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

2021.11.07 14:30

어디로갈까 조회 수:750

0. 나흘 전 막내와  카톡으로 알모도바르에 관한 얘기를 나눴을 때  이 글을 올려볼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십 몇 년 전에 썼던 가상 인터뷰인데, 저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글을 그때 어머니가 보내주셔서 좀 놀랐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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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설레는 이름이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최고의 아이콘은 막무가내 보이즈 타입으로 생긴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하고, 다시 레즈비언으로서의 사랑에 좌절하여 흘리는 마스카라의 눈물, 그 검은 눈물이다. 팔십 노인이 아님에도 잦은 트랜스를 통해 삶의 끝장을 보고, 다시 지혜로워지기로 마음먹었지만 예상과 달리 허술하지 않은 영화들로 많은 이들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는 이 감독. 필시 이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페로몬이 분비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궁금함에 지중해로 그를 만나러 갔다. 비가 내렸지만 따뜻한 미스트랄 때문인지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초대받지 않은 주제에 무턱대고 만나러 간 거였으니까. 물론 그에게 만나러 가겠다고 팩스를 넣고 허락을 받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가 넣은 전갈을 받아봤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다음 영화를 준비 중이라니,  이 세계적인 감독이 얼마나 바쁠 것인가.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품었으니 그건 그의 영화가 키워낸 근거없는 낙천성에 힘입은 바였다. 문을 두드리자. 그리고 부딪치자. 
그의 책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한다>에 대해 궁금하다는데, 설마 쫓아내기야 할까라는 배짱이 있었다. 책과 영화 속의 그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화통한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명사들 중에는 보여주는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거만하고 안하무인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긴장하기는 했다. 

밤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회백색 스페인식 건물에 살고 있었다. 투우사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의상을 입고 입에는 여송연을 물고, 탑스타 답게 숱 많은 머리에 오골조골 파마를 한 상태였다. 눈썹이 매우 짙었고, 마스카라를 한 탓인지 눈이 유난히 커보였다. 
같이 간 통역은 알모도바르에게 나를 소개했다.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누워 있던 그의 책상 위에는 펜트하우스, 허슬러 같은 잡지들이 죽 펼쳐져 있었다. 눈길이 쏠리는 대로 보고 있는데도 그가 워낙 태연자약해서 나도 민망함을 싹 거둬버렸다.

나: 부에나스 노체스!
알모도바르: (낄낄) 그래, 어쩐 일로 이 먼 이역만리까지 왔나.
나: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한다>를 읽었다. 대부분의 글들이 포르노 스타 패티 디푸사가 [라 루나]라는 잡지에 연재한 글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가공인물인가 실제인물인가?
알모도바르: (싱긋) 그녀는 실존 인물이고, 스페인 대중의 신화가 됐다. 나도 쫌 놀랐다. '당신의 활달함과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당신의 태도를 갖고 싶소.' 이것이 그녀에게 바치는 내 헌사이다. 

그는 감상에 젖은 듯 하늘을 쳐다봤고, 그의 눈시울에는 물기가 감돌았다. 매우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 같았다. 나는 그녀가 그의 영화에 단골로 나왔던 여배우 빅토리아 아브릴의 모델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빅토리아 아브릴은 너무나 당차고 섹시며 아무 무서운 것도 없어 보였으니까. 

나: 근데 만화 캐릭터로 그렸다고는 생각 안 하나? 이런저런 궁금한 게 많아서 직접 물어보고자 이 유럽의 변방에까지 기어이 온 거다.
알모도바르: 뭐시라? 유럽의 변방? 하하.  그래, 궁금한 게 뭔가?
나: 일단 당신의 외모를 보니, 그 책의 주인공 패티 디푸사 같다. 뭐랄까, 모든 경계와 가치를 뛰어넘었다고 할까. 여잔지 남잔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간다. 아무튼 인상이 내 예상을 뒤엎는 점이 있다.
알모도바르: 그건 나한테는 최고의 상찬이다. 난 성정체성의 변화, 사랑과 섹스의 추구, 극도의 방탕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깊은 정을 나눌 수 있고, 자유로와질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나: 그거야 당신 영화 세계의 내용 아닌가. <키카>의 강간 장면이나 <마타도르>의 동반자살 장면, <욕망의 낮과 밤>에서 납치범과의 사랑 등이 단적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표현을 성적 자극을 줄려고 마구잡이로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알모도바르: 상당히 눈이 밝군, 그래. (슥 가까이 다가와 윙크하며) 당신, 마음에 든다.
나: 헛 미안하다. 미리 밝혔어야 했는데. 난 이성애자이다.
알모도바르: (발끈~) 그런 촌티는 내지 마라. 그 책에 나오는 패티 디푸사가 궁금한 모양인데, '삶에 대한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절대로 잠을 자지 않고, 소박하며 다정한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여인이다. 나와는 다르다. 난 욕심은 많지만 잠도 또한 많다.

나: 기분 상했다면 용서해라. 어쨌든 그 책에 나오는 패티가 '모든 쾌락을 즐길 줄 아는 여자'라는 설정이 최소한 알모도바르, 당신의 가치관이 아니냐는 거다. 그리고 당신 영화의 작가적 테마가 아니냐는 거다.
알모도바르: 당신은 영화 보면서 '주제찾기' 같은 거 하나? 그런 건 국어 전공 샌님들이나 하는 거다.
나: 아, 내가 당신 책을 읽으면서 당황했던 건, 패티가 '방금 전에 사랑을 나누고도 남자들을 또다시 광란의 세계로 몰고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란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책이 당신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모도바르: (심드렁~ ) 그건 맞는 얘기다. 거리에서, 택시 안에서, 자기 집에서 남자와 어울리고, 성전환한 옛날 친구와 경찰과 백수들과 놀아난다. 그렇지만 그녀는 방탕하다고 해도 눈처럼 순결하고 타락했다고 해도 바다처럼 깊다.
나: 당신과 패티의 인터뷰가 있던데, 그때 당신은 브와예(관음증 환자)라고 고백했다. 당신 입에서 순결이니 깊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니까 좀 뜨악하다.
알모도바르: 약 올릴려고 왔나. 그리고 <살인 혐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같은 영화도 안 보나? 관음증에서 너무나 치열한 사랑이 싹튼다. 어떤가.

나: 당신의 책 164페이지에서는 90년대의 유행과 관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에 관한 그런 고전적인 주제보다 당신은 미의 기준이 변하고 일시적인 유행이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알모도바르: (당황하며) 그,그건… 키치와 육체가 낳는 판타지에 관한 내 소견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 베이스에는 변하는 가운데에도 변치 않는 사랑의 뜨거운 서정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영화만 봐도 척 이해가 되지 않나?
나: (싱긋) 하긴 당신은 셀프 인터뷰에서 당신 이미지가 과격하지 않느냐는 자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건 지난 시즌에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가을과 겨울 시즌인 지금 나는 그 반대의 이미지를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청년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게 지금의 현실에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라고.

알모도바르: (반기며) 바, 바로 그렇다. 당신 눈 좋구나. 그래, 내 영화 중에 어떤 영화가 가장 좋았나?
나: 물론 <라이브 플래쉬>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좋았다.
알모도바르: 그런가. 그 작품들 다 소장하고 있나.
나: 다 없어졌다. 몇 차례 이사다니는 통에. -_-;

알모도바르: 저, 저런… 정신머리가 구두를 삶아먹는 한이 있어도 그건 소장했어야지. 어쨌든 나는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한다>에서도 그렇고, 내 영화에서도 그렇고 항상 '산산이 찢겨진 영혼을 지닌 채 내 품 안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믿음을 찾아 되돌아오는 사람'을 그리고 싶다. 날 버린 바로 그 길에 두 팔을 벌리고 영원한 사랑을 지닌 채 있는 이의 초상을 말이다.

그는 다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영화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새롭고 위험한 변화를 내포한 <마타도르>가 자기 영화들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감각의 쾌락을 추상적으로 다룬 영화라고 알쏭달쏭한 얘기를 해서 가만 그의 눈 속을 들여다 봤다. 많은 상을 탔고 찬사의 포화 상태에 이른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는 그저 가벼운 코미디물이라고 어울리지 않게 겸손한 말도 해서 계속 바라봤다.

나: 끝으로 당신처럼 '개성 넘치고 뛰어난 영화를 만들기 위한 충고의 말'을 부탁한다.
알모도바르: 직업 의식을 가져라. 그리고 삶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즉 매춘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 라고. 그 질문에 대해 긍정한다면, 일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 음. 은유적인 표현이군.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느 분야의 작업이든 매춘을 닮아있기 마련아닌가.

알모도바르: 한국 감독은 심의기준 때문에 우회하는 경향이 있더라. 똑바로 말하겠다. 위험을 무릅쓰고, 정상 속의 고독을 감수하면서 살아라. 최소한 내 영화를 보면 이런 멋진 좌우명들이 연상될 거다.
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너무 피곤해서 이만 가봐야겠다.
알모도바르: 그런데 사진 플래시도 안 터뜨리고 그냥 가냐? 난 꽤 포토제닉한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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