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외로워서임

2018.12.28 20:53

흙파먹어요 조회 수:1400

상상을 해봅시다...


당신은 청운의 꿈을 안고 갓 서울로 상경한 스무 살의 남자아이입니다.

새학기가 시작하기 전, 일신을 기댈 방을 구하고자 이름도 낯선 합정동 일대를 떠돌고 있군요

이짓 저짓... 아, 아니, 이곳 저곳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늙은 수캐마냥 낯선 동네를 헤매고 다니던 그때...

두 눈을 의심케 하는 학원 간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축지법과 비행술>


왠지 그곳에는 한때 강호를 호령했던 도가의 고수가 은둔하여, 벌건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고

이런 설정에는 늘 그렇듯 그 일대를 씹어 드시는 미모의 외동딸이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무언가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 했을 운명의 소용돌이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좁은 계단을 올라간 당신

그러나 그곳에선 구멍 난 난닝구에 배가 나온 중년의 아저씨가 자장을 입에 묻힌 채 당신을 반기는 것입니다.


- 뉘..쇼?

- 저어... 여기가 축지..

- (반색을 하며) 아이고! 축지법 배우시게?!


각별히 구멍난 난닝구와 그의 입에 묻은 자장에 놀라서가 아닐지라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당신

저 멀리 통통통 소리를 내며 멀어져가는 새우잡이배와, 의뭉스러운 남자들이 당신을 둘러싼 채


- 간이 삼천, 심장이 팔천, 눈깔이 쌍으로 오천, 콩팥이 쌍으로 삼천... 보자, 계산기가 어딨나?


라고, 씨부리는 어둠의 현장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지만 왠지 죄송하다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며 황급히 계단을 뛰어 달아나는 당신의 뒷모습

머릿속에는 서울로 떠나기 전 소꿉친구 말자가 해준 말이 송송히 떠오르는 것입니다.


- 니 아나? 우리 오빠가 그라는데, 서울에는 별 이상한 개이새끼들이 천지삐가리라더만

- 맞나?

- 니 단디해라. 코가 베인다고 코가...

- 아~라따. 가시나 잔소리는... 니 내모르나?

- 알지! 걸베이


그리고 장면은 전환이 되어 심드렁 표정으로 헤어밴드를 하고 나타난, 

과연 그 일대를 씹어먹을만한 미모의 여인이 중년의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 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 아빠, 누구 왔다갔지?

- 응. 뭐 배우러 왔나 보던데 그냥 가네?

- 아빠, 그러길래 내가 옷 좀 잘 입고 있으라고 했지. 이게 뭐야 맨날... 그놈의 공중부양은 하면 뭘 해? 

- 내가 뭐? 이 옷이 뭐가 어때서? 뭐 태권도복이라도 사서 입고 있을까?

- 아 됐어 몰라, 짜증나. 내가 아빠 때문에 못 살아 진짜.. 

- 저게 저 아버지한테 말버릇하고! 딱 지 애미 닮아가지고 저게...


미모의 딸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거가고, 

카메라는 의자 없이 테이블 앞에 둥둥 떠서 자장면 그릇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중년을 비추는 겁니다.

맞습니다. 사실 그는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칩거해 들어간 후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설의 비급

땅을 비단처럼 주름잡고 허공을 징검다리처럼 답보하는 <풍월비결>의 계승자이자,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구년. 안중근 중장의 동지로, 거사 직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이토의 심장을 향해

탄지신공으로써 최후의 일격을 가했던 구한말 조선 최고이자 최후의 도사, 청송 이중환 선생의 손자였던 것이지요.


어려서 유학을 익히고, 학생시절 민주화 운동을 위해 일신을 바쳤으나,

외환위기와 함께 직장을 잃고, 주식으로 퇴직금을 대차게 말아잡순 뒤, 

대치동에서 대성공한 전처가 한때 살 부비고 살았던 인간이 불쌍해서 차려준 학원, 그 비슷한 것.

그곳에서 오로지 후학 양성... 은 모르겠고, 혼자서 장기두기, 혼자서 고스톱 치기 등으로 소일하고 있었던 겁니다.


몸이 허공에 뜬 지는 어언 이십여 년이나 형광등 갈 때나 편하고, 

축지법을 익혀 좋은 점이라면 버스비가 안 든다는 정도. 

그마저도 만취해 부렸다가 한강에 빠져 죽을뻔한 뒤,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딸에게 약속한 하나마나한 술법들

오오 그것은 고통, 그것은 인생...


- 하이고오... 내 인생도 참...


길게 한숨을 내쉰 중년은 그릇에 남아있던 단무지 하나를 집어 씹고는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헛헛한 마음으로 인터넷 뉴스를 클릭해보며 혀를 차던 그는 너무나 외로웠던 나머지...

악플을 다는 겁니다.




일찌기 딴지일보의 전 편집장 너부리는 말 했습니다.

괴이한 정치인들, 술에 꼴아 난장피는 진상들, 점순이나 수탉도 아니면서 눈만 뜨면 싸움거는 인간들

알고 보면 그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다 이해가 된다고.


외로워서 인증샷을 찍어 올리고, 외로워서 퇴근 후에 장문의 게시물을 올리고, 외로워서 댓글로 싸우고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 그간 듀게를 쭉 눈팅해 오며 저는 이곳에서 외로움의 석양을 보았습니다.

랜선을 타고 흐르는 애증의 말들, 가시돋힌 단어들, 정수리 머리털 소중한 걸 알면서도 나방처럼 또 다시 클릭하는

게시물들, 포효하는 댓글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 보아요. 다... 외로워서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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