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는 사마라 위빙이 나오는 '오 헐리우드'를 보려다가... 그만 또 듀게에서 오직 저만 걸리는 그 넷플릭스 오류에 걸려버려서. ㅠㅜ 어떡하나... 하다가 며칠 전 '바바둑' 글에서 추천받았던 게 생각나서 틀어봤네요. ㅋㅋ 늘 그렇듯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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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는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시국의 테헤란입니다. 주인공인 '시데'는 의사 남편과 귀여운 딸래미 하나와 함께 사는 전업 주부구요. 사실 이 양반도 의대를 다녔지만 문화 혁명 때문에, 그리고 결혼과 출산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어요. 이제 애도 좀 키워놨겠다... 하고 다시 대학을 다녀보려 하지만 학창 시절 좌파 운동 경력 때문에 학교에서 안 받아주네요. 억울함과 상실감에 집에서 남편과 애한테 짜증을 부리는 가운데 테헤란 시내까지 미사일이 날아오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남편은 정부의 부름을 받고 교전 지역으로 파견을 가게 됩니다. 고로 집에 딸과 둘만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딸이 귀신(영화 속에선 '진'이라고 부릅니다)이 보인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데...



 - 좀 당황스러운 영화입니다. 런닝타임이 83분 밖에 안 되는데 (엔드 크레딧은 꽤 짧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동안 '호러 영화' 스러운 장면이 한 번도 안 나와요. ㅋㅋ 대신 그 시간 동안 영화가 보여주는 건 전쟁과, 80년대 이란의 서양물 든 인텔리 여성의 고단한 삶입니다. 억울한 이유로 자아실현도 막혀 있고. 남편은... 현실적, 시대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괜찮은 축에 속하지 않나 싶지만 그래도 사고 방식이나 행동들이 아내에게 어느 정도 족쇄로 작용하는 건 어쩔 수가 없구요. 같은 건물에 사는 주민들도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지만 다 그냥 '전통적인' 그 동네 사람들이라 주인공은 맘 편히 속 마음을 털어 놓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이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사회적 제약이야 말할 것도 없겠고, 거기에다가 전쟁 시국에 홀로 딸을 돌보고 지켜야 하는 미션까지 뚝 떨어져 있으니 갑갑하고 암담하기가 그지 없겠죠.


 영화의 내용도 계속해서 이런 답답한 현실을 바탕으로 전개가 됩니다. 딸에 눈에 보인다는 귀신 얘기는 거의 막판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냥 포인트를 주는 토핑 정도의 비중이구요. 사실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나름 임팩트 있는 귀신 장면들을 실컷 보고난 후에도 역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잘 만든 사회 고발물이구나. 근데 호러네? 뭐 이런 느낌. ㅋㅋㅋ



 - 그런데 귀신이 그렇게 많이, 자주 안 나와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전쟁 상황이잖아요. 주인공이 사는 집 건물 밖을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는 이야기이고 크게 자극적인 사건도 막판까지 몇 번 안 일어나지만 그래도 전쟁과 그로 인한 긴장 & 공포 분위기가 충분히 와닿도록 잘 조성이 되어 있어서 특별히 늘어지거나 지루해지는 구간은 없습니다. 

 ...라고 저는 느꼈지만 사실 보기에 따라 좀 지루할 수도 있어요. ㅋㅋㅋ 정말로 무슨 그리 큰 사건은 안 벌어지거든요. 이에 비하면 '바바둑'은 거의 롤러코스터 유령의 집 체험 수준이랄까... 뭐 그렇습니다. 아마도 주인공의 처지에 대한 몰입 수준에 따라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 그리고 그 주인공의 캐릭터가 좀 흥미로웠습니다. 되게 공들여서 만든 티가 나요.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게 딸과의 관계에요. 이게 결국 엄마랑 딸이랑 으쌰으쌰 고생하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영화 속 좋은 엄마'와는 거리가 멀거든요. 의대 복귀가 망한 후 아무 죄 없는 딸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딸이 이것저것 이야기할 때도 그렇게 진심으로 들어주려 하지도 않구요. 뭔가 해먹이는 걸 봐도 되게 대충이라서 정이 갔... (쿨럭;) 그리고 딸 역시 이런 영화들에 나오는 흔한 딸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요. 엄청 귀엽고 착하지도 않고, 무조건 이상한 짓하면서 속 썩이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효율적으로 주인공을 괴롭히(...)는데 뭔가 감독 내지는 작가의 경험담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남편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러저러해서 결국 남편이 주인공을 억압하는 존재가 된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무려 80년대에다가 사는 동네까지 감안하면 상당히 괜찮은 남편 아닌가 싶거든요. ㅋㅋ 그런데 둘의 다툼 장면들을 보면 거의 일방적으로 주인공이 시비를 거는 식이고 남편은 참으면서 받아주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그래요.

 그리고 그 와중에 몸매 관리 비디오 테이프에 집착하고, 자아 실현과 딸의 안전 사이에서 진지하게 갈등한다든가, 별로 정의롭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선택을 자꾸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멋진 주인공'과는 거리를 유지하지만, 그럼으로 인해서 훨씬 더 주인공의 심정에 몰입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왜냐면 뭐, 원래 우리 다들 그러고 살잖아요. 

 얼른 게임하고 싶은데 애들이 안 자면 성질 나잖아요. 퇴근하고 잠깐 쉬려는데 달라붙어서 놀아달라고 하면 어떻게 떼어낼까 하는 고민부터 하게 되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쟈들을 안 사랑하는 건 아니고.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ㅋㅋㅋ

 암튼 제 입장에선 뭔가 되게 납득이 가는 캐릭터였고 그래서 주인공에게 꽤 몰입이 됐습니다. 덕택에 재밌게 봤어요.



 - 호러에 대해서는... 뭐라 해야할까요.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막 자극적으로 무섭게 만들려는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cg가 필요할 장면도 거의 없구요. 특별히 창의적인 장면도 없다시피 하면서 전형적인 트릭들이 대부분이지만 리듬감이 꽤 좋아서 제겐 종종 먹혔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이 ('바바둑'의 그 엄마와 마찬가지로) 딱히 그리 믿음직한 인물이 아니다 보니 더 긴장이 되는 것도 있더라구요. ㅋㅋ



 - 대충 정리하겠습니다.

 호흡이 느릿느릿하고 분위기가 좀 독특한 호러 영화입니다. 특정 국가의 특정 역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영화이기도 하구요.

 일단 그 독특함 면에서 제겐 점수를 많이 땄고 또 주인공에 대한 몰입도, 심심한 듯 적절한 호러 효과들까지 해서 전체적으로 만족스럽게 봤네요.

 저는 '추천합니다'라고 적고 싶습니다만. 인터넷을 뒤져서 구경한 사람들 반응을 보니 일단 그 말은 넣어둬야할 것 같구요. ㅋㅋㅋㅋ

 그래도 음... 뭘 기대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잘 만든 영화라는 것 만큼은 분명한 것 같아요. 특히 '여성'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 보실만 합니다. 심지어 호러를 싫어하셔도 볼만할 거에요. 신체 손상 같은 것도 전혀 없고 뭐 '불쾌한' 장면은 없는 영화라서요.

 




 + 우리의 주인공 '시데' 님께선 희한하게 유령을 보기만 하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유령을 막 쫓아갑니다. ㅋㅋㅋㅋㅋ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게 몇 번 반복되니 웃기더라구요. 엄마의 사랑... 때문에 그러는 상황도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단 쫓아갑니다. ㅋㅋ 멋진 여성!


 + 음? 근데 다 보고 나서 검색을 해 보니 감독이 남자네요? 각본도 직접 썼네요?? 아... 뭔가 좀 서프라이즌데요. 당연히 여성 감독의 영화이고 여성들이 써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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