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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제도를 평등·공정·정의의 문제로만 따져보면 이렇다. 수학능력시험 점수에 따라 학생을 뽑는 정시는 과정이 공정하다고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다. 같은 시험문제를 풀고, 교사나 대학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고, 단순·자명하며 객관적이다. 그 정반대에 학종이 있다. 고교 교사와 대학 입학사정관의 판단이 당락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불공정한 무언가’가 작동하리라고 의심받기 쉽다. 줄 세우기 시험은 공정하고, 정성평가가 들어가면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은 한국에서 보편적이다. 사법시험이 로스쿨로 대체될 때도 비슷한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차이라면 줄 세우기 사법시험 폐지를 주도한 정치세력이 지금은 줄 세우기 수능을 옹호한다는 정도다.


정시는 과정의 공정성을 성취하는 대가로 결과의 정의에서 중요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여러 통계자료와 학술연구의 결론은 일관된다. 고소득층에게 가장 유리한 전형은 수능이다. 아래 <그림 1>은 국가장학금 자료를 이용해 대입 전형별 소득 분포를 추출한 결과다. 내신·학종·수능을 놓고 보면, 수능이 고소득층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국가장학금을 받는 학생 비율부터 차이가 난다. 국가장학금은 소득수준을 따져서 주기 때문에, 고소득층 자녀일수록 받을 가능성이 떨어진다. 내신 입학생 중 48.8%, 학종 입학생 중 45.3%, 수능 입학생 중 35.2%가 국가장학금을 받는다(<그림 2>). 


정시는 왜 수시보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효과가 더 큰가? 내신 시험은 원리상 같은 학교에서의 경쟁이다. 출발선이 비슷한 학생들이, 출발선에서 얼마나 더 멀리 갔는지를 놓고 평가받는다. 가난한 지역 학교에도 전교 1등은 나오게 마련이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효과는 줄어든다. 수능은 전국 단위 경쟁이다. 부모가 고소득자이고 교육환경이 좋은 동네에 살수록 유리하다. 또래집단의 경쟁 압력이 크고 역할모델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정의 공정을 대표하는 제도(수능)가 교육특구의 입장권을 살 부모의 능력에 좌우되는 한, 이 제도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정의롭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반대편 대안, 내신과 학종은 평등·공정·정의를 함께 보장하는가? 내신과 학종은 결과가 정시보다는 덜 불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신과 학종은 학생들이 훨씬 더 싫어하는 제도다. 고교 생활 3년 내내 입시를 치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대학입시가 인생에 갈림길이라는 인식이 있는 한 이 압력을 완화할 방법은 없다. 더욱이 학종은 교사의 권한을 크게 올리는데,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의 권력관계가 잘못 작동하면 학생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이것은 다른 차원의 불의다. 또, 어느 학교에서 어떤 교사를 만났는지에 따라 학생부 기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기회의 평등 관점에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출구가 없을까. 정치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이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책 <병목 사회>에서 피시킨은 ‘전사 사회’라는 비유를 든다. 일종의 원시 부족사회인 전사 사회에서, 좋은 직업은 오로지 전사 하나뿐이다. 전사가 되어야만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되는 해에 치르는 전사 시험은 공정하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공정할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회는 기회의 종류가 지나치게 제약되어 있다. 전사가 아닌 다른 재능은 쓸모없고, 아이들의 소망과 목표는 전사 하나로 강요된다. 완벽하게 공정한 시험이라 해도 전사의 자녀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원자들은 전사 시험에 과몰입하고, 시험의 가치를 기를 쓰고 긍정한다. 그게 유일한 통로라서다. 피시킨이 ‘병목’이라고 부르는 원리다.


이런 사회는 구조적으로 공정할 수 없다. 통과하는 병목 자체가 아무리 엄격하게 관리되더라도, 병목의 입구와 출구를 ‘공정’하게 만들 방법이 없어서다. 전사의 자녀를 부모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병목 입구에서 출발선을 통일시킬 수 없다. 전사의 자녀는 유전·가정교육·동기부여 모두 다른 아이들보다 유리하게 출발한다. 전사가 아니라 상인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는 쓸모없는 취급을 받을 것이므로 재능이 있어도 평가받을 수 없다. 출구가 고장 나 있는 것이다. 피시킨은 병목 자체만 보지 말고 입구와 출구를 모두 보아야 진정한 의미로 ‘공정’을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시험 몇 개로 삶의 경로가 결정 나는 나라는 현실에도 많다. 전사 사회의 현실판이다.


피시킨은 미국의 대학입시가 병목의 한 전형이라고 논하는데, 그가 한국의 입시를 알았다면 완벽한 사례로 가져갔을지 모른다.

이제 평등·공정·정의를 동시에 맞추는 큐브 퍼즐이 왜 어려운지 설명할 개념을 손에 쥐었다. 병목 구조가 있는 한, 병목의 입구와 병목 자체와 병목의 출구를 동시에 공정하도록 만들 방법은 없다. 출구를 정당하게 만들려면 병목 자체의 공정성을 훼손해야 한다. 병목의 공정성을 틀어쥘수록, 입구와 출구가 뒤틀린다. 피시킨은 유일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병목의 우회로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병목 속성 자체를 완화시켜야 한다. 즉,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다원성이 필요하다. 경쟁 규칙의 공정성이 아니라 경로 자체의 다원성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결과가 아니라 서열화되지 않는 다원적 결과가 필요하다. 


그 뒤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국공립대 네트워크, 고졸자 취업 문제 등등. 근데 정권을 누가 잡든 이런거 손댈 정부는 없을거 같으니 기대할건 없을거 같고요.

암튼 입시제도를 어떻게 고치든간에 구조자체를 뒤흔들지 않는한 바뀌는건 없다가 결론이죠. 수능위주 입시방법 확대는 그냥 세상 사람들에게 얼핏 공정해보인다는 느낌을 주기에만 유용할뿐이지 그 이외의 효과는 사실 없죠.

근데 세상일중에 그런식으로 결정되는것도 생각보다 흔하긴 하죠. 딱히 범죄경감효과가 있는것 같지도 않은 범죄자 신상 까기라든가, 사형제도 같은것들이 바로 그런 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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