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애의 온도를 이제사 보았습니다.

뭐 요즘 제가 보는 영화가 다 '이제사' 보는 영화들이니 이 표현이 좀 새삼스럽긴 하네요. 극장 가는 건 연례 행사이고 주로 방학때만, 그것도 집에서 뒹굴거리며 iptv 무료 영화의 자격을 획득한 것 우선으로 보거든요. 암튼 뭐.


당시에도 호평 받았던 영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뭔가 '봄날은 간다'의 직장 시트콤 버전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봄날은 간다는 예쁜 화면과 정적인 연출을, 이 영화는 스피디한 전개와 지뢰밭 유머 코드를 (주로) 내세우는 영화라서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핵심은 남녀 연애질의 시작과 종말에 대한 다큐멘터리(...)성 르포 영화니까요. 그리고 사실 상대적으로 진지하고 무겁게 흘러가는 후반부는 그냥 봄날은 간다와 비슷한 톤이기도 합니다.


현실성 따위는 밥 말아 먹이고 그저 웃겨주느라 존재 하는 직장 동료들 마저도 나름 생명력 있는 인물들로 묘사해주는 디테일들이 좋았고.

또 경쾌 발랄하게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리듬감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김민희는 정말... 자기 밥값을 톡톡히 하는 '스타'의 아우라를 완벽하게 뽐내주더군요. 예쁘고 매력적이면서 연기도 잘 합니다.

그래서 보는 내내 아쉬운(?)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암튼 로맨스와 코미디 중 둘 중 하나라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챙겨 보실만한 영홥니다. 정말 재밌게 봤네요.



2.

연애의 온도를 보고 영화가 참 맘에 들어서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를 찾아봤더니 딱 하나만 나오더군요. '특종: 량첸살인기'요.

vod를 틀 때마다 튀어나와 '야! 너두 할 수 있어~' 라고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하는 조정석이 주인공이라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봤습니다.


일단 감독의 유머 감각이 되게 맘에 들었습니다.

연애의 온도나 이 영화나 전반부는 코믹함에 방점을 찍고 경쾌하게 가다가 후반부에 궁서체로 진지하게 본인 장르에 충실하게 들어가는 스타일인데 개인적으론 두 영화 모두 전반부가 더 좋았어요. 두 편 다 감독이 각본도 직접 썼던데 코미디에 감각이 있으신 듯.

그런데 또 맘에 들었던 건 두 영화 모두 후반부의 궁서체 로맨스 & 스릴러 분량도 단단한 기본기로 평타 이상을 해주더라는 겁니다. 

사실 이 특종: 량첸살인기의 경우엔 후반부에 논리적 비약이나 허술한 구멍 같은 게 눈에 띄긴 합니다만. 그래도 에이 좀 더 잘 하지... 라는 정도로 덮어줄 수 있는 수준이면서 연출에 서스펜스가 충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검색해보니 별로다, 재미 없었다라는 평들이 많이 보이고 흥행도 망했던데. 저의 경험으론 한국산 스릴러 영화들 중에 이보다 잘 만든 영화가 그리 흔치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물론 제가 '염력'까지도 재밌게 보는 관대한 취향의 소유자이긴 합니다


아마 이루어질 일이 없을 망상이겠지만 어디의 돈 많은 누군가가 노덕 감독을 데려다가 돈을 막 쌓아주면서 직장 생활 시트콤 같은 걸 한 시즌 만들라고 강요해줬음 좋겠어요. 그럼 제가 되게 열심히 챙겨볼 텐데 말입니다. 흠...;



3.

잘 만들었지만 정말 잘 만들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들이 있죠.

예를 들어 '한공주'가 그랬고, 오늘 본 이 '살아 남은 아이'가 그랬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한공주보다 이 영화가 더 버티기 힘들었어요. 이렇게 우직하고 정직하게 관객 괴롭히는 영화도 흔치 않은데 정말... ㅋㅋ


굉장히 뻔한 비밀을 숨기고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숨기는 척 하는 영화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바로 그 비밀을 관객들이 이미 눈치채고 있어야지만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거든요.

...라고 말하니 이 부분도 한공주랑 좀 비슷하네요. 세상의 악의로 인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겪은 평범하지만 존경 받을만한 '좋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비슷하고 또 결말을 맺는 방식도 닮은 구석이 있구요.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영화이긴 하지만 듀나님 리뷰에 제가 생각했던 부분들이 훨씬 더 잘 정리되어 적혀 있길래 나머지 얘기들은 걍 리뷰 링크로 대신합니다.

http://www.djuna.kr/xe/review/13473916


다들 꼭 보세요.

보시고 저처럼 세상 우울해져주세요(...)


사족: 아빠 역할의 최무성씨가 왠지 되게 낯이 익은데... 익은데... 라고 생각하며 봤는데 검색해보니 바로 하루 전에 본 '연애의 온도'에 나와서 코믹한 캐릭터를 보여줬던 분이더군요. 거기서도 괜찮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연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4.

아이 캔 스피크는 감독과 주요 출연진이 모두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개봉 평도 좋길래 꼭 볼 영화로 찍어 놨다가...

뭐 암튼 이제야 봤네요.


음... 근데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치가 높아서 그랬... 다고 생각하기엔 후반이 그냥 많이 별로였어요.

이제훈 형제와 나문희 할머니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참 좋았고 국면 전환 부분 까지도 괜찮았는데.

클라이막스 부분의 전개는 나문희, 이제훈의 좋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너무 거칠게 직설적이어서 오히려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구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개그를 하나씩 심어 놓으며 관객들의 오골 게이지를 낮춰 보려는 시도들이 조금은 위안이 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클라이막스 부분은 좀 더 손을 봤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시작부터 그 직전까지는 참으로 좋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뒤가 더 아쉬웠다는 느낌이라서요.


그리고 음... 나문희 할매의 어린 시절 역할로 잠깐이나마 '우리들'의 주인공 배우가 등장해서 반가웠고.

또 친구의 어린 시절 역할로 나온 배우가 똘망똘망 참 귀엽다고 생각했었는데,



5.

그 배우가 또 아무 생각 없이 골라잡은 '어른도감'에서 주인공 역할이더라구요. ㅋㅋ 한국 영화판 참 좁아요.

근데 또 이 분이 너무나 연기를 잘 합니다. 심지어 예쁘고 귀엽구요. 도대체 요즘 아역들은 왜 이리 인재가 많은 겁니까.


엄마는 진작에 도망갔고 그나마 키워주던 아빠는 몇 년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버린 상황에서 청소년 시설에 끌려가기 싫은 중학생 아이가 어쩔 수 없이 범죄자 한량 양아치 삼촌을 보호자로 선택하게 되면서 인생 꼬이는 이야기입니다만. 어두컴컴한 영화는 아니에요. 어두컴컴으로 시작해서 시종일관 불안하고 암담한 사건들로 흘러가지만 어린이다움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당당하고 믿음직한 캐릭터를 잃지 않는 주인공 그리고 자신의 어마어마한 진상력을 멍청함으로 희석, 중화시키는 삼촌 캐릭터 덕에 초반만 넘기고 나면 비교적 마음 편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유머도 많구요.


잘 만든 저예산 독립 영화 특유의 '이건 참 좋지만 안 팔릴 것 같아'라는 느낌이 종종 느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기있는 캐릭터들과 센스 있는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좋은 연기 덕에 지루하지 않습니다. 재밌고 훈훈한, '살아남은 아이'를 본 후에 이어 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다만 절대로 순서를 꼭 지켜 주시길. ㅋㅋㅋ


암튼 이재인 배우의 앞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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