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아침에 어느 독자분이,

내가 너네 책을 샀는데 파본이더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시며 매우 불쾌해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거듭 송구하다고 사과드리며 구입한 서점에서 교환해 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내내 불쾌하다는 어조였어요.

아아 정말이지 죄송하더군요.

 

파본은 전적으로 출판사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변명을 하자면, 얼마간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어요.

송구한 김에,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말로 하면 금방인데 글로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일단 샘플 구경. 아래는 젤라즈니의 <별을 쫓는 자>입니다.


세 번째 사진에서 보다시피 오른쪽 페이지는 정상인데,

왼쪽 페이지는 거꾸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파본이죠.

마지막에 확대한 사진의 페이지를 보면 아시겠지만

첫 장부터 16페이지까지가 거꾸로 제본되어 있습니다.

17페이지부터는 정상이지요.

'1페이지부터 16페이지까지'라는 부분을 눈여겨 봐주세요.

 (대개 16페이지나 32페이지씩 거꾸로 인쇄되지, 한두 장이 거꾸로 인쇄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간혹 이런 책을 받는 경우가 있지요.

독자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간혹 굉장히 불쾌해하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대관절 왜 이런 책이 만들어지는가. 
여러분은 혹시 모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4의 배수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셨다면 지금 아무 책이나 펼쳐 보세요.

마지막 페이지가 4로 나누어 떨어질 겁니다.

그 이유는 인쇄 전 필름의 출력 방식 때문입니다.

필름을 직접 보면 이해가 좀 더 빠를 테지요.

아래는 덴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 필름입니다.

열여섯 페이지가 한 장의 필름에 출력됩니다.

  


가령 160페이지짜리 단행본이라면,

열여섯 페이지가 인쇄된 필름 10장으로 이루어지는 거죠.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본문 내용이 158페이지나 159페이지에서 끝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경우 글자를 키우거나 줄간을 늘이는 식으로 편집하여

페이지를 160페이지로 맞춥니다.

혹은 남는 페이지에 자사 책 광고를 넣기도 하고요. 

빈 페이지(白 페이지)로 남겨두는 책도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저희는 빈 페이지로 끝내기도 싫고

책의 완결성을 위해 광고를 넣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이스터에그를 만들었습니다(북스피어 이스터에그의 탄생 배경이지요).

아래는 <마술은 속삭인다>의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여기서 잠깐

북스피어의 이스터에그란?

http://www.booksfear.com/191 )

 

하지만 한두 페이지를 늘이거나 줄이는 게 아니라 

다섯 페이지나 열 페이지 정도를 늘이거나 줄여야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16을 기준으로 맞추는 게 아니라,

8이나 4를 기준으로 맞추게 됩니다.

즉, 16페이지짜리 필름에 8페이지를 두 번 찍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똑같은 사진이 두 번,

똑같은 판권이 두 번 들어가 있지요?

이를 돌려찍기, 혹은 돈땡이라고 합니다.

얘기가 잠깐 옆으로 빠져 버렸는데,

여튼, 이렇게 출력된 필름을 인쇄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물이 나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한 묶음씩을 '한 대'라고 합니다.

첫 대는 1~16페이지,

두 번째 대는 17~32페이지,

세 번째 대는 33~48페이지,

네 번째 대는 49~64페이지...

이렇게 16페이지씩 접지가 되는 거지요.

신간을 3,000부 찍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인쇄소에는 1~16페이지까지 접지된 인쇄물이 3,000개,

그다음 17~32페이지까지 접지된 인쇄물이 또 3,000개 하는 식으로 쭉 쌓입니다.

이 인쇄물들을 하나씩 빼서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거지요.

문제는 여기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인쇄물들을 하나씩 빼서' 하는 부분을

사람이 직접 수작업으로 하거든요.

 

가령 아래 사진을 보시면,


이렇게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지나가는 접지물을 하나씩 빼서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와중에 접지물이 섞이기도 하고 떨어졌다가 다시 벨트에 올려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한 번 제작할 때 책을 2,000부나 3,000부가량 만들다 보니

그중 한두 권은 접지물이 거꾸로 들어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이게 무슨 책인가' 싶어 접지물 하나를 집어들었다가

반대로 내려놓는 바람에 파본이 생기기도 합니다.

슬픈 귀결이지요ㅠㅠ.

 

흠, 가급적 전문용어 빼고 최대한 쉽게 한다고 하긴 했는데,

어떻게, 좀 이해가 가십니까. 

여튼, 이런 종류의 파본은 이삼천 권 가운데 한두 권일 확률이 높습니다. 

희귀하다는 얘기죠.

물론 원칙적으로는 모든 책의 제작이 끝났을 때

출판사(혹은 제본소)에서 직접 그 이삼천 권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검책'을 하는 게 맞습니다.

맞긴 맞는데... 출판사가 책을 여러 종 만들다 보니, 

매번 몇천 권이나 되는 책을 일일이 넘겨서 살펴볼 수가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출판사가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노파심에서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러니까 독자 니들이 그냥 넘어가라, 읽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러냐

...는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책을 잘못 만들었으니 출판사야 욕을 먹어 마땅하지요. 
다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 라는 변명이었습니다ㅠㅠ.

 

대신 파본 교환은,

책을 구입하신 서점에 요청하시면 신속하게 해 드립니다.

이상, 파본 사례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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