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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제일 보고 싶었던 영화였습니다. '언제 시간나면'이라는 약속이 흩어지는 건 사람 사이에서만 그런 게 아닌가 봅니다. 이 영화를 기다려는 왔지만 어쩐지 결심이 서진 않았습니다. 20여년만에 영화가 이렇게 재개봉을 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듭니다. 학창시절, 혹은 졸업 직후에 지켰어야 할 약속을 흰머리가 감춰지지 않는 나이의 동창회에서야 비로서 지키는 것 같아요.


한편으론 이 영화를 만난 것이 너무 이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마 그 때 이 영화를 봤다면 저는 이 영화의 쓴 맛에 당황만 하다가 극장을 나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여성, 인종, 학력, 장애인, 가부장제, 빈곤까지 주요한 인권 의제를 싸그리 담아놓았습니다. 누군가는 백델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하는 영화라고 하던데, 저는 이 영화가 그 정도가 아니고 어떤 영화제에도 출품과 수상이 가능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보니까 태희를 이해하지 어렸을 때 봤다면 저는 태희가 좀 이상하고 속없는 애라고 태희의 아버지처럼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포스터가 혹시 전략은 아닌지 고민했습니다. 포스터만 보면 '말괄량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투닥거리는 말랑말랑한 청춘드라마 같습니다.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라면서 도발적으로 써놓은 문구도 그렇구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다섯명의 사진촬영 시퀀스만 보면 그런 분위기가 맴돕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자, 이 풋풋함이 어떻게 팍팍함이 되고 어른으로서 우정을 성장시킬 것인지 보자 하고 있었죠. 사진촬영 시퀀스가 끝나자마자영화는 혜주네 집에서 부부싸움과 함께 창문 무숴지는 소리가 나오는 장면으로 이동합니다. 혜주는 굳은 표정을 하면서 출근합니다. 감독이 아예 첫 장면부터 못을 박아놓습니다. 이 영화 그런 영화 아니라고. 당신들이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청춘로맨스 같은 거 아니라고 안이한 기대를 박살내놓습니다. 지영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나오면 그 때부터 관객은 그의 얼굴에 왜 그렇게 구름이 드리워져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나중에는, 진짜로 집이 무너집니다. 베스킨라빈스의 슈팅스타 같은 맛일 줄 알았는데 영화가 담고 있는 혹한과 통증은 한입 깨물어먹을 아이스크림 같은 게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사회초년생들의 애환과 우정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계급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강합니다. 극중 초반부터 조금 재수없게 나오는 혜주의 그 태도는 '서울의 화이트칼라 직업인'으로 갖고 있는 자부심 때문이죠. 지영은 인천 판자촌에서 사는 (전) 블루칼라 직장인, 그리고 (현) 백수로서 그 "일반인"과 자신의 격차를 혜주가 후벼파는 말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달라지는 가치관이나 환경의 문제만은 아닌거죠. 혜주는 남자친구를 포함해 다른 친구들을 모두 조금씩 깔봅니다. 친구들은 학교라는 공통된 사회적 공간에서 나오자마자 계급의 격차에 부딪히며 자신들의 관계 또한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이 격차를 끊임없이 무마시키려는 태희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감독이 자신의 희망을 투영한 캐릭터이자 가장 많은 관객들이 닮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속한 가정의 경제력 수준을 보면 그는 지영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죠. 그렇다고 태희가 혜주처럼 계속 위를 바라보고, 아래는 깔아보면서 상승의 욕구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후에 진행되는 혜주의 스토리를 보면 이 말은 좀 어폐가 있죠)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가장 정확하게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자유"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심지어 고가도로에서 마주친 거지를 보고서도 그걸 자유로 해석합니다. 지영의 입장에 이입할 수 밖에 없는 관객은 태희의 그런 해석이 좀 철없이 들리지만, 태희는 후에 정말로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태희는 편견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서 외면받는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들을 꺼리거나 "다른 사람"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려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는 여자들은 못할 것 같은 어선타기를 도전해보려고도 합니다. 어쩌면 그가 거지를 보면서도 자유를 해석해내는 것은 거지로 평가받는 사람들에게서 고통과 동정을 먼저 찾아내는, 이른바 '상대적으로 더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맞춰 타인을 재단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가 늘 봉사를 하러 가던 주상의 집에서 주상과 끝내 화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니가 왜 그렇게 나한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 화 풀어." 그리고 태희는 주상의 집을 떠납니다. 아무리 곁에 있으려 해도 당사자의 분노는 결코 이해할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는 그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그건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이런 태도는 영화 전체적인 태도와도 결부됩니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혜주와 지영의 불편한 관계를 어떻게든 매듭맺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졸업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벌어진 혜주와 지영의 거리를 좁혀놓지 않습니다. 깨진 거울로 미래의 남자친구를 보려다가 집의 문이 닫혀서 밤 내내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혜주와 지영은 추위를 버틸려고 파놓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서도 계속 싸웁니다. 좋은 일자리 찾아준대니까 뭐하러 고집부리냐, 난 지금 하는 일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너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냐... 그리고 지영은 취조에 똑바로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년원에 가게 됩니다. 가장 힘들 때에 가장 멀어진 줄 알았던 친구가 등장하며 그 동안 쌓인 서운함이 눈녹듯 사라져버린다는 전개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영은 혜주의 문자메시지만을 받습니다. 영화 내에서 멀어진 이들은 다른 식으로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멀어지는 것은 멀어지는 대로, 각자의 삶을 초월하는 우정을 함부로 영화는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희와 지영은 아마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겠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이자 여자로서 또 다른 부조리와 가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것에 막막해하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든 나름의 경험을 하고 행복한 기억들을 쌓았으리라 믿습니다. 이 다섯명의 친구들이 모두 저마다의 삶에서 깨지고 금이 가도 과거의 기억과 미래를 향한 꿈으로 조금 더 단단한 개개인이 되어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 덧붙여야 할 것! 이 영화가 아무리 계급 격차를 다루는 시선에서 정말 대단한 점은 아무도 대학을 선택지로 놓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대학진학이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기준에서 이 영화는 아예 삐딱선을 탄 채로 영화를 시작하고 끝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청년'이란 단어를 4년제 대학 재학생/졸업생으로 놓고 있지는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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