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종 (을 오래전에) 봤습니다

2021.11.10 00:39

Sonny 조회 수: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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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배티님이 <랑종>을 보고 쓴 글을 보고 저도 이어서 써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호러 장르가 품은 근본적인 여성혐오를 영화 창작자가 어떻게 통제해야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되더군요. 아마 <랑종>은 창작자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호러장르라는 도구로 여성을 착취하고만 실패적 사례로 남을테니까요.


로이배티님이 보면서 찜찜한 기분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계속해서 주인공 밍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빙의라는 소재에서는 <엑소시스트>를, 초자연적인 현상과 파운드 푸티지에서는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카메라맨들마저 영화 속 캐릭터로서 괴존재의 공격에 희생당한다는 설정은 <블레어 위치>에서 아마 레퍼런스를 따왔을 것입니다. 세 작품 모두 다 여자주인공들을 계속해서 겁에 질리게하고 <엑소시스트>의 경우 직접적으로 신체를 훼손하고 통제권을 뺏어간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그걸 모두 혼합해서 영화 러닝타임 전체적으로 써먹고 있으니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엑소시스트>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소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이 이상현상을, 천주교 신부들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여성을 착취해서 생기는 공포라는 현상과, 그 공포를 어떻게든 극복하고 구원을 도모하는 신부들이 있었습니다. <엑소시스트>의 톤에는 그 어떤 웃음기나 쾌락적인 요소도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하고 무서운 일이며 하나의 닫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초현실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서 카라스 신부는 레건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악령을 빙의시켜 건물 바깥으로 몸을 내던집니다. 레건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영화적 변명만은 아니었다는 듯 스토리에서 자기희생을 통해 악령과의 싸움이 그래도 인간적이고 신실했다는 것을 증명하죠.


그런데 <랑종>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톤을 가져갑니다. 이 영화도 물론 밍의 빙의를 심각하고 문제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촬영 형태가 진지한 몰입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무당과 빙의된 사람이라는 일대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무당과 빙의된 사람을 찍는 카메라맨의 프레임을 이중으로 거쳐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관객은 하나의 세계를 목격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를 또 촬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를 봅니다. 그래서 훨씬 더 거리감이 생기고 이 영화의 내용을 '그래도 카메라맨이 투입되어서 관찰할 정도로는 괜찮은' 무엇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카메라맨들은 이 사태를 왜 촬영하나요. 밍이 경험하는 빙의현상이 신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카라스 신부나 랭스터 신부같은 사명감이 없습니다. 이거 정말 쫄리는데...? 하면서도 뭔가 큰 거 하나 건지겠다는 촬영의 수단으로 밍과 가족들을 간주하죠. 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촬영이 밍에게 진지한 몰입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즉 <랑종>에서 밍이 겪는 빙의는 이미 볼거리로 전락해있는 상태입니다. 그 감정의 종류가 뭐가 됐든 이미 엔터테이닝한 무엇인거죠.


그 거리감을 두고서, 영화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밍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을 착취적으로 찍어댑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밍이 귀신에 들린지 얼마 안됐을 때 그가 회사에서 벌이는 엽기행각입니다. 만약 이 작품이 진지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띄고, 밍의 인간적인 고통을 생각한다면 절대 내보내지 않을 장면을 보여줍니다. 밍이 외간 남자들을 회사에 끌어들여와서 섹스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죠. 이것이 뉴스나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해보세요. 실존인물의 성행위를 그렇게 내보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지. 그런 장면은 주변인들의 인터뷰로만 처리해도 충분하고, 혹은 제작자의 추가적인 자막으로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랑종>은 그걸 기어코 보여줍니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장면이 중요하니까요. 어떤 젊은 여자가, 외간 남자들을 회사에 끌여들어서 성행위를 했다는 그 장면 말이죠. 이것은 완벽한 관음입니다.


이 장면부터 우리는 이 영화의 문제적인 여성착취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빙의라는 것은 어느 악령이, 주인인 영혼이 거주하는 신체에 강제침입해서 강탈하는 현상입니다. 그 자체로도 이미 여성은 자신의 신체적인 통제권을 잃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악령은 여자라는 근거도 없으며 영화 후반부에 가면 수십 수백의 악령이 밍의 몸에 깃들어있다는 구체적 정보를 확인시켜줍니다. 한 여성의 신체가 수많은 다른 악령들에 의해 점령되고 약탈됩니다. 이 자체로도 이 영화의 설정은 충분히 문제적입니다. 이 영화는 절대적으로 희생되는 여자, 희롱되고 통제권을 뺏긴 여자의 신체가 있어야 성립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여성의 신체는 일종의 식민지에 가깝습니다. 


악령의 의지로 인해 그렇게 된 거 아니냐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건 감독이 만들어낸 상상의 조건이지 빙의를 한 여자가 어떤 행위들을 무조건적으로 한다는 자연법칙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여자가 귀신이 들렸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자가 어떤 남자들이랑 그렇게 성교를 하나요? 영화를 보는 우리는 빙의가 뭐고 빙의 이후의 법칙이 뭔지 하나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건 명쾌하게 밝혀진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밍이 회사에서 그렇게 성행위를 하는 장면은 빙의 자체나 악령의 존재보다 결국 그 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성별에 기대되는 바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여성이라면 이러면 안되는데, 여성이 이런 행위를 한다는 여성성의 인질극인거고 그 인질을 살해하는 거죠.


그러니까 밍의 빙의된 현상은 밍이라는 한 여성을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의학적으로 타락시키고 망가트리는 한 인간에 대한 파괴행위이기도 합니다. 신체적인 자율권을 잃어서 감금된 그를 보면 밍이라는 인간의 고통과 그 이후를 생각해보게 되지만 이 영화는 그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화 안의 카메라맨들이 빙의현상을 찾아내기 위한 보물섬으로 밍을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질릴 정도로 밍의 이상행위들과 망가지는 모습들을 계속해서 카메라에 담고 보여줍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여성의 공포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 매개체가 결국 집이라는 공간과 거기에 놓인 문이나 침대보 같은 하나의 사물이었다는 걸 생각해보세요. <랑종>은 그걸 아예 여성의 몸으로 정해놓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귀신이 있어! 봐봐 이 여자의 팔이 정상이 아냐! 이 여자가 뭘 계속 토해내고 있어! <랑종>은 나홍진이 <곡성>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인체실험을 여성대상으로 마음껏 해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밍이라는 인격체를 이상현상의 중추로만 보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다른 장르영화에서라면 후반부에나 몰아서 나올 장면들이 중반부터 연속해서 나옵니다. 밍은 점점 자아를 잃고 마침내 기어다니는 존재로 변합니다. 그는 비밀리에 설치된 카메라들과 정면으로 조우하며 '이 여자가 이렇게 괴물이 되었다!'는 영화가 시킨 변신을 스케어점프까지 활용해가며 성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밍은 개를 잡아먹고 마침내 언니 부부의 갓난아기까지 해칩니다. 이 영화는 악령의 존재를 기이함과 불가해함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폭력적이고 잔인해졌다, 라는 한 여자의 반사회성을 극단적으로 부풀려가며 이야기하죠. 이게 이 영화와 <엑소시스트>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레건은 스파이더 워크나 방에서 떠오르고 목이 180도로 꺾이는 등 불가능을 가능케한다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랑종>은 어떤가요. 여자라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는, 여성의 사회성을 기본적인 전제로 깔아놓고 자기 자신을 포함해 사회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모습으로 악령을 증명하려 합니다. 애초에 기획의도가 이렇다보니까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소재가 무안해질 정도로 영화 속 인물들은 허술합니다. 귀신들린 가족이 있는데 그런 가족 옆에서 갓난아기를 키우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일까요.


그리고 마지막 무당의 의식장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빙의시키고 카메라맨들은 뜯어먹거나 죽여버리면서 영화 자체의 세계를 파괴해버리면서 자기 영화를 손수 부숴버립니다. 거기서 선량한 엄마는 불에 태워죽이고 다른 조력자들도 비참하게 죽여버리죠.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여성을 비명지르게 하면서 악령을 보여주려는 영화입니다. 여성을 고문하는 행위가 없으면 끔찍함도 없을 거라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신체적 고통을 통해 초자연현상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거듭해서 자극을 더해가며 마지막에는 모든 인간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사디즘으로 끝이 납니다. 호러가 인간 중에서도 신체적으로 궁지에 몰리기 쉬운 조건을 갖춘 여성의 안전을 인질로 잡는 장르라지만, 이 정도까지 인격체로서의 여성을 괴롭히기만 하는 장르물로서의 작품은 장르적 변명이 통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감독이 밍, 여성보다 악령, 남성으로서의 입장을 철저히 고수했다고만 생각합니다. 여성의 신체는 어디까지 약탈당할 수 있을지, 화형식까지 자행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쓴맛만 남았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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