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 기억들..

2011.07.09 22:42

Weisserose 조회 수:1192

저는 한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주욱 살았습니다. 전 부터 이런 글을 어디든 쓰고 싶은 유혹이 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가 이번에 여기에 정리해보려


구요. 


1. 우리집은 시장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장사 하시느라 가게에 빨리 왔다 갔다 하시려고 했는지 아무튼 시장 한 복판에 집이 있었죠. 그 집 말고 비슷한 구조의 집


이 몇 채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장은 신기한 것 천지였죠. 어릴적 동생이랑 둘이 시장을 누비고 다니고 또래 애들이랑 무척 많이 놀았죠. 쌀가게 하는 누구, 잡화상 하는 누구,


행상하는 누구.. 친구를 찾으려면 걔네 가게 가면 됏어요. 가게에 가면 가게 방에 있고 그래서 불러내서 시장을 휘젓고 다녔죠. 소독차만 오면 내내 그 뒤를 쫓아다니는 것만 해


도 충분한 놀이였어요. 할아버지는 당시 방앗간을 하셨습니다. 어릴적 깨를 볶는 기계에 (고열이었는데) 거기에 손을 댓다가 손바닥이 데였죠. 그래서 어머니께서 간장을 발라


주셨어요.


다행히도 그 흉터는 남지 않았고 비슷한 때에 할아버지네 가게 맞은 편에 구멍가게 하는 누나가 짐 자전거 태워준다고 짐칸에 앉혀놓고 자전거 타는 아저씨 찾으러 간 사이 까불


다가 자전거가 통째로 넘어져서 얼굴에 심하게 상처가 나기도 했죠. 그래서 근처 병원에서 얼굴을 꼬매고 한 동안 동네를 다니면 이웃 아줌마들이 '너 얼굴이 어떻게 됐니' 하면


서 구경을 하셨죠. 다행히 그 수술 자국은 이제 잊혀졌어요. 할아버지가 하시던 가게 옆에는 공중화장실이 있었죠. 거기는 유료였고 가게 앞엔 누군가가 정해진 요금을 받았습니


다. 여름이 되면 재래식이었고 또 냄새가 코를 찔렀어요. 시장에는 과자 도매상이 있었죠. 정말 과자가 산처럼 쌓여있었고 늘 거긴 사람들로 바글 거렸어요. 그 집은 저보다 한살


어린애가 살았는데 가끔 그 집 아저씨가 건빵 이런걸 주셨어요.



2. 동네엔 국수가게가 있었어요. 국수를 뽑아서 말리고 그걸 잘라 파는 가게였는데 (국수 공장과 소매를 같이 했죠) 배고플때 가끔 또래들이랑 몰려서 그곳에서 몰래 국수를 뜯


어먹다가 그 집 할머니 한테 걸려서 부지런히 도망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어느날 그 가게가 없어졌죠. 설마 동네 개구장이들 때문에 망한건 아니겠죠. 할아버지가 하시던


가게는 그것만으로도 구경꺼리였습니다. 1년 내내 늘 신기했어요. 고춧가루를 빻고 쌀을 빻고 깨를 볶고 그것만 봐도 신기했죠. 그러다 6살때 집이 같은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방앗간을 파셨죠. 파신 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할아버지 한테 뭐 사달라고 할 요량으로 갔더니 가게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은 모두 일을 안하고 새로운 주인이


베푸는 회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위에 하얗게 종이가 덮여있고 거기서 술을 드시고 있다가 나를 보자 '전 주인 아저씨 손자'라고 소개하고 오라고 하시는 데 그 분위기가 싫었


어요. 그리고 그 가게는 그 뒤로 한 번도 안갔어요. 동네에 정육점이 있었는데, 그 주인은 할아버지랑 친구셨죠. 이사도 우리집 옆으로 하셨고 나름 재물복이 있으셔서 당시 청담


동으로 이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게는 일하던 아저씨 한테 가게를 넘겼구요. 저 고등학교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모두 날리고 미국으로 도망가셨다고 들었어요.



3. 이사한 집은 원래 옆집 뒷집 우리집 합쳐서 한 채였대요. 그걸 세 집에 나눠 팔았죠. 옆 집은 앞에 말한 정육점 집에서 뒷집은 한전 다니던 나랑 동갑내기인 여자애가 살았구


요. 한 번은 그 여자애랑 싸우다가 걔가 내 팔을 이빨 자국나게 물었어요. 그걸 보시고 어머니는 격하게 화나셔서 그 집 할머니 한테 가셔서 심하게 따지셨어요. 그 집 마당엔 


그네가 있었고 그거 타러 아침에 눈뜨자 마자 가기도 했고 담 너머에서는 어머니께선 늘 하이톤으로 제 이름을 부르면 다시 달려가서 아침 먹고 훈계를 들었죠. '식전에 남의 집


가지 말아라' 이런거요. 대학교 3학년때 꿈을 꿨어요. 분명 내 기억엔 그 뒷집에 동갑내기 여자애가 살았는데 꿈에선 남자애가 살더라구요. 걔가 자기집에 가자고 했고 그래서


따라 갔는데, 거기엔 빈소가 차려져 있고 걔네 할머니가 울고 계셨어요. 나는 인사하고 사과하고 새우깡 먹다가 놀았죠. 걔는 '오늘 나하고 아무도 안놀아준다 이상해'라는 말


을 했고 그리고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날 아침 꿈이 참 이상해서 어머니한테 이야기 하니 어머니는 어릴적 동갑내기 남자애가 살았는데 걔네 아버지께서 해외 출장 갔다 올때


어머니가 마중 나가 돌아오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할머니가 재산 정리하고 어디론가 이사가셨다고. 만약 그 친구가 살아있다면 한 번 보고 싶어요. 



4. 동네에는 화교들이 제법 살았어요. 초등학교때 학교를 가는 길에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가죽 가방을 멘 화교학교 학생들이 있었죠. 그 가방에는 청천백일기가 그려져 있


었고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의 책가방은 늘 공존하며 학교 가는 길을 재촉 했어요. 어릴적에 어머니가 선생님을 식사를 대접 하시고 (미운 7살 모드였던 저 때문에) 저는 밖에 나


와서 중국집을 구경했죠. 홀이 있고 뒤에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한 방을 열자 거기엔 남자애 하나와 여자애가 숙제를 하고 있었어요. 교과서는 똑같이 생겼는데, 글자는 이상한


거였죠. 화교 학교 다니는 애들이었어요. 그 집 아저씨가 가라고 하고 어머니가 데려가셨죠. 그냥 나는 같이 놀고 싶었는데.. 학교 건너편에는 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도 화교


가 살았죠. 그 집엔 나이 드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한국 말을 한 마디도 못하셨어요. 우린 가끔 그 집을 대문 틈으로 구경하곤 했죠. 그 할머니는 중국말로 뭐라고 하셨는데, 아마


욕이었을꺼에요. 그럼 우리는 책가방을 덜렁 거리면서 도망갔죠. 화교들이랑 싸우거나 그러진 않았던거 같아요. 그냥 걔네들은 걔네들 우리는 우리였을 뿐이죠. 



5. 지금 터미널이 있던 자리는 서커스단이 머물렀죠. 가끔 거기에 보면 불에탄 짐승 뼈가 있었죠. 아마 서커스단에서 병든 짐승을 죽이고 태워버린것 같아요. 한 번은 새랑 비슷


한 뼈가 있었는데 애들끼리 그걸 보면서 이거 독수리다 아니다라고 갑론 을박도 했구요. 어느날 보니 그 곳에 버스 터미날이 생겼어요. 그리고 서커스 단은 거기 있을 일이 없었


습니다. 시장에도 공터가 있는데 거긴 싸구려 악극단이 공연을 했어요. 천막이어서 돈 내고 들어가는데 가끔 거기 무임관람 하면 혼나서 한 번 동네 형이랑 같이 돈 내고 구경갔


죠 아마 미성년자는 보면 안되는 내용인지 거기 기도를 보는 누나가 대나무 회초리로 때리면서 내쫓았어요. 그때 그냥 환불도 못받고 쫓겨났죠. 어릴때 시장 건너편에는 굴다리


가 있었어요. 100미터 조금 넘는 거리였는데, 애들한테는 신기한 곳이었죠. 자전거를 타고 거기를 소리 지르면서 지나갔어요. 우중충한 냄새에 어두운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애


용했죠. 어느해인가 광복절날 돈을 줏었어요. 순진한 나와 동생은 파출소에 신고했고 자랑스럽게 학교와 이름을 말하고 왔죠. 당시 동생과 함께 였는데 이제 상 받는다고 좋아했


죠. 그러나 상은 없었죠 ㅋㅋㅋ. 



6. 집에서 조금 더 가면 관인 놀이터가 있었고 그 뒤쪽에 같은 반 친구가 살았어요. 걔네 집 생일날 초대 받아 놀러갔더니 걔네 어머니께서 기념 사진을 찍어주셨죠. 기억나는건


담벼락을 따라 장미꽃이 피었는데, 거기를 배경으로 찍었어요. 걔네 어머니는 '약속이 있다고 다음에 또 놀자'고 하셨어요. 그때 참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늘 저희 어머니는 대


가족의 준 하녀 처럼 맨날 부엌을 떠날수가 없었는데, 걔네 어머니는 멋있게 차려입고 약속이 있어 가신다는 것. 참 신기했죠. 그 친구에 대해 이후에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는


싸웠거나 전학을 갔던거 같아요. 외갓집은 7남매였어요. 거짓말 좀 보태서 외가에 가면 여자 어른들만 보면 무조건 '이모'라고 부르면 됐죠. 외삼촌을 낳겠다고 외할머니는 딸을


6명을 낳으셨죠. 이모들 얼굴은 기억하기도 벅찼어요. 외가에 가는 걸 좋아하시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자주 가지도 못해서 더더욱이요. 어릴적 외가 하면 기억나는 건


외가에 갔을때 외할아버지 얼굴 좀 기억나고 무슨 일인지 외삼촌이 화난 상태에서 잘못 건드렸다가 외삼촌한테 불벼락을 들었던 기억도 나구요. 외할아버지는 심심하시면 마작


패를 갖고 혼자 노셨어요.  젊으셨을땐 당시 신여성, 댄디보이 였던 두 분이신데 노년엔 그냥 노인이셨죠. 외가가 산동네였는데, 외할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건 외할머니 생신


(크리스마스 날이었죠)이라 가는 날 눈이 무척 많이 왔고 외할아버지는 그 눈을 치우셨어요. 나는 외할아버지 보고 '할아버지'라고 외치고 기쁘게 웃으시던게 기억나구요. 


외갓집은 정말 미어터지게 친척이 많았어요. 거기서 정말 기억도 안나는 어머니쪽 친척들 뵈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사촌들이랑 엉켜서 놀고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죠. 



7. 9살때 큰고모가 교회로 전도해서 교회를 나갔어요. 할머니는 교회 전도하러 전도사님이 오시니까 화장실로 뛰어가서 부적에 대고 비셨죠. 저는 그때 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5학년때 성경 공부 선생님이 소아마비셨어요. 절뚝 절뚝 걸어다니셨는데 입이 걸으셔서 '썩을 놈'이 대박이었죠. 근데 그 선생님이 좋았는지 누구도 그거에 상처받는 애들은 없


었어요. 오히려 혼내면 낄낄 거리면서 벌을 받았죠. 장애가 있으셔서 평생 혼자 사시나 했더니 몇 해전 길에서 뵈니까 결혼하셨대요. 그리고 저를 위로하시는 겁니다.


그때 친구 중에 하나는 걔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하셨는데 계모가 정말 스테레오 타입이어서 교회에서 놀러가는 날도 아무것도 안챙겨줬죠. 애들이 놀라서 그걸


전해주고. 어머니는 걔 보면 잘 해주셨어요. 안됐다고. 교회에는 형들이 많았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다니는 형들. 우리들을 보면 귀엽다고 장난도 잘치고 놀아줬죠. 그때 다


들 한 가닥씩 운동들 했었죠. 그 이후 실향민 출신이던 담임 목사님이 다 정리해버리고 한 동안 교회에서는 중고등부 예배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는데 그 때 부터 교회에서 그 형


들은 볼수 없었어요. 참 좋았는데.. 


어릴때 기억이란 좋건 나쁘건을 떠나서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어서 대충 적어 봅니다. 가끔 다니다 보면 많이 없어졌지만 자취를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해서 한 번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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