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과의 재회

2019.04.11 08:33

흙파먹어요 조회 수:541

내일 저녁은 뭘 먹지가 아니라, 내일 저녁은 또 어떻게 먹지가 고민이었던 스무살에도 봄은 끈덕지게 찾아왔습니다.
장정일은 글을 빌려 스무살에 희망했던 소유의 목록이 타자기, 턴테이블, 그리고 뭉크의 화집이었노라 고백을 했는데,
제 스무살의 희망목록은 캐논 카메라, 필름을 현상할 몇 푼의 돈과, 아무 데나 틀어박혀 근심 없이 하루키를 읽을 시간이었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군대를 다녀오고도 아직 어리숙하기만 한 애들 뿐이었는데,
소설 속 와타나베와 나가사와는 벌써 한 사람의 어른이라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80년대에 이미 중년이었던 하루키의 우주 속 인물들이니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런 걸 계산하거나 의심할 생각은 발가락 하나만치도 침범할 수 없을 만큼 그 세계에 푹 젖어들 수 있었던 때이니까요.
스무살은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하여간 강력한 나이!

책의 네 귀퉁이 닳는 걸로도 모자라, 나중에는 낱장이 마구 떨어질 정도로. 가히 성경처럼,
그 책 노르웨이의 숲을 옆구리에 끼고서 저는 이십 대를 관통했습니다. 그 무렵 적잖은 홍대 앞의 아이들이 그러했듯이요.

그렇다면 햄릿의 대사를 읊듯 그들의 청춘을 읽고 또 읽었던 그때의 저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던걸까요?
책의 모양이 아직 반듯했을 때는 와타나베처럼 살고 싶었고,
책의 날개가 떨어져 나갔을 무렵에는 이 세상은 결국 나가사와 선배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스무 살에나, 서른 살에나, 지금이나 저는 와타나베도 나가사와도 아닌, 초지일관 돌격대였습니다.
그렇다고 돌격대의 생이 후지다는 건 아니지만...

여자도 마찬가지.
등장하는 세 여자 중 손을 잡고 싶은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스무 살에는 망설이지 않고 나오코였어요.
가녀리고, 왠지 긴 머리에 빨간 입술을 하고 있을 것 같으며 결정적으로 사연 있어 보이는.

그녀의 가는 손목을 꽉 부여잡고 반드시 내 힘으로 그녀를 깊은 우물로부터 끌어올려주고 싶었달까?
그 엄청난 보호본능 자극에 이끌렸던 건 그 나이에만 가능한 어마어마한 호르몬 분출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나오코의 어둠에 제가 빨려들어 가게 될까 겁이 나고, 

벚꽃처럼 환하게 웃다가 확 토라져버리는 미도리의 빠른 발걸음은 따라가다가 털썩 주저 앉게 되지 않을까 주저하게 됩니다.
그저 바람 부는 봄 밤에 쓴 맛 단 맛 다 봐버린 레이코와 한강에 나란히 앉아서 꼴꼴꼴꼴 소주나 따라 나 한 잔, 너 한 잔 하고 싶어요.

그간 겁나 고생하시었소 누이... 어깨 두들겨 주고, 꽉 끌어안아 주고, 같이 순댓국이나 먹으러 가는. 뭐 그런

최초로 촬영됐다는 블랙홀 사진을 보는데, 뭉클함이나 신기함 보다는 왠지 모를 반가움이 솟아나 베시시 웃었습니다.
마치, 와타나베도, 나오코도, 레이코도. 모두들 아예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곁에 두었기에 어느덧 한때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그래서 늘 막연히 그리운 이들이 되어버린 것처럼.
드라마 연애시대의 동진과 은호의 오늘이 궁금하고, 다시 보는 그들의 연애담이 지치지도 않고 반갑듯이.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너무 오랫동안 그 이름을 들어와서인지,
혹은 스크린에 거의 달라붙듯 침 흘리며 봤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았던 모습과 의외로 너무 많이 닮아 있어서인지.
희미하게 금반지 모습을 한 실제 블랙홀의 모양이, 긴 작별 후에 재회한 누이의 얼굴처럼 익숙하고 반가웠어요.

모든 걸 빨아들인다는 괴기스런 이야기도 이제 됐고,

저기 들어가면 가슴이 애리도록 보고 싶은 사람들과 재회하게 될 거라는 동화 같은 상상도 그만 됐고,

레이코와 그러고 싶은 것처럼 블랙홀이 사람이라면 봄바람 살랑거리는 한강에 나란히 앉아 

이제 슬슬 옷차림이 예뻐지는 아가씨들 구경이나 하면서 소주 한 잔 꼴꼴꼴꼴 따라 나 한 잔, 너 한 잔.

그리고 얘기를 하는 거지요


잘 있었어? 야 너 그대로다? 어떻게 알긴 인마. 그냥 아는 거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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