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을 입고 싶어요.

2011.05.27 11:00

Silencio 조회 수:2373


오늘 출근길에 성추행을 당했어요. 


지하철 문이 내리고 내리려는 그 틈을 타서 누군가 재빠르게 엉덩이를 잡았다 놓더군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는데 잡은 것 같은 사람을 딱 잡아서 당신이냐고 딱 물었죠.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가리킨 사람을 잡아서 또 물어봤죠. 당신이 방금 나 만졌냐고. 


예? 하면서 물론 아니라고 하죠. (만약 했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출퇴근시간에 아주 붐비는 역이라 에스컬레이터 앞이 병목현상처럼 꽉 막혀있는 상태여서, 그 사람을 가리킨 사람도 근처에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이 사람 맞느냐고, 당신이 그러지 않았냐고 하니 하는말이, 보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가리킴 당한 사람과 동시에 '못 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그 후로 어찌 할 틈도 없이 두 남자가 나란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더군요. 
지목당한 사람은 황당한 듯 먼저 가는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올라가고요. 


그 상황에서 누구를 쫒아가서 붙잡겠어요. 똥밟았다, 하고 생각하고 그냥 가려고 하는데 
보니까 처음에 잡았던 남자가 저랑 같은 출구로 쭉 나가는데, 왠지 종착지(?)가 같은 것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뒤에서 쳐다보면서 가는데 왠지 절 의식하는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길가면서 자꾸 도로쪽을 쳐다보는 게, 주변시야로 제가 따라오고 있는지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같은 건물로 들어가더군요...건물 앞에서까지 제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는것같았어요. 


그 사람은 고층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고 저는 저층을 타야해서 갈 길을 가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가기엔 너무 찜찜한 겁니다. 


고층 엘리베이터쪽으로 가니 아직 엘리베이터를 못 탔더군요. 다시 잡아서 물었어요. 아까 왜 못봤는데 봤다고 했느냐고. 


그랬더니 봤다는 거예요. 자기는 제 왼쪽 뒤에 있어서 봤다고. 


그런데 제가 잡을 때 그 지목당한 남자는 저보다 앞에 있었거든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절 만지고 앞으로 쭉 가냐고 하니 자세까지 잡아보이면서 그 남자가 제 오른쪽에서 만지고 쓱 돌아서 나갔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아까는 왜 못봤다고 했냐고 하니 자기가 왜 거기 끼어드냐는군요. 
오해 받잖아요. 라고 하니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죠. 라고 하는데 도저히 거짓말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정말 차분한 표정과 말투였어요. 


일하려고 자리에 앉아도 도저히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혼란스러워서 듀게에 글을 씁니다. 
대체 누구였는지, 그리고 가만히 서있는 사람을 슬쩍 만지면 기분이 좋은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떻게 앞에 서있는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그저 하나의 몸뚱이,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는건가요. 
그리고 왜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길가다가 졸지에 음식물 쓰레기를 뒤집어 쓴 것처럼 갑자기 쏟아져드는 불쾌감을 감내해야 하는건가요. 
바쁜 순간을 틈타 타인에게 쓰레기를 뿌리고 인파속으로 쓱 사라지면 기분이 좋은가요? 


지하철타고 통학하던 고등학교때부터 지겹게 많이 당해온 성추행입니다. 
처음엔 몸이 얼고 수치스러움이 온 몸을 감싸는 충격이었어요. 
지금은 충격보다는 그 뻔뻔스러움에 분노가 일고, 전철을 탈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네요. 


한점 부끄러움도 없이, 눈이 마주쳐도 아랑곳않고 온 몸을 훑어보는 사람들, 모르는 척 자기 손을 허리나 다리께에 갖다대는 사람들. 진절머리가 납니다. 


이럴바엔 차라리 갑옷을 입고 다니고 싶어요. 아무도 제 몸을 볼 수도 만질수도 없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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