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2019.11.06 18:53

Sonny 조회 수:591


<벌새>에는 90년대의 작은 상징들이 보인다. 삐삐, 미치코 런던, 콜라텍, 청자켓 등.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단순한 복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소품들을 전시하고 소개하는, 추억여행의 컨셉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벌새>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현재를 비교하며 아날로그의 무언가를 더 강조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들은 90년대만의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다. 1994년 여름, 1994년 10월, 이라고 두번이나 스크린 상에서 시제를 명명하는 이 영화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식의 섣부른 노스탤지어야말로 현대의 우리가 손쉽게 빠지는 낭만의 함정이오 과거미화의 걸림돌이다. 이미 다 성장해버린 성인 세대가 지난 시절을 아름다웠노라 이야기할 때, 현재진행형으로 남은 가능성과 미래형의 희망은 구질구질한 "나 때" 속으로 삼켜지진 않는지.


<벌새>는 그리워하지 않는다. 회상과 복기는 전혀 다른 작업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더 정확히 할 것을 이야기한다. 미성년자 시절이 정말 꿈으로 가득차고 우정과 애정의 설렘으로 충만하기만 했냐고. 어떤 파편들을 따스하고 달콤하다. 어리니까 쉽게 채워지는 것들도 있었다. 경제활동에서 비롯되는 어른의 책무가 아직 없을 때니까 인생이 더 파릇파릇하고 무궁무진해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 자라지 못한 마음에 "처음"이라고 찾아오는 것들은 그만큼의 깊숙한 자욱을 남긴다. 첫키스만이 처음이 아니다. 첫이별, 첫버림, 첫배신, 첫무시. 처음을 붙인 단어로 우리는 첫사랑이나 첫경험만을 떠올리며 수줍어지지만, 아련하되 스산한 첫상처는 이상할 정도로 처음이라 이름붙이기 싫어한다. <벌새>는 처음 마주하는 것의 행복보다 그 처음이 깨질 때의 쓸쓸함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벌새>는 처음이라는 낭만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 때 그리도 좋고 아름다웠던 것은 아프고 쓰라렸다 말한다. 상처는, 그리움이 될 수 있는가. 과거를 과거로 최대한 명확히 바라보려 할 때,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되돌아보는가. 되돌아본 우리 앞에 과거가 다가와있는가.


어렸을 때가 좋았지. 공부만 하던 때가 좋았지. 어른이 아니면 단순한 행복 속에서만 살 거라는, 꼰대스러운 사고다. 이런 방식의 재단에 저항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연령의 권위주의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세상의 일방적인 기준으로 개인의 우주를 축소해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좋기만 했었나. 모든 상처가 처음으로 마음에 새겨지고 그 통증에 해매야 하는 시기가 정말 봄이고 여름이기만 할 수 있을까. 은희의 중2 시절은 "중2병"의 단순유치뽕짝 시절이 아니었다. 남자친구 지완의 연락이 갑자기 끊기고, 단짝친구 지숙과도 싸우고, 새로 고백해온 유리에게도 차이고, 엄마의 환영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사라진다. 어른이 되서 아픔을 비로서 배우게 되는 게 아니라, 어느 나이에나 처음 찾아오는 아픔들은 있다. 왜 이런 아픔들은 "성장통"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치유가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되고 어른의 이별과 상처만이 인정받는 것일까. 열네살도 아프다. 오히려 또렷하게 남아서 반짝거린다. 흘러가는 시간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 위를 타고 지나가면 여전히 시큰거리듯이.

특히나 <벌새>에서 은희가 잊을 수 없는 상처들이라면 가정폭력일 것이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으나, 너무 많이 당해서 이제는 일상처럼 여겨지는 아버지 혹은 오빠의 폭력을 <벌새>의 은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시간 지나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과거가 잔인함이라는 형태로는 남아있다. 가정폭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극단적으로 떠올리고 생사와 연관지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반복되는 뻔뻔한 폭력들은 분명히 열 네살의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은희는 웃는 것보다 무겁고 재미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더 많은 아이다. 왜일까. 왜 어리고 걱정도 없을 아이가, 감히 세상의 고뇌를 짊어진듯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학교는 재미없지만 집은 더 따분하고 때때로는 아파서 고역인 공간이다. 달리 갈 데도 낼 시간도 없는 이 존재에게 뻑하면 때리고 소리지르는 남자의 존재들이, 한 때의 해프닝이자 나중에 잊고 용서할 사건으로 지나쳐갈 수 있을까. 지숙은 오빠에게 맞아 터진 입을 마스크 밖으로 보여준다. 그런 지숙을 보며 은희는 이야기한다. 자살하고 유서 남기는 상상을 정말 많이 한다고. 하지만 오빠 새끼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루만 유령으로 남아서 다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떡볶이 아니면 남자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 은희와 지숙, 중학생 여자아이들은 손찌검에 아주 쉽게 흔들리는 우주를 지탱해가며 증오와 원한을 눈썹 사이에 담고 다녔다. 


어리니까, 모든 게 처음이니까 그렇게나 명확했다. 노을의 불안과 서러움을 진즉에 깨달은 나이였다. 의사의 지나가는 경고에 생사를 걸어야했고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사람들의 흔적을 담벼락에서 발견하며 걸어다녔다. 벌새는 어떻게 날아다니는가. 그 작고 파르르 떠는 날개짓은 비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추락하지 않기 위함이라고들 받아들인다. 작고 어릴 수록, 일상으로 돌아와 "언젠가"를 꿈꾸기 위해 더 많은 날개짓을 한다. 아무리 모르고 하는 날개짓이어도 고되지 않을 리가 없고 쉴 때도 다음의 도약을 다시 준비해야 한다. 늘 느닷없이 찾아오는 끝이라는 분기점 앞에서 벌새는 다시 끊어진 선과 선 사이를 활강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열 네살의 은희는 몇번이고 끊기는 인연과 행복 속에서도 다시 한번 날개짓을 한다. 무너져버린 다리를 보며, 그는 결연한 얼굴을 지었다. 그게 이 영화가 가리키는 총체적인 과거의 모습이자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시기를 견뎌낸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노란색 베네통 가방을 메고 학교와 병원과 학원과 어느 건물 옥상을 날아다녔던, 은희의 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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