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0 20:31
나폴레옹이 첫 부인 조제핀에게 건넨 약혼반지가 경매에서 94만9천달러, 우리돈 10억 6천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파리 남부 퐁텐블로의 오즈나 경매소에서 나폴레옹과 조제핀 커플의 약혼반지가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고 ABC방송이 보도했습니다.
낙찰가는 94만 9천 달러로 경매소 예상금액의 50배에 달했습니다.
각각 1캐럿에 살짝 못 미치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로 장식된 이 금반지는 조제핀의 250번째 생일에 낙찰돼 관심을 샀습니다.
경매소측은 당시 나폴레옹은 젊고 전도유망했지만 부유하진 않았다며 이 반지를 사려고 지갑을 모두 털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귀족 출신의 과부이면서 6살 연상인 조제핀을 1795년 처음 만나 이듬해 결혼했습니다.
2013년 3월 25일 SBS 보도
1796년에 결혼한 나폴레옹과 조제핀, 작가 미상, 인그레이빙,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아니 젊은 장군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처음 만난 것은 1795년 파리에서였습니다.
지난해의 툴롱 공략에서 누구도 무시 못할 공적을 쌓은 이 젊은 장수는 누가 봐도 앞 길이 탄탄할 것으로 보였지만, 딱하게도 그는 지난해 쿠데타로 새로 수립된 총재정부와 척을 진 신세였습니다. 총재정부의 주역들은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상황이었는데, 나폴레옹은 바로 그 테르미도르로 몰락한 로베스피에르의 직계 라인을 탄 군인이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처형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상황으로 몰린 나폴레옹으로서는 이 시절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는 현재 실직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공화국군 장교 - 별 하나를 단 장성(준장)이기는 했습니다만, 육군부의 지시를 어기고 자대 배치를 거부하는 바람에 그만 직위해제를 당하기까지 한 상황이었죠.
용맹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가 자대배치를 거부하다니! 그런데 나폴레옹이 출전을 거부한 것은 그가 무슨 전장에서의 두려움을 느꼈다거나 어떤 사적 이익을 바랬기 때문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가 명성을 얻은 첫 전투에서 그만 대혁명의 민낯을 보게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Monument à la mémoire de Lazare Hoche par Jules Dalou à Quiberon, 1902.
키브롱에 있는 방데 지역 사령관 루이 라자르 오슈 장군의 동상
영국군에게 해를 넘기도록 점령되어있던 툴롱 항을 나폴레옹이 수복하자마자 파리의 혁명정부에서 파견된 의원들은 부역자들에게 무자비한 처벌을 단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점령 기간 동안 영국군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조국을 배반한 죄'가 적용되었고 이는 왕정에 충성하면서 해외의 유럽 왕조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왕당파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된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유럽의 근대 민족의식이 태동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세 이래의 전통 왕조에서는 이른바 국가의 주권은 바로 왕 - 백성의 주인인 귀족들의 대표 - 이 갖고 있었지만(신분제 사회니까요)이제는 시민혁명으로 인해 바로 그 국가의 주권이 - 나라의 주인이라는 권리가 바로 시민, 이른바 모든 국민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국민주권이라는 것이고 이는 혁명 기간 내내 진행된 공포정치를 통한 왕당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에 의해서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시무시한 현장에 나폴레옹이 서 있었던 것이죠.
나폴레옹은 자신이 수복한 툴롱항에서 약 2천 명의 주민들이 처형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왕과 영주에게 충성하기 위해 영국군과 협력한 그들이 '외세와 내통하여 민족을 배반한 죄'로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극도의 심리적 불안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대체 민족이란 무엇인가?
나는 코르시카 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이제는 프랑스 인이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여기에 와 있다! 나는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고 자유와 평등의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공화국의 이상 아래서만 프랑스와 나의 고향 코르시카는 하나의 조국이 될 수 있다!
바로 이와같은 결의 아래 나폴레옹은 혁명의 삼색휘장을 몸과 마음에 두르고 낯선 프랑스 땅에 어렵게 발을 디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은 먼 곳에 있고, 현실은 엄청난 피의 강물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살을 감행했던 공포정치의 혁명가들이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사라진 뒤(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툴롱에서 2천명이 넘는 부역자를 처형한 혁명가 프레롱이 이번 테르미도르 쿠데타의 주역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었죠…) 간신히 혐의에서 벗어나 살아남은 나폴레옹에게 내려진 명령은 바로 '방데 지역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Quiberon의 épisode de l' affaire de Quiberon 영국군과 왕당파의 키브롱(방데지역) 상륙을 저지하는 루이 라자르 오슈 장군. 폴 에밀 부티니(1853~1929)의 역사화, 이 상륙작전에서 패배하면서 영국-왕당파 연합군들 중 포로가 된 프랑스의 귀족 700여명은 총재정부의 명령에 따라 전원 처형됨
방데 지역은 프랑스의 서북부 지역으로 이곳 역시 툴롱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농민들은 파리의 혁명정부에게 반기를 들고 전통적인 지배체제에 따라 영주들의 왕당파를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바다 건너 영국군이 이들을 돕기 위해 대규모의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죠.
방데 지역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오늘날 학자들은 몇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이 지역에 부과된 30만 징집령 그리고 다음으로 혁명정부의 종교정책에 가장 큰 반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무신론자들로 구성된 혁명정부는 종교정책에 있어서 개신교와 유대교의 종교 자유 인정과 사적 영역에서 여성해방정책 - 특히 혁명정부의 여성정책은 간통죄 폐지와 이혼의 자유, 동등한 재산 상속과 재산 분할 그리고 자녀 양육권까지 인정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 당시 기준으로 - 정책들이 기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혁명정부의 이런 여성정책이 여성의 공민권을 부정하고 여성을 사적 영역으로만 한정하는 정책이었다고 비판합니다만, 당시는 230년 전이었습니다. 겨우 이 정도 개혁정책으로도 방데 지역에서는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으니 말입니다.
이들은 아직 자신들이 프랑스 인이라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영주와 국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라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지, 아직 프랑스 인 - 그러니까 주권을 가진 평등한 국민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를 침공하는(정확한 타겟은 프랑스 혁명정부) 유럽의 왕조 국가들에 맞서서 국민군을 모집하려는 혁명정부의 징집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정부의 여성정책은 카톨릭 교회의 일원성을 부정하고 심하면 가정파괴까지 도모하는 무도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Combat de Quiberon en 1795, painting by Jean Sorieul 1795년의 키브롱 전투, 장 소릴, 1850년, 캔버스에 유채, 솔레 미술관
그러니 혁명 정부의 30만 징집 할당령은, 이는 국가를 지키겠다는 애국심 - 그러니까 새로 수립된 민주국가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 없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새로 수립된 민주 국가에 대한 애국심 보다는 전통의 왕조와 영주들에게 충성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섬멸하라'는 혁명정부의 강력한 진압령이었고, 이는 이러한 진압 방침을 주도한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몰락하고 난 뒤에도 변함없이 시행되어 방데 반란군들은 혁명군에 의해 무자비한 진압을 당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 현장에 내려가라는 명령이 나폴레옹에게 떨어졌던 것입니다.
Portrait of Joséphine de Beauharnais, Andrea Appiani the Elder, 1808, oil
2017.12.10 21:34
2017.12.10 22:27
조제핀 황후의 보석은 자손들에게 상속됐으니까요. 아마 자손이나 자손에게 저 반지를 넘겨받은 사람이 경매소에 이를 보증하는 증명서를 제출했을 겁니다.
2017.12.11 01:08
2017.12.10 22:13
프랑스 혁명 전후한 유럽 역사에 대해서는 몇 권의 책을 읽은 게 전부인지라 빅캣님의 글이 이 부분을 다룰 때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다 쓰여지길 기다려야겠네요.
300
2017.12.10 22:31
사실...<테르모필레이의 레오니다스>는 다비드가 나폴레옹 집권 말기에 그린 작품인데, 완성하자마자 1815년 워털루에서 패배로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바람에 마치 무슨 예언같은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림은 멋진데 딱히 얘깃거리가 없는 작품이라...^^;;
언제나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12.10 22:33
아. 생각보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올 구석이 없었던 것이로군요. 그래도 관련해서 코멘트해주셔서 고마워요.
2017.12.10 22:38
2017.12.10 23:08
2017.12.10 23:26
혁명정부의 특히 급진적인 이혼정책이 적지않은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여성에게 이혼의 자유와 재산분할 그리고 자녀양육까지 동등하게 허용했거든요. 이는 당시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지요. (물론 이는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모두 무위로 돌아갑니다. 간통죄도 다시 부활하고 남편이 원할 경우 심지어 아내를 투옥할 수도 있었죠) 그런데 혁명정부의 지속 기간이 1년이 채 안되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당시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가져온 것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당시 농민들과 성직자들의 반발이 상당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230년전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신 앞에서 약속한 결혼을 부정하는 가정파괴적인 법령이라고 충분히 분노할 법하지요.
2017.12.10 23:37
2017.12.10 23:34
'사적 영역에서 여성해방정책'이라는 표현은 제가 쓴 것입니다. 오늘날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오히려 이 당시 혁명정부의 정책이 여성을 사적 영역에만 한정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반여성적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이거든요. 하지만 230년전이라는 걸 감안해야죠. 저 정도 정책만으로 반란의 한 사유가 될 정도인데.
2017.12.10 23:47
2017.12.11 00:03
그런 성격 때문에 반란의 원인이 됐습니다. 뭐가 별개의 문제라는 겁니까? 여하간 말꼬리 잡아서 빙빙 돌리는 건 여전하군요. 그럼 저 시절에 이혼의 자유가 용납될거라고 보십니까? 230년 전인데?
그리고 첨부하면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을 최초로 의회에 상정한 의원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입니다. 물론 그의 법안은 동료 혁명가들에게 단박에 거부되었지만요. 그래서 그나마 그가 추진한 것이 사적영역에서의 여성해방정책이었는데, 그 때문에 로베스피에르는 농민반란까지 부닥치게 된겁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방데 진압에 앞장섰던 것이죠.
정치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2017.12.11 01:31
2017.12.11 00:13
이 책에 다 나오니까 궁금하면 읽어보시구요.
2017.12.11 01:34
2017.12.11 00:00
요즘 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한 예쁜 반지네요
저 디자인과 비슷하게 주문제작해서 끼고 싶어요. (돈 없으니까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대신 스와로브스키 스톤으로 ^^ )
2017.12.11 00:04
그렇죠^^ 그래서 찾아보니 저 디자인을 응용한 다양한 작품들이 많더군요.
2017.12.11 13:17
2017.12.11 20:34
2017.12.11 23:18
2017.12.12 08:45
2017.12.12 20:35
<케임브리지 프랑스 사>, 콜린 존스 지음, 1994년, 방문숙-이호영 옮김, 시공사
방데반란과 혁명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한 서양학자들의 최근의 의견은 이 책을 참고하세요. 지난 1989년 대혁명 200주년 기념 학회 때 수정주의 혁명사 연구자들의 학회 불참 선언으로 적지않은 논란이 있었는데, 이 책에 그 이후의 학계 동향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017.12.12 20:41
국내의 서양사학자 육영수 교수의 저서입니다.(2013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국내의 수정주의 학자의 견해를 알고 싶으시면 이 책을 참고하세요. 영미권 수정주의 학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연구소 소속의 지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서 히틀러나 스탈린이랑 자코뱅이 똑같다는 소리나 하는 터라 주의가 좀 필요합니다. 수정주의 견해에 대한 더 학문적인 견해를 알고 싶으시면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2017.12.12 20:59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951년, 한길사, 이진우-박미애 공역, 2006년
자코뱅과 나치즘 그리고 스탈린 체제가 연속성이 있다는 견해를 처음 제시한 사람이 바로 독일 출신 미국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입니다. 그가 1951년에 발표한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러한 견해가 처음 제시됐습니다. 물론 발표 당시 좌파 학자들에게 가루가 되게 까이면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만, 이후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참혹성이 알려지고 80년대 이후 대두된 수정주의 연구에 의해서 더 많은 논의가 진행되면서 아렌트의 견혜가 설득력을 갖게 됐지요.
그런데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린다면,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근대성 보다는 구체제의 영향에 더 근접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 대혁명기 여성 혁명가 올랭프 드 구즈가 지적한 대로 -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종교재판소와 이단심문 체제와 유사한 속성을 띠고 있는 것이죠. 이른바 기독교 신앙이 있던 자리에 민주주의와 공화국(남녀노소 평등한)에 대한 신념이 대신 들어앉은 것 말입니다. 230년전 옛날 아닙니까...쓸데없이 왜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까지 오느냐 말이죠.
2017.12.13 07:51
2017.12.13 12:45
2017.12.13 12:48
2017.12.13 13:04
2017.12.13 14:13
2017.12.15 19:03
2017.12.15 19:17
근데 가끔 궁금한게 저게 조세핀꺼라는걸 어떻게 증명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