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기...(학벌)

2020.06.29 02:33

안유미 조회 수:530


 1.요즘은 학벌이 의미없다고 말하곤 하죠. 대충 맞는 말 같아요. 사람들이 거기서 말하는 학교란 곳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넘어가기 위한 수단...징검다리 같은 곳이니까요. 



 2.하지만 이런저런 면을 따져보면 괜찮은 학벌은 좋은 점도 있어요. 사실 이미 가게를 차렸거나 일을 시작했다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보다 그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가 중요하겠죠. 학연이나 학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업종만 아니면요.



 3.그렇기 때문에 학벌이란 건 인생이 목표대로 잘 되었을 때보다 오히려 인생이 잘 안 풀리고 꼬이고 있을 때 좋게 작용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도쿄대를 나왔다고 쳐요. 이미 어딘가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거나 가게를 차렸다면? 그 사람이 도쿄대라는 사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흐릿해지겠죠.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거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내는 지원서나 서류마다 다 패스하지 못하고 계속 취업준비를 하며 살게 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도쿄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30대 중반까지는 계속 강하게 남아 있는 거예요. 물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XX대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는 거긴 하지만...그래도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사실은 그의 계속된 실패를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봐주게 만들죠. 사람들은 '그래도 명문대 졸업생인데...뭐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명문대 졸업생이니까 아무 데나 취직하기 싫어서 저런 거겠지.'정도로 봐 주니까요.


 별로 안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대학을 못 나왔는데 30대 중반에 취업준비생이면 사람들은 거기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하거든요. '하여간 잡대를 나왔으니까 30대 중반까지 꼬이고 있는 거지. 쯧쯧.'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죠. 



 4.휴.



 5.사람들 말이 대체로 맞아요. 좋은 학벌 하나가 이제 무언가를 보장해 주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좋은 학벌은 오히려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있을 때 괜찮은 방패가 되어 주는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좋은 학벌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백수로 살기로 작정하면 또 좋은 학벌이 필요하기도 해요. 



 6.왜냐면 학벌 따윈 아무 상관없는 곳...이를테면 술집을 가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꼭 물어보곤 하거든요. 그리고 거기서 학교 이름을 말하면 '오오...의외로 공부 잘했잖아!'라던가 '와 불성실한 놈인 줄 알았는데.'라면서 뭔가 시선이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죠. 그럴 때마다 '이거 오히려 좋은 학벌은 백수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곤 하죠.


 사실 내가 나온 학교가 그리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그건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 사이에서나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오오오'하는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요. 



 7.위에서 굳이 도쿄대를 예로 든 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겠네요. 서울대나 하버드대나 칭화대 같은 곳이 아니라 도쿄대를 예로 든 건 그런 일이 있어서예요. 


 왜냐하면 나만 해도 그렇거든요. 30대 중반인데 백수인 남자사람이 만나자고 하면 웬만해선 안 만나요. 내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하지만 30대 중반이고 백수이고 남자인데 그래도 도쿄대라면 이 녀석 뭔가 있겠거니 싶어서 주섬주섬 만나러 가게 되는 거죠. 그 '도쿄대'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써보죠.



 8.뭐 남자들은 그래요. 친구 사이가 아니라 친구의 친구 얘기가 나올 때는 대개 그가 달성한 직업이나 브랜드를 골라서 부르죠. 변호사가 된 친구의 친구를 말할 땐 '그 변호사 뭐해?'라고 말하고 치과의사가 된 친구의 친구를 말할 땐 '그 치과의사 요즘 뭐해?'라고 물어보는 법이예요. 서울대를 나왔는데 아직 이룬 게 없는 친구의 친구를 말할 땐 '그 서울대 요즘 어때?'라고 물어보고요.


 왜냐면 여자들 세계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남자는 그렇거든요. 그의 인격이나 개성보다는 그가 무엇을 얼마나 달성했는지가 중요한 거니까요. 그리고 그가 달성한 것이 그저 그의 job일 뿐인지, 아니면 brand라고 인정해 줄 만한 것인지가 중요하고요.


 작년 7월 1일 일기에 썼던 '바가지머리'도 그래요. 나는 아직도 이 녀석을 '카이스트'라고 부르거든요. 카이스트를 나왔으니까요. 서울대나 카이스트 같은 학교는, 그 사람이 다음 브랜드를 걸치지 못한 유예 기간동안은 그의 브랜드가 되어준다고 생각해요. 물론 학교 이름이 그의 브랜드가 되어주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는 건 좋지 않겠지만요. 


 

 9.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나버리면...그때가 됐는데도 괜찮은 브랜드를 걸치지 못한 상태라면 나는 그들을 '도쿄대'라거나 '카이스트'라고 부르지 않게 되겠죠.


 왜냐면 다음 번 브랜드를 얻어냈어야 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상대를 학교 이름으로 부르는 건 배려하는 게 아니라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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