어떤식으로 흘러갈지...적어도 그 돈을 받을 수 있었는지, 받을 수 없었는지 정도는 눈치챘겠죠. 세 가지 경우가 있는거잖아요. 애초에 그 돈과 수익률을 제대로 받았다면 이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을 이야기니까요. 너무나 평범하니까요. 두번째 경우로, 징수인 모드를 켠 내가 그 돈을 받아냈다면 창피해서 쓰여지지 않을 활극 같은 이야기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그 돈을 받아내지 못했을 경우가 있는 거겠죠? 


 '돈을 받아내지 못한 것도 창피해서 못 쓸 이야기에 속하지 않나?'라고 여긴다면 뭐, 이 이야기의 핵심이 그건 아니예요.



 4.휴.



 5.시간이 좀 흐른 어느날 어머니가 좀 나와 보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TV를 보고 있었는데 TV에서는 한 사업가가 오늘 새벽인가에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어요. 물론 그 사업가가 누구인지 몇 살인지 뭐 그런 정보는 전혀 없었고요. 딱 그것뿐이었어요. 그래도 무언가 추측해볼 만한 행간 같은 건 두어 개 던져졌나봐요. 어머니가 입을 열었어요.


 '내 생각엔 저 자가 XXXX인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떠냐?'


 하하, 제가 생각하는 걸 말해보라면 이거였어요. (당시 기준으로)우리나라에는 약 5천만명이 살고 있고, 아무리 감이 좋아도 그냥 TV를 보다가 5천만명 중 한 명의 죽음을 특정해 낼 수는 없다는 거요. 어떤 신상도 나오지 않은 단 한 명 말이죠. 제가 말했어요.


 '저 뉴스에는 사업가라고 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 자는 사업가도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말했어요. '달리 쓸 말이 없었겠지.' 나는 돈을 걸라면 뉴스에 나오고 있는 저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쪽에 걸 거라고 여겼어요.



 6.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을 들여서 어머니는 뉴스에 나온 그 사람이 저 사람이라는 걸 알아냈어요. 자...여기서 어머니가 걱정하는 건 이거였어요. 본인이 아니라 다른 투자자들이요! 할렐루야!


 어머니는 그자의 사이트에 들어가 걱정스러워하며 둘러봤어요. 그야 아직은 그 자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별로 안 지났을 시기라 별 일 없었죠. 어머니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했는데 나는 말렸어요. 그리고 며칠 정도 지나자 사이트의 사람들이 이상해하기 시작했죠. 꽤 자주 나타나는 XXXX가 왜 나타나지 않고 있는지를요. 어머니는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이제 알려야겠다고 글을 쓰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재빨리 말했어요.


 그 사실을 알리기 전에 지금 당장, 지금 당장 XXXX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요.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 집으로 뛰어갈 텐데 그러면 우리의 돈을 받는 건 힘들다고요. 지금 당장 XXXX의 집으로 쳐들어가면 우리의 돈만큼은 받아낼 수 있고, 사이트에 XXXX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된다고 말이죠. 어쨌든 이건 정말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어떤 경우에도 받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거든요. 솔직이 말하면 그 돈을 '내가'받아내는 상황이 오면 그 돈의 얼마쯤은 내 돈이 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고요. 하지만 그 녀석이 자살해버릴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7.그러나 어머니는 망설였고, 며칠 망설이는 사이에 사이트의 사람들도 그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제서야 어머니도 다른 사람들과 그 집에 찾아갔어요. 그리고 돌아와서 말씀하셨어요.


 그 집에 뭐 그자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고 있었고 화난 사람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었고 너무 가엾어서 그자의 아내에게 나쁘게 대할 수 없었다는 뭐 그런 말을요.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며 나는 그 돈으로 할 수도 있었던 훨씬 나은 일들을 생각해 봤어요. 


 예를 들면 쓸데없이 번쩍거리기만 하는 황금총을 산다던가 벤츠를 사서 범퍼카 놀이를 하는 것 같은 거요. 아니면 악마숭배자들 집회를 열어서 그 돈들을 불태우고 교주 노릇을 한다던가요. 이런, 훨씬 더 가치있게 그 돈을 쓰는 방법들 말이죠. 그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으니 갑자기 딱 한가지가 알고 싶어졌어요. 내가 알고 싶어진 게 아니라 내 분노가 알고 싶어진거였겠지만요.



 8.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봤어요. 그 집 주소를요. 어머니는 그냥 됐다고 이 일은 넘기자고 말했어요. 휴. 그야 나도 알고 있었어요. 이제는 나도 그 돈을 받아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거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 돈만큼의...아니면 일부라도 출혈을 강요하는 거였어요. 그 집에 가서 무기물들을 다 부숴버리면 어느 정도의 출혈을 그들도 겪게 될 거니까요. 그 사람은 죽지 않았냐고요? 아니요. 돈을 받아내러 온 사람들 앞에 아이를 안고 나타난다? 이건 불쌍한 게 아니라 불쌍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거잖아요. 어차피 그 자식들은 다 한통속인 거예요. 그 사실이 너무 열받아서 받아내지 못할 거면 출혈이라도 강요하고 싶었어요.


 뭐 어머니는 그 집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결국.



 9.그 뒤로도...남의 돈을 멋대로 유용한 다음에 '좋은 의도로 그랬다. 도의적인 책임은 인정하지만 돈은 보상해드릴 수 없다.'같은 말을 하는 놈들을 보곤 했어요. 그런 놈들에게 돈을 토해내게 만드는 게 좋은 일이거나 통쾌한 일이냐고요? 당연히 아니죠. 평소라면 절대 안 낼 정도의 큰 목소리로 평소라면 절대 입밖에 안 낼 말들을 해야 하는 거예요. 금융감독원에 보낼 매끄럽고, 감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꼬투리를 잡힐 건덕지 없는 고발장도 다 내가 써야 하고요. 그렇게 모든 방향에서 쉬지 않고 때려대야만 간신히 돈을 얼마간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거예요. 왜냐면, 인간들은 토하게 만들어야 돈을 토해내거든요. 듀게분들 중에 착한듀게분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돈을 먹어버릴 정도의 녀석들은 억지로 토하게 만들어야 토해내는 거예요.


 그러면 완전 화나는 거거든요. 누군가에게 화나는 건 아니예요. 애초에 인간들에게 기대하지도 않으니까요. 누군가에게 화나는 게 아니라 지금 이러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상황에 몰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죠. 인간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요.



 10.이 이야기의 후일담을 쓰려 했지만...글이 너무 길어지니 관두죠.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의 통찰력을 좀더 신뢰하게 됐다는 얘기예요 대충. 인간에 대해서만 빼고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선한 면이 판단력에 영향을 미치는 않는 일들에 있어서는 늘 신뢰도가 높았어요.


 흠...일기를 쓰다가 그때의 감정이 잠깐 떠올라서 감정적이 된 것 같군요. 안좋은 표현이 몇 개 있네요. 오해받을까봐 써두는데 나는 인간을 좋아해요. 무지 좋아하죠. 무지 좋아하고, 늘 궁금하고 뭐 그래요. 인간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요. 아무리 99개가 뻔해도 그 사람이 가진 단 하나의 뻔하지 않은 면을 보기 위해 노력하곤 하죠.


 하지만 인간에게는 여러 개의 스위치가 있는데 그 스위치 중 어떤 스위치가 눌러지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아요. 이 글과는 별개로 어떤 인간이든 얼마든지 소름끼쳐질수 있다는 걸 경험한 뒤론 늘 인간을 좋아하면서 싫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니면 싫어하면서 좋아하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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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아...내일은 월요일이네요. 일을 해야 하는 날이죠. 물론 나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니 이 엿같은 인생에서도 밝은 면을 하나 찾아냈어요! 일터의 직장 동료들 중에 다행히도 인간이 없다는 점이요. 내 발목을 잡아끌 녀석이 없다는 뜻이죠. 편한 마음으로 출근하려고 노력쯤은 해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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