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요 앞에 보이는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던 모양입니다.

꽃다발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는 어른들.

꽃다발을 작은 가슴에 안고 학교를 나서는 아이들.

그 소란의 와중에서도 아빠 없이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짠했습니다.

저 아이가 혹시 우리 조합원의 아니는 아닐까.

아이가 저만큼 자라도록 먹여주고 입혀주며 몸이 부서져라 일하며

뿌듯하고 대견한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 보는 날.

졸업식에 못간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게 아빠 없이 졸업을 한 아이들이 오늘 아빠 없는 입학식을 하고 학년이 올라갔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쌍차에서 아빠가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날로 부터 매일 울

던 엄마가 아파트에서 투신을 했고

엄마의 죽음 이후 우울증이 걸려 손목을 면도칼로 긋던 고등학생 아들내미를 데리고

병원으로 쫒아 다니던 아빠의 시신을 제일 먼저 발견한게 그 아들이었답니다.

실업급여 한 푼 받을 수 없고 다른데 취직도 할 수 없는 평택공장 무급휴직자의 장례를 치

른 다음날 창원공장에서 희망퇴직 한 노동자의 주검이 또 발견되었고, 이틀 만에 두 번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쌍차에서 희망퇴직을 하고 조선조에서 하청을 다녔던 세 살짜리 큰 아이와

다음 주가 돌이라는 작은 아이를 세상에 남긴 열네번째 노동자의 죽음.

이것이 정리해고입니다.

구제역 걸린 소, 돼지처럼 생매장되는 이것이 정리해고입니다.

막을 수 있을 때 막읍시다. 싸울 수 있을 때 싸웁시다.

한진에서 못 막아내면 다른 사업장도 줄초상납니다.

동지여러분, 오늘 밤 가족들에게 편지를 씁시다.

문자 말고 전화 말고, 아이들과 마누라 그리고 부모님께 편지를 씁시다.

어머니 아버지, 제 새끼 제 마누라는 제가 꼭 책임질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지켜

봐 주십시오.

아들아, 딸아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

이 아빠는 우리 가족을 꼭 지킨다.

아빠는 반드시 이겨서 돌아가기 위해 지금은 너무나 보고 싶어도 참는다.

아빠는 우리 가족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의 고통쯤은 이겨낼 수 있다. 그게 아빠다.

우리 다같이 힘내자.

사랑한다. 투쟁!

 

2011년 3월 2일

 

민주노총 부산본부 한진중공업정리해고 분쇄 2차 결의대회 연설

 

김진숙

 

 

방드라디은 초 개인주의자라서 방드라디 위주로 세상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눈 앞에 보이는 개 한마리의 죽음이 아프리카의 수백만 마리의 사람의 죽음보다 더 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찬투정을 하니까요. 방드라디는 그것이 다만 그들의 노예적 습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걸 탓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방드라디는 다른 동물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동물들이 많은 사회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동물이 무엇에 공감하는 지는 각기 다르기에 복잡한 문제이지만, 공감이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과. 동물의 종을 구분 짓는 것은 이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개돼지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감하기 전에 머리를 쓰지 않으니까요. 공감은 다른 세상을 만날 때 이성을 꺼둘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방드라디는 김진숙씨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구제역이나 정리해고나 별반 다를바 없어 보입니다. 혹은 도시에서 사는 봉급 생활자들, 시간이 많이 들고, 비싼 놀이를 못하기 때문에 간신히 인터넷이나 할 수 있는 그런 봉급 생활자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나 개돼지나 별반 다를바 없어 보입니다. 한국인들은, 내가 그래도 동물은 먹는다면서 자기들이 더 낫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동물들도 풀과 바이러스와 기타 듣도보도못한 잡것들을 먹기에 다를바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아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어쩌고 저쩌고 할지도 모릅니다만, 개돼지도 컹컹대고 꿀꿀 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한국인들이 동물과 똑같기 때문에 한국인이 동물들처럼 도축당해도 싸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물론 실제로 한국인들은 곳곳에서 도축당하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그들의 종자는 노비적이기 때문에 도축당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서 한국인들은 그러한 도축당함을 자신들의 숙명으로 여기며 차라리 자존심이라도 덜 상하게 개돼지 내지는 기계가 되는 것이 꿈꾸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르귄 소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끝나야 생각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민이 주인이어야 한다는 사상이라면 한국인들에게는 민주주의가 별 의미없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노주주의가 필요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칼로 찌르고, 강간하고 불태워 시체를 유기한 개돼지보다 못한 쓰레개돼지도 주인취급을 해주겠다는 범한국인적 각오가 있어야 한국인들은 주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왜냐면 그들의 종자가 열등하니까요.

 

방드라디는 그래서 그리스 국민들이 부럽습니다. 저쪽은 돈이 파탄나더라도 국민들의 행복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나라죠. 돈보다 사람이 중요한 나라입니다. 물론 무디스 피치 푸어스에서 신용등급을 강등하고 국채를 낮추고 그런 짓들을 하겠지만, 러시아나 인도네시아가 그랬듯이 어떻게든 잘 풀릴 겁니다. 어짜피 한국은 사대강으로 재정이 파탄이 날 걸 같은데, 쟤들을 보고 누가 어리석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들의 종자가 그리스 인들처럼 이성적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하지만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노비적 종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루를 즐기도록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애를 낳지 않을 수 밖에요. 방드라디가 동물을 존중하는 이유는 한국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에는 동물취급을 받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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