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에 찰흙의 예를 들어 비유했듯이 그래요. 어렸을 때의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죠. 물론 그건 어른이 되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게 되지만, 적어도 어린 시기엔 뭐든지 될 수 있는 기분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거예요. 뭔가 큰 꿈을 가지고 한발짝 한발짝 다가가는 시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손에 못 넣었고 아무런 업적도 달성하지 못했어도, 온전히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죠. 


 뭐 나도 어렸던 시기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어요. 그저 꿈을 향해 아주 약간...한 걸음 나아간 날일 뿐인데도 그 날은 뭔가 벅찬 기분을 느끼며 잠들 수 있었죠.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무언가가 되어가는 나에 취해서 살 수 있었으니까 행복했죠. 돈도, 내게 굽신거리는 놈도 없었지만 행복할 수 있었던 거예요.

 


 2.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아무리 잠재력이 많아봤자 실제로 우리가 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거든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찰흙이 특정한 형태로 굳어버리듯이,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특정한 무언가의 형태로...그대로 굳어 버리고 마는 순간을 맞고야 만단 말이죠. 그리고 그게 어떤 형태이든 실제로 되어 보면 만족스럽지는 않을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 걸 선택할 수는 없어요. 조던 피터슨 말마따나 아무것도 되지 못한 어른은 끔찍하니까요. 그게 아무리 초라한 형상이더라도, 일정한 나이가 되었다면 무언가의 형상으로 자신을 굳혀내는 걸 해내야만 해요. 당신이 그나마 될 수 있는 모습중에 그나마 나은 어떤 모습을 선택해야만 하죠.


 그래요...내가 늘 말하듯이 인생은 끔찍한 거예요. 그게 어떤 인생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그래요. 아무것도 되고 있지 않은 어린 시절은 좋지만...시간이 지나면 뭐가 될지 골라야만 하거든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좆같은 선택과 덜 좆같은 선택...두가지뿐인 거예요. 어른이 되어버리면 뭐가 되든 결국 좆같은 거라고요. 무언가가 되어도 좆같고 아무것도 되지 못해도 좆같죠.



 3.왜냐면 무언가가 된다는 건 어떤 꿀을 빨지를 정하는 과정이 아니거든요. 무엇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을지 정하는 과정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점을 잘 모르고 고른단 말이예요. 자신이 선택하는 그게 어떤 짐인지,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짊어져야만 하는 짐인지...사람들 대부분은 모른 채로 집어들어요. 그것이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모른 채로 말이죠.


 어째서냐면 무언가가 된다는 건 대부분의 경우 책임을 수반하거든요. 책임...책임...매우 무서운 말이예요. 그야 남 생각을 안하는 소시오패스들은 귀찮아지면 그게 산산조각이 나든 말든 그냥 던져 버리겠죠. 하지만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들...다른 사람들의 신세를 안타까워하는 걸 우선하는 착한 사람들은 떠맡겨진 책임을 내려놓지도 던져 버리지도 못해요. 그걸 잘 모르고 집어들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집어들었다는 이유로 그냥 감수하며 살아가기도 하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깜깜한 밤길을 걷는 것과도 같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게 인생의 연속이죠. 순한 사람들은 그냥 감수하며 받아들이고 드센 사람들은 악다구니를 쓰겠죠. 하지만 어느 쪽이든...무지했던 시기의 선택에 인생 전체를 저당잡히는 건 무지에 대한 대가로서는 너무 가혹하단 말이죠.



 4.휴.



 5.그나마 직업 같은 건 비교적 나은 편이예요. 직업은 아무리 엿같아도 일을 하면 적어도 보상은 얻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 직업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만큼의 보상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요. 자본가들은 원래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할 수 있는 만큼 후려치는 놈들이니까요.


 하지만 결혼이라던가 육아라던가 하는 건 어떨까요? 남편이라던가 아버지가 되는 거 말이죠.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된다는 거 말이예요. 어떤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친구를 만들거나, 아내를 만들거나, 자식을 만들죠. 한데 남자의 인생이란 게 그렇거든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결정을 하는 순간, 그건 내려놓기 힘든 역할을 어깨 위에 올려놓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때로 매우 끔찍해질 수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책임감있는 착한 사람일수록...더더욱 끔찍해질 수 있죠. 착한 사람에게 있어 책임감이란 건 죽기 전에는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 되곤 하니까요.

 


 6.얼마전의 일이 생각나네요. 누군가가 내게 말했어요. 듀게에서 만났던 녀석인데 닉네임은 음...포마드라고 해 두죠. 어느날 포마드가 물었어요. 


 '탑클래스 대학을 나와서 탑클래스 대기업에 들어가 탑클래스 환경에서 근무하는 동창이 있는데 그 친구는 우울해 보이던걸! 이상해! 어째서지?'라는 의문이었어요. 그 동창은 괜찮은 여자와 결혼도 했고 연봉도 높다고 들었어요.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면 포마드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아웃풋을 내고 있는데도, 그 동창 친구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어째서일까? 라는 질문을 받았죠. 나는 그냥저냥 좋은 말들로 대화를 끝냈어요.


 하지만 사실은 이거죠. 저기에 언급된 동창이 가진 건 권력이 아니라 책임뿐이란 말이예요. 비교 대상들 사이에선 최상급의 스펙과 최상급의 인맥, 최상급의 소득을 달성하고 있겠지만 그는 어쨌든 일년 내내 일해야 하는 노동자인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고요. 그것은 유쾌한 일이 될 수만은 없는 일이겠죠.


 그야 그는 노동자인 것만은 아니예요. 포마드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는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주위 사람들이 그가 되길 바라는 것들을 골라서 몇 가지 면모를 더 갖추게 됐어요.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사위, 장래는 누군가의 아버지...이런 역할들 말이죠. 사회가 남자들에게 바라는 역할들이요.


 한데 문제는, 내가 보기에 그런 다양한 면모를 갖춰서 그가 얻는 건 책임뿐이란 말이예요. 거기에는 쥐꼬리만한 권력도 없어요. 아버지...남편...사위...글쎄요? 이딴 것들은 자신이 가진 리소스를 할애하고서도 아무런 생색도 낼 수 없는 역할뿐이잖아요.  


 

 7.그야 나는 그 포마드의 동창을 만나본 적도 없어요. 그냥 우울해한다는 묘사를 들었을 뿐이예요. 하지만 사회 경험이 없는 나조차도 알고 있거든요. 그런 대기업에서 중요한 기술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을 거라는 거요. 포마드의 동창은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며 경쟁에서 이겨왔는데, 폭군 짓 한번 못해보고 사회의 소모품으로 쓰여지기만 하는 인생...그런 인생이 되어가는 중이란 말이예요. 내 관점에선 말이죠.


 그야 그는 주위에 있는 놈들에게 이런 헛소리는 듣겠죠. '넌 증명했어! 네가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하는 남자라는 걸 넌 증명해낸 거야. 네가 자랑스러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증명하면서 살아!'뭐 이딴 정신나간 소리들 말이죠. 


 위에 썼듯이 나는 포마드의 동창에 대해 전혀 몰라요. 그러나 '이미 역할이 정해져버린' 그가 이 단계에서 행복해하는 대신 우울해한다는 말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매우 슬픈 기분이 들었어요. 그가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의 등짝에 올라탄 사람들만 혜택을 보는 거고 그는 남자로서-인간으로서가 아닌-얻는 게 없잖아요. 그리고 그가 기뻐하지 않고 우울해하는 중이라면 그건 심각한 거죠. 왜냐면 그 동창이 포마드의 나이정도라면, 앞으로 최소한 30년쯤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저렇게 뛰어야 하는 기간이 최소한 30년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우울해하고 있다면...?


 그건 가엾은 거잖아요! 하지만 이미 짐덩어리들은 그의 어깨 위에 올려져 버렸고, 그는 그 짐을 어깨에 싣고 뛰는 걸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게 되어버린 신세죠. 그는 그 짐덩어리들을 10년 후에 어깨에서 내려놓든 20년 후에 어깨에서 내려놓든 감사를 받기는커녕 욕먹을 거예요. 왜 끝까지 완주하지 않고 포기하냐고 말이죠.



 8.위에 인생의 돌부리 얘기를 했었죠. 깜깜한 시골길과도 같은 인생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보면 그때야 알게 되죠. 당신이 우습게 여기던 주위의 꼰대들이 경고해주려던 게 바로 이거였다는 걸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돌부리에 몇 번 걸려넘어져보면 당신도 꼰대가 될거예요. 착하지만 꼰대가 된 당신은, 당신을 우습게 여기는 어린 녀석들에게 그 돌부리의 존재를 경고해주려고 애를 쓰겠죠. 발밑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고 경고하겠지만 어린 녀석들은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을 보고 코웃음이나 칠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아직 뭐든지 될 수 있는 시기를 사는 녀석들 눈에는, 결국 무언가가 되어버린 녀석들이 한심해 보일 테니까요. 마음속으로 '넌 겨우 그것밖에 못 됐어? 난 너처럼 초라한 사람은 안될거야.'라고 비웃는 거죠.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어요. 그놈들이 나쁜 놈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무지하니까 그러는 거거든요. 아무것도 되어보지 않은 놈들은, 아주 초라한 어른이 되는 것조차도 힘든 일이라는 걸 모르니까요.



 9.뭐 전에는 내가 돈을 안좋아한다고 쓰긴 했지만, 그래도 내 일기를 읽어온 사람이라면 역시 돈에 집착하는 나를 이해해주겠죠? 늘 쓰듯이 나는 '무언가가 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무언가가 된다는 건 무언가가 되어서 꿀을 빠는 것에 비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더 무거운 법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무언가가 되는'것에 대해선 잘 쓰지 않아요. '무언가를 손에 넣는'것에 대해 줄곧 쓰죠.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무언가를 손에 넣는다면 돈밖에 없잖아요. 돈은 모든 교환가치의 정점에 있으니, 돈을 가지면 모든 걸 가지는 것과 같으니까요. 물론 돈이 모든 교환가치의 정점을 차지해버려서 괴물성마저 띄어버리게 된 게 내 탓은 아니고요.


 휴...체육관이 열 때까지 계속 쓰다 보니 꽤나 길어졌네요. 온몸이 쿡쿡 쑤셔서 도저히 잠을 못 자고 있었어요. 이따가 신도림 아니면 홍대 아니면 압구정로데오에서 고기 먹을 예정인데, 올려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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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어쨌든 나는 그래요. 내가 선택한 역할에서 얻고 싶은 건 권력이거든요. 더 달라고 땡깡을 피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적어도 책임만큼의 권력은 얻고 싶단 말이죠.


 그러려면 사실 선택지가 많지가 않아요. 그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매우 흐릿해야만 가능한 거거든요. 나는 땡깡피우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봤자 내게 땡깡피우는 놈들밖에 만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땡깡피우는 놈들을 하나하나 조져 놓는 것도 내겐 매우 귀찮은 일이고요.


 그래서 사실, 내가 원하는 것...책임만큼의 권력을 얻으며 살아가는 인생은 순수한 구매자로서의 인생밖에 없어요.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 구매자와 판매자로서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제일 온당하거든요. 그것만이 내가 손해를 입는 일도 없고 내가 손해를 끼치는 일도 없는 인생을 사는 법이니까요. 인간과 인간이 가까워져 봐야 엄청나게 구질구질해진단 걸 나는 늘 배우며(경험하며) 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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