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4 15:45
이제 8월 중순인데 비가 오고 선선해서 그런지 여름이 떠나고 있는 느낌이에요.
전에 잠깐 찾아들었던 Paul Desmond의 알토 색소폰 연주 앨범 하나 틀어놓고
오랜만에 시도 몇 편 읽고 있어요.
Paul Desmond - Easy Living
감각
아르튀르 랭보
푸른 여름날 저녁 무렵이면
나는 오솔길로 갈 거예요
밀잎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며
꿈꾸는 사람이 되어
발치에서 신선한 그 푸름을 느낄 거예요
바람이 내 맨머리를 흐트러뜨리도록
내버려둘 거예요
나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끝없는 사랑이 내 영혼 속에서
솟아오를 거예요
그리고 나는 멀리 떠날 거예요
아주 멀리 마치 보헤미안처럼
자연을 따라
마치 그녀와 함께 있는 듯 행복할 테죠
남녘의 하늘
헤르만 헤세
마로니에 꽃, 저녁의 숲
잎 속에는 반달, 숲 속에는 우리 조용한 술꾼들
밤의 미풍 속에서 우리의 술잔이 울린다
어두운 하늘로 우리의 술이 이글이글 탄다
우리 덧없는 꽃들이 여름 내내 작열한다
나를 마셔라, 사랑아! 아리따운 이여, 그대를 마시게 하라!
우리의 뜨거운 여름 횃불들로 우리는
연인들에게 여름밤의 노래를 부르라 신호한다
오 올빼미 울음, 오 어두운 밤의 심장
환한 협죽도 속 밤나방 너
우리는 작열한다 타들어 간다
형제여 서로의 속으로
신에 바쳐진 축복 받은 제물이다
울려라 삶의 노래여 죽음의 노래여
술잔이 울린다 우리의 시작이 활활 타오른다!
여름의 끝
헤르만 헤세
단조롭게, 나직하게 또 탄식하며
온화한 저녁 내내 비가 흐른다
지친 아이처럼 울며
가까운 자정을 마주 보며
여름은 잔치들에 지쳐
그 화환을 시든 두 손으로 들고 있다가
던져 버리고 ㅡ 여름이 꽃 진다 ㅡ
불안하게 몸을 숙이며 숨을 거두려 한다
우리 사랑도 한 개 화환이었다
뜨거운 여름 축제들로 활활 타오르며
이제 그만 마지막 춤판이 깨진다
비가 쏟아지고, 손님들은 피신한다
우리가 시든 호화로움을
또 꺼져버린 광휘를 부끄러워하기 전에
이 더없이 엄숙한 밤
우리 사랑과 작별을 하자
여름 저녁
헤르만 헤세
클로버의 취하는 듯한 짙은 향기에 손을 멈추고
풀 베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
아, 너는 묵은 슬픔을
다시 일깨워 주는구나.
민요와 동요들이 나직이
저녁 바람을 타고 하늘로 사라진다.
다 아문 잊은 슬픔들이 다시 나를 괴롭힌다.
늦저녁의 구름이 곱게 떠간다.
들은 따뜻이 멀리 숨을 쉬고...
사라진 청춘의 나날이여
오늘도 아직 나에게 볼일이 있는가.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수목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하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고독의 깊이
기형도
한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강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중량으로
폐부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상처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그 깊은 강을 따라 내 식사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운무 가득한 가슴이여
내 고통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Paul Desmond - <Summertime>
2017.08.14 17:22
2017.08.14 17:52
반가워요. 가끔영화 님 ^^
오늘은 왠지 마음 아픈 시를 읽고 싶군요.
나이테를 위한 변명
나석중
그의 일생은 어느 여름날
심심해서 던진 물수제비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건 나무의 울음이었다
나무가 울고 간 파문이었다
붙박인 삶이라고
사는 것이 고만고만한 나무는
슬프고 괴로울 것 없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뿌리는
하루에도 몇 리를 물 길러 나갔다 와서
끙끙 앓는 것이었다
생이 아파 우는 것이었다
저 수만 마리 이파리들 뙤약볕 아래 나와
아우성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우듬지에
새의 둥지를 무상으로 세들이고 바깥소식을 듣긴 하지만
저 산 너머가 궁금하여
마음으로 가서 세상을 읽고 오는 것이었다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나무는
2017.08.14 19:25
2017.08.14 19:51
문 님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목마와 숙녀>를 한 번 읽어봤네요.
저는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에 눈길이 가요. ^^
시나 음악도 술처럼 마음/몸 상태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목을 내민다는 거
최을원
버려진 자전거에 나팔꽃이 칭칭 감겨 있었다
자전거의 의지다
그렇게 목 졸리고 싶었던 거다
일산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만취한 젊은 여자가 뒤에서 목을 끌어안는다
제발 저 좀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
순간, 못난 자신에게 간절히 매달려준 것이
눈물겹게 고마워
자전거는 기꺼이 목을 내민 것이다
누구나 목을 내민 적이 있다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죽는다 한 번 죽은 자들은
누구도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도 나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
횡단보도 건너편까지가 영원이다
그 여자를 데려다 주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부축하던 팔에 얹히던 왼쪽 젖가슴의 무게
세상엔 딱 그 정도의 무게로 남는 것이 있다
자전거도 녹슬고 나팔꽃도 말라죽었지만
무게는 남아
오랫동안 남아
자전거가 풀이 될 때까지
풀이 자전거가 될 때까지
2017.08.14 21:54
2017.08.14 22:09
'아씨 체질인 것이다'에서 깔깔 웃고 말았어요.
황인숙 시인이 언제 이런 재밌는 시를 썼대요. ^^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이기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오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눈이 내렸네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도 오늘은 낯익은 사람이 되네
오래 써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들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면 모두는 내일을 기약하고
밤에는 별이 뜨리라 말하지 않아도 믿었네
집들이 안녕의 문을 닫는 저녁엔
꽃의 말로 안부를 전하고
분홍신 신고 걸어가 닿을 내일이 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네
불 켜진 집들의 마음을 나는 다 아네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네
2017.08.14 23:57
이기철 시인의 시가 마음에 들어서 몇 편...
추운 것들과 함께
이기철
지고 가기엔 벅찬 것이 삶일지라도
내려 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천인절벽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는 망아지처럼
건너 온 세월, 그 물살을 헤어본다 한들
누가 제 버린 발자국, 쓰린 수저의 날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는가
독충이 빨아 먹어도 아직 수액은 남아 나무는 푸르다
누구의 생이든 생은 그런 것이다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오란 새의 부리를 검게 만드는 일 뿐
상처가 없으면 언제 삶이 화끈거리리
지나와 보면 우리가 그토록 힐난하던 시대도
수레바퀴 같은 사회도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계절을 이긴 나무들에게
너도 아프냐고 물으면
지는 잎이 파문으로 대답한다
너무 오래 내려다보아 등이 굽은 저녁이
지붕 위에 내려와 있다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
세상의 온돌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들도
오늘 늦가을 지붕을 인다
돌에 대하여
이기철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2017.08.15 00:58
별로 힘과 용기를 주진 않지만 매력적인 시도 몇 편 ^^
저녁은 모든 희망을
이영광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 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는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떼가 새까맣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나무는 간다
이영광
나무는 미친다 바늘귀만큼 눈곱만큼씩 미친다 진드기만큼 산 낙지만큼 미친다 나무는 나무에 묶여 혓바닥 빼물고 간다 누더기 끌고 간다 눈보라에 얻어터진 오징어튀김 같은 종아리로 천지에 가득 죽음에 뚫리며, 가야 한다 세상이 뒤집히는데
고문받는 몸뚱이로 나무는 간다 뒤틀리고 솟구치며 나무들은 간다 결박에서 결박으로, 독방에서 독방으로, 민달팽이만큼 간다 솔방울만큼 간다 가야 한다 얼음을 헤치고 바람의 포승을 끊고, 터지는 제자리걸음으로, 가야 한다 세상이 녹아 없어지는데
나무는 미친다 미치면서 간다 육박하고 뒤엉키고 침투하고 뒤섞이는 공중의 결승선에서, 나무는 문득, 질주를 멈추고 아득히 정신을 잃는다 미친 나무는 푸르다 다 미친 숲은 푸르다 나무는 나무에게로 가버렸다 나무들은 나무들에게로 가버렸다 모두 서로에게로, 깊이깊이 사라져버렸다
2017.08.15 11:49
오늘은 완전 가을 날씨에요.
앞으로도 이 날씨면 좋겠어요~~
2017.08.15 15:29
창문 열어놓고 자다가 새벽에 추워서 깼어요.
8월 중순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
숲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기합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도 제자리에,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2017.08.15 12:33
2017.08.15 15:55
여름이 가을보다는 훨씬 힘이 셀 것 같았는데 이렇게 짜릿한 속도 위반을 당할 줄 몰랐네요. ^^
우리 삶에서도 이런 예상치 못한 시원한 반전이 가끔 일어나면 좋겠어요.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여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2017.08.16 07:33
덕분에 오랜만에 우아하고 럭셔리하게 출근시간을 채웁니다. 감사합니다^^
2017.08.16 14:36
출근 시간이 즐거우셨다니 이 글을 올린 게 기쁘고 보람있어요.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니 또 뭔가 가슴 아픈 시가 땡겨서 한 편... ^^
흉터
이영광
몸 곳곳에 흉터가 피어 있다.
악의 꽃처럼
내 손과 남의 손이
찢고 태운 자리들
저것들이 날뛸 때마다
몸은 아팠고 나는 앓았으리라
그러나 제 새끼도 못 알아보는 짐승,
나는 이놈의 흉터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다
아픈 적도 앓은 적도 없는데
흉터는 나타나 몸을 물고,
빨고 있다
갈 데 없으면 돌아와
제 집이나 때려부수는 가장처럼 나는 날뛰어
기억에도 없는 흉터들을 만들었으리라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었으므로
흉터는 자식이 아니라
장식이었으므로
눈먼 몸은 저를 떠난 나를 증오하여
상처를 꿰매고 달래어 이렇게
흉터를 길러냈으리라
제 속에 뿌리 깊이 내려주었으리라
옷 벗고 들어가다 거울 앞에서 보면
내가 괴롭힌 자,
주렁주렁 새끼들을 끌어안은 어미 같은
축 늘어진 몸이 건너다본다
물로는 도려낼 수 없는 흉터들도
초롱초롱 제 애비를, 제 원수를 쳐다본다
저만큼 가고 있어요 아까 돌아보던데 계절이 끝나면 아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