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에 대한 기억

2019.03.15 21:26

진_ 조회 수:4288


진저리나는 환멸의 날들입니다. 

사실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계속 나오던 XX대 단톡방 사건. 불법촬영물. 약물강간. 디지털성폭력의 광범위한 유포. 죄의식없는 소비. 

매번 나오던 바로 그 성범죄들의 모습이 

이번에는 연예인 단톡방에서 터진 것이니까요. 

이 한국사회의 남성 문화가 폭력과 성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일상이 성범죄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어떻게 연예인 지구만 청정할 수 있겠어요. 


승리에 이어 줄줄이 나오는 성범죄자 연예인들. 

승리 외에는 다들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니다. (승리도 얼굴은 이번에 알았지요.)

예전에 다른 성범죄들이 발각되는 것을 볼때와 같은 기분으로 

치 떨리고 지긋지긋한 감각으로

이번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연예인이이니 전보다 좀더 시끄럽구나,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처벌받자, 

이건 확실한 죄고, 죄를 지으면 처벌받는다는 것을

인간으로서 염치도 죄의식도 없는, 세상에 널린 이토록 많은 X새끼들에게 인식시켰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하지만, 이 사건을 

'평범한 나와 달리 잘 나가던 어떤 놈의 몰락기' 정도로 소비하며 

낄낄대며 팝콘 집는 남자들이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어... 그런데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렸다는 식의 낄낄거림들이 보이는 거예요.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하다가, 갑자기 엇 놀랐습니다.  

- 먼지가 되어? 혹시 걔가 걔였나?


헐.. 맞더라구요.  이럴 수가. 


제가 정준영을 안 것은 슈스케가 이미 끝난 후였습니다.

'먼지가 되어'를 듣고 싶어서 유투브를 검색했다가 우연히 그 영상을 보았어요. 

신기했습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로 '한국 남자' 같지 않았어요. 


갓 스물? 열아홉? 여튼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다는 다른 참가자가 자기를 이끄는데 

'형' 행세 안 하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의 결정도 가르침도 잘 받아들이면서 경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동등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동료로 대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내가 아는 이십대 남자들 대부분 

남자들끼리 있을때 

나이에 따라 기이한 서열감각을 보이는데

이 참가자에게는 그게 안 보이는구나. 그 추한 나이주의가 안 느껴지니까 좋다...  


아,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자라다가 스무살 되기 직전에 한국에 왔다고. 

그래서 더욱 한국-남성 식의 서열 감각과 관계없는 느낌이 드나 보구나. 


물론 제가 본 건'먼지가 되어' 공연을 준비하는 짧은 영상클립이니 단편적인 인상이겠지요. 

실제 연습과정은 편집되어 방영된 것과 다를 수 있고요.


그렇지만 신선한 느낌이라 다른 영상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인터뷰 영상을 보았는데, 

팔의 문신에 대해 질문하니 

영화 '헤드윅'에 나온 문신이라고, 그 가수가 멋있어서 했다고 하더군요.

젠더를 넘어선 사랑을 의미하는 그 문양이요.

이상형을 물으니 김옥빈..이라고 하더라구요. 머리 짧고 오토바이 타고 그런 여자가 좋다고.

게다가 H.O.T의 꽤 열렬한 팬인데 심지어 문희준 팬인 거 같고...


그 쯤 되니까 재미있었어요. 이십대 중반의 한국 남자가 아니라 

2000년대 초반 신촌공원 등에 오던, 아니, 정확히는 괜히 한번 갈까말까 해보는

어색한 허세와 자아도취가 밉지 않게 뒤섞인 

십대 중반 레즈비언의 취향 같았거든요 


이 재미있는 친구가 지금은 뭐하고 있으려나.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해서 

검색을 더했지만

당시 딱히 음악활동을 하기보다는 예능만 나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저씨들 가득한 속에서 덩그러니 있는 듯한 예능을 보려다가 

영 재미없어서, 한 5초만에 껐던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평범해져 있구나. 좀 재미없어졌네, 라고 생각하고요. 


그래도 슈스케 '먼지가 되어 ' 영상이랑 인터뷰 영상은 

'얘 재미있지 않니'라며 친구에게 전송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세상에. 


몇해가 지나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전형적인 한국남성문화 식 성범죄의 주인공으로 다시 보다니.


물론 모르죠. 변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때 내 눈에 비친 가상의 이미지가 그런 것 뿐이었을지도. 



... 그런데, 다음과 같은 트윗을 보았습니다. 


"정준영 평소 성격이 민폐 끼치는걸 상당히 싫어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나는 상당히 익숙한 유형의 남성무리가 떠오름. 디지털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세대의 등장이며 디씨와 일베의 역사를 같이 한,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태어나, 6차교육과정으로 학교를 다닌 그 시기의 남성무리."


"윤리적 기준이 상당히 모순적인 무리들. 그들의 특징은 민폐끼치는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어떤 사안에서 칼같은 중립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속에서의 여성성은 상당히 왜곡되어있음. 한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냥 일베충으로 퉁쳤는데 이게 일베만의 성향은 아니다."


"예를들어서 지하철에 화장을 고치는 행위를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사회질서를 해치는 행위로 지정하고, 그 사람을 몰래 찍어서 올리고 공유하며 각종 성기 비속어로 욕하는 행위는 당연한것으로 혹은 정당한것으로여긴다."


"그 또래집단 혹은 인터넷 커뮤내에서 행해지는 발언이나 행동들은 아주 상상이상의 극악한 경우가 많지만 그들은 실제 사회 생활에서는 칼같이 - 기계적으로 민폐로 여겨지는 행위들을 피하며 그들의 도덕적 위치를 유지한다. 그들은 그 행위를 지칭하고 계속해서 혐오를 만들어내는 위치로 남는다."


"암튼 좀 길어졌는데 그들에겐 민폐와 재미 라는 두가지 큰 가치판단의 기준이 있는것 같음. 그 안에 여성은 민폐를 일으키는 대상=욕먹고 혼나야 하는 대상 이고 그들에게 여성은 오로지 얼굴과 질과 자궁으로 이루어져있음."


"남자친구가 바른 생활을 칼같이 하려고 하며, 지나가는 여성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비난하고 자신에게도 계속 강요하고, 실수에도 트집을 잡으면서 행동을 수정하라며 강요한다면(했다면) 당신의 몰카가 이미 하드에 있을 수도 있음. 그안에서 섹스동영상 찍고 몰래 사진 찍는것은 평범한 수준의 재미임"


"예로 그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비틀어서 90년생 김지훈 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것을 듣고 이 남성무리를 떠올렸었음. 그 90년생으로 일컬어지는 나이대가 딱 지금 이슈의 연예인들의 나이대와 완전히 일치하고 그들의 더러운 삶이 그 무리를 거울처럼 보여줌."

(출처: @klasse_supre)


여러 가지 맥락에서 무척 동의되는 트윗이었습니다. 


다만, 정준영은 한국에서 6차교육과정으로 학교를 다니진 않았을텐데. 싶었지요.

역시나 한국에선 어떤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서, 영국, 프랑스, 중국, 필리핀... 여기저기에서 살았다고.


그런데 귀국 후에 그렇게 쉽게, 빨리,

또래 한국 남자들의 끔찍한 문화에 확 흡수되어 갔구나, 싶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보니까 슈스케는 7년전이더라구요. 


 정준영 슈스케 때 미모 리즈,, | 인스티즈 

오토바이 타는 여자가 좋다 하고

헤드윅 문신을 하고 패티큐어 바른 발로 돌아다니던 사람이 



정준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가지고 놀기 좋은' '착하고 예쁜 어린 여자'를 찾는 

일베식 성범죄자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인 거겠지요. 



이후 매우 엄중한 판결이 나오길 기다립니다. 

'정준영 동영상' 따위를 실검 1위로 만드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줄만큼요.

그래서 피해자들이 줄어들 수 있기를.

인간이 인간다운 존엄을 유지하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정말... 환멸이 납니다. 

 



덧/  특정한 개인을 악마화하는 관점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인의 잘못을 경감하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 

악마화하지 않으면 개인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요.  

자신이 끼친 해악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당연하디 당연한 문장을... 정말 굳이 또 써야 한다는 것인가...)    


'쟤네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이상한 쓰레기들이다..?' 라는 시선은 위선에 가깝지 않을까요.

당장 대학 익게에 가도 , 더럽긴 해도 사실 별거 아닌 대화이지 않냐,는 글들이 보이는데,

지금 여기 한국남성사회에 저런 단톡방이 얼마나 많을까 싶은데.


'정준영 동영상'을 실검 1위로 만드는 이들의 세상인데. 

그걸 검색하고, 그걸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승리와 정준영 단톡방에서 영상을 받아보던 범죄자들과 

정확히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건데. 



덧2/ 정준영이 맑고 깨끗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는 글이 아닙니다.   

정준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기껏해야 합쳐서 30여분 간의 영상을 본 것 뿐인데.


그때 본 영상 속의 그에게서는 '한국의 20대 남자들'이 가질 법한 특징이 보이지 않아서 신선했으나  

지금의 그는 저 트윗에서 언급한 것처럼 

'디지털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세대의 등장이며 디씨와 일베의 역사를 같이 한,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태어나, 6차교육과정으로 학교를 다닌 그 시기의 남성무리 '가 가질법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받았던 인상처럼

'2000년대 초반 신촌공원 주변을 애매한 포즈로 헤매던 십대 여성 이반' 들이 할법한 쓰레기 짓을 했다면 놀라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다른 종류의 쓰레기가 되었으니까 요. 


애초에 그는 비-한국남성 식의 쓰레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필리핀 식의 쓰레기였을 수도, 프랑스 식의 쓰레기였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제 글과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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