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의 모든 작품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영상자료원에서 기획전을 할 때 거의 모든 작품을 다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장고>를 보면서 척추를 따라 퍼지는 흥분을 느꼈고 <바스터즈>의 극장이 불타는 장면에서는 영화와 현실과 그것이 교차하는 극장이라는 공간 모두가 제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듯한 감동을 느꼈죠. 제가 감동했던 전작들에 비하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는 어딘가 좀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껄렁거리면서 뭔가 시시한 걸 대단한 것처럼 장광설을 늘어놓는 그 아재감성, 타란티노 테이스트는 여전했지만요.


글쎄요. 이 작품의 여운이 저에게 왜 이리 큰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60년대 할리우드와 서부극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아마 이 영화를 서부극 매니아와 다른 시네필들보다는 훨씬 불완전하게 즐겼겠지만, 그런데도 이 영화가 주는 어떤 충만감이 여전히 맴돕니다. 처음에는 그냥 따뜻한 허풍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 때 그 맨슨 패거리 히피놈들을 만났다면 아주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 줬을 텐데! 마시던 맥줏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고 트림 한번 발사하면서 그 때가 얼마나 좋았고 샤론 테이트는 얼마나 착하고 예쁜 배우였으며 그 때 영화판이 막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타란티노가 마시는 "라떼" 맛을 알려면 제가 그 라떼의 원료를 알아야하는데 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도 타란티노의 전작들보다 훨씬 그윽하게 깔린 노스탤지어 같은 것을 곱씹게 됩니다. 무지막지한 영화인데 예전보다는 훨씬 순하고 뭔가 좀 눈물이 그렁그렁해요.


<펄프 픽션>만 해도 청년의 혈기라고 해야하나 광기 같은 게 번뜩입니다. 무슨 꿈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 뻥같은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니까요. 어이없음으로 어이없음을 잇는 영화인데 영화전체가 웃음을 한껏 참고 아주 진지하게 왕뻥을 치는 떠벌이의 스피릿이 있습니다. 내는 내키는대로 막갈란다~ 이렇게 드러누워버린 것 같은 배짱이 있어요. 그에 비하면 <원스 어폰...>은 훨씬 유순하고 이야기가 차곡차곡 흘러갑니다. 주인공 중 한명인 릭 달튼은 이제 인생 내리막길에 있는 사람인데 정말 퇴물이 될 뻔하다가 그래도 어떻게 마카로니 웨스턴 뽕을 타서 다시 한번 상승하는 그런 호사를 누립니다. 이야기 전체가 시간에 거역할 수 없으면서도 버둥거리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아무튼 이건 그런 이야기임!" 하면서 앞뒤 다 쪼개놓고 순서 바꿔놓은 <펄프 픽션>보다 그래도 나 안끝났다는 노장의 투혼 같은 게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이런 분위기를 잡아주는 건 전적으로 브래드 피트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레오는 또 하던 대로 열이 잔뜩 뻗쳐서 캐릭터를 뽐내는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릭 달튼이 그런 인간이니까 뭐 상관은 없지만... 아무튼 퍼포먼스로 뭘 해볼려는 건 여전합니다. 그와 반대로 브래드 피트는 뭘 안합니다. 나사가 반쯤 풀려있는데다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그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삽니다. 영락없는 따까리인데 신기한 건 클리프 부스가 이런 대접에 전혀 불만이 없다는 겁니다. 딱히 집착도 없고, 어쩌다 간신히 잡은 스턴트맨 연기 기회는 이소룡이랑 싸우면서 본인이 걷어차버리고...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도 본인이 그러죠. 짤릴 만 했다고. 옛날 같았으면 타란티노는 이 회상을 클리프 부스가 술을 마시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마구 떠들어대는 그런 과거/현재 교차편집으로 짰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클리프 부스는 엄청 헐렁합니다. 뭔가 신천지스러운 히피들 소굴에도 가보고요. 달관자의 태도가 몸에 배어있습니다. 복수라든가 어떤 장렬한 목적 의식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클리프 부스가 맨슨 일당을 아주 반죽음으로 패놓을 때, 무시무시하면서도 이웃집 아저씨의 히어로 변신같은 감동이 있습니다. 그는 현실역사에 침입하는 영화 그 자체인 메타포 같은 존재인데 영화가 암울했던 현실에 맞서 싸워서 이겨버리는, 현실을 바꿔버리는 이야기를 만드니까요. 그 과정에서도 클리프 부스는 여전히 느슨한데 비장함은 1도 없고 그냥 우리집에 들어온 또라이들을 아주 박살내줘야겠다는 "지랄맞은" 응징만 있습니다. 사람 잘못 건드린거죠. 이 부분의 진가는 클리프가 사람들을 두들겨 팰 때가 아니라 퇴장할 때 드러납니다. 가장 위험했고 현실에서는 처참했던 순간을 딱 넘기자 클리프는 할 일 다 했다는 듯 퇴장합니다. 석양의 건맨 같은 그런 퇴장이죠.


영화는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온갖 허드렛일(드러운 감정)을 다 해주는 좋은 친구다, 그리고 그 친구는 당신이 위태로울 때 당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고 그 더러운 현실과 맞서 싸울 힘을 줄지도 몰라. 눈이 반쯤 풀려있으면서 뭐... 나만 믿으라구... 내가 여차하면 다 혼내줄테니까... 하고 입터는, 넉넉하고도 괜히 믿어보고 싶은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저는 이 영화를 그렇게 봤습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연기자로서 아주 좋아졌습니다. 영화와 현실이 어떻게 만나는지 그 초현실적인 지점을 좀 짚어보고 싶은데 지금은 머리가 좀 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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