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사고와 객관적 합리성

2011.05.24 19:21

raven 조회 수:2299

 이 곳에 글 쓰는 건 또 다시 오랜만이네요. 요즘 게시판을 달구는 여러 논쟁들을 보면서 떠오른 몇 가지 단상들을

논쟁들의 열기와는 좀 거리를 두고서 여러 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얘기는

좀 더 큰 주제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듯 해서 그보다는 좀 작고 또 나름대로 시의성이 있을 만한 주제를 잡았습니다.


 제목에서 짐작이 가듯이, 제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문제는, 최근 hubris님을 중심으로 몇몇 분들이 상이한 입장에서

제시하는 이른바 "경제적 사고"에 관한 것입니다. 게시판에서 읽을 수 있는 이런 관점의 최근 몇몇 글들에서 저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일단 hubris님의 성매매 관련 첫번째 글을 논의해보겠습니다.

꽤 긴 논의가 될 것 같은데, 우선 저는 문제의 글에서는 분명하게 경제학적 사고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이 들어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그것이 어떤 전제에 기초해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보다 직접적으로 경제학적 사고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1. 경제학적 사고의 우월성


제가 정확히 이해했다면, 이 글의 주요 논지는 "매춘이 파급시키는 본질적인 문제는 자의적인 기준에서 내려질 수 밖에 없는

매춘 자체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매춘의 가격이 만들어내는 사회 경제학적인 것들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성매매의 가격이 낮은데다, 그 현행적 범법성으로 인해 근무 조건도 열악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이미 성매매 합법화 입장의 여러 분들이 거론한 문제이기도 하죠. 이건 굳이 경제학적 사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굳이 경제학적이라면, 성매매의 가격이 낮고 근무조건이 열악한 점들에서 비롯되는, 또는 그것들이

반영하는 성판매자의 인권, 생존권 침해가 성매매가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침해라는 정신적 문제와 따로

떨어져서 그 자체로 부각된다는 점이죠. 그런 인격 침해의 문제는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도덕적 결함으로 치부되면서 말이죠.

즉, 저 문장에서 제가 읽을 수 있는 hubris님의 입장은 성매매 문제에서 단지 경제적 조건만을 따진다는 점에서만 경제학적입니다.

이런 경제학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큽니다. 일단, 이미 기존의 이른바 도덕적 논의들에 새로운 논의를 추가한 것도 아닌데다,

마치 경제적 조건에 관한 문제들만이 "본질적"인 양 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성매매 문제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기보다, 단지 경제학적 사고의 우월성을 강변하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울러, 듀나님을 통해 올라온 liberal kim이란 분의 논의도 이런 지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libertarianism이 여러 도덕적 입장들 중

하나에 불과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hubris님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더 공정하고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경제학의 정의로 제시하신

"인과 관계의 정확한 방향 및 크기를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추론/논증 규범”은 경제학의 정의로 기능하기에는 지나치게 폭이 넓습니다.

이 점을 hubris님의 글 한 대목을 분석하며 낸 다음의 결론이 명백히 보여줍니다.


"완전히 뒤죽박죽인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텍스트 가], [텍스트 나]가 타당하지 않은 논증임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제학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가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두 텍스트는 타당하지 않은 논증입니다."


"경제학을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kim님의 논증은 단지 논리 분석일 뿐, 경제학적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모든 과학적 사고는 kim님이 제시한 정의를 따르고자 하지, 그것이 경제학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 현상들에 저러한 방법적 논증 규범을 적용하는 것이고, 또 그러한 논증 규범들을 경제 현상에

특유한 몇몇 전제들, 공리들 및 규칙들에 맞추어 적용하는 것이죠. 이러한 분명한 한계 규정을 간과할 때, 경제학적 사고가 합리적 사고의

대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정치적 합의, 윤리적 토론의 차원이 삭제되고, 모든 것이 법적 절차주의나 경제적 효율주의에

자리를 내주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치적, 윤리적 사고는 비합리적, 감정적이거나, 아니면 경제적 합리성과 대등하지 않은 부차 심급에

불과한 것으로 말이죠. 동일인인지 모르겠으나 예전에 김리벌이란 분이 쓰신 몇몇 분석글에서도, 정치적, 윤리적 토의의 장을 삭제하고

문제를 법적, 절차적 관점에서 보려는 입장이 나타나더군요. 이런 관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논의할 것이니,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kim님의 분석 자체에 대해 조금 덧붙이자면, 그 분석의 대상이 되는 hubris님의 문단은

'네덜란드의 성매매 합법화 정책을 비판하는 나라들은 사실 네덜란드보다 문제가 더 많다'란 주장을 하는데,

이 주장을 형식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수고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주장의 방점은

네덜란드의 정책이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성매매 범죄화 정책의 국가들이 더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효율성 측면에서 봤을 때 네덜란드의 정책이 다른 나라의 정책보다 다 낫다는 것을 얘기할 따름입니다.

문제는 성매매 합법화 정책과 비합법화 정책의 비교이지, 상이한 기초 조건을 가진 국가들에서 동일한 성매매 합법화 정책이

가져올 '도덕적 수준'의 변화 비교가 아닙니다. 어쨌든 지금은 등업이 안 된 상태라 토론이 어려우실 테니 나중에 등업하시고 나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2. 그 근거들: 시장자유주의, 효율성


다시 hubris님의 글로 돌아와, 이제 저런 경제학적 사고가 어떤 암묵적 전제들에 기반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처음 인용한 문장에서 조금 더 읽어나가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읽게 됩니다.


"성을 판매하는 행위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단속할수록, 단속은 저급 매춘 시장에 한정되고, 성을 소비하는 방식은 계급에 따라서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을 낮은 가격으로라도 팔고자 하는 사람과 성을 낮은 가격으로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러한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만합니다. 여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암묵적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성매매를 단속하는 것은, 그것이 자유시장에서 거래될 품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그러한 단속은 성매매자와 성매수자의 거래 자유를 박탈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매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로운 성매매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국가가, 또는 사람들이

특정하고 "자의적인" 도덕관에 젖어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는, 근본적 시장자유주의적 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길게 말할 것 없이, 이런 시장자유주의적 관점 자체 역시 "자의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왜 우리가 그런 시장자유주의를 택해야 할까요? 아마도 근거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함축된 사고 방식에 있을 것입니다.


"마약과 매춘은 경제학에서 전형적으로 사회적 관념과 충돌하는 주제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마약과 매춘을 합법화할수록

구성원의 경제적 효용이 높아지며 부정적인 부작용을 통제하기 쉽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마약과 매춘은 다소 다르죠. 우선, 마약과 매춘 모두 그것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하는 개인들의 효용은 서로 높아질 뿐

감소하지 않지만, 마약의 경우는 구성원의 효용은 올라갈지 몰라도, 사회 전체의 효용은 감소할 수 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늘어날 수록, 사회 전체의 생산성은 떨어지고, 다른 국가와 경쟁해야 하는

국가 자신의 존폐(생산성)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의 효용,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곧바로 "다른 국가와 경쟁해야 하는 국가 자신의 존폐"로 이어집니다.

효율성을 '존폐', 즉 생사와 연결시키면서 그를 궁극적 가치로 놓을 때, 우리는 자유시장과 경쟁을 최종 척도로

삼아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효율성은

단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적 가치입니다. 이 수단적 가치를 생사와 연결시킴으로써, 무언가 본말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마치 생존이 목적이고 그를 위한 수단이 효율성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효율성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효율적이지 않으면 경쟁에서의 낙오,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효율성은 어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뒤쳐지지 않고 단지 죽지 않기 위해 추구되어야 할 가치로 제시됩니다. 효율성이 생사와

결합될 때 강조는 생이 아니라 사에 놓이는 것이죠. 효율성이 추구하는 삶은 그저 '죽지 않은 삶'일 뿐입니다.

이 맹목적 효율성 제일주의는 방법적 관점, 수단적 관점에서만 보면 가장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맹목성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킴으로써 죽은 것만 못한 삶을 만들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비판한 바 있는 이 도구적 이성의 폐해에 대해 더 이상 상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구태의연한 도구적 이성비판이 새삼 재론되어야 할 정도로, 오늘날 한국에는 구태의연한 도구적 합리주의자들이

많다는 점은 별도의 분석을 요구합니다.


3. 경제학적 이성의 한계


사실 이런 맹목적 합리성의 관점은 hubris님보다는 bankertrsust님이 보여주는 입장에 가깝습니다(어느 댓글에서 노예제도도 효용성,

수익성이 있으면 경제학자들은 지지한다고 말한 점에 비추어). hubris님은 그보다는 공리주의적 윤리론에 기대어

이런 맹목성의 위험을 완화하는 느낌이지만, 그 때문에 경제학의 정확한 위치가 흔들립니다.

hubris님은 경제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경제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대신,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많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감정적인 판단보다는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효율적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경제학이 규범을 제시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하는 학문이라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문장을

잘 읽어보면, 그 안에 상충되는 내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기술적이지만,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효율적인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규범적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이란 말이 마치 비규범적인 듯 "옳음"과 대조되고 있지만, 경제학자가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고민하는 이유는

효율적인 것이 좋고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효율성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치입니다.


사실, 경제학의 지위는 애매합니다. 경제학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경제 현상들 배후에서 그를 지배하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규칙들"을 찾아내려 합니다. 이 점에서,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학적 현실을 본래 모습대로 기술하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이 합리적 규칙들은 이미 인간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하는 인간의 가정에 따라 일정하게 재단한 뒤에 구성된

것이므로, 단지 실재의 부분만을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해, 문제는 경제학의 저 인간학적 가정이 아닙니다. 저는 그 가정이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실 과학적 이성은 저러한 모종의 전제된 합리성에 기반해서만 작동합니다. 문제는 그 가정의

범위를 확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경제학은 경제적 현실, 그 중에서도 제한된 일부만을 설명해줍니다. 현실은 경제학이 말하는

합리적 법칙들과 그 밖의 다른 인간적, 사회적 요소들의 복잡한 결합이며, 특히, 이런 경제학적 지식을 알고 있는 행위자를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입니다. 이 점을 간과할 때, 경제학은 자신이 현실을 가공하여 추출해낸 현실의 일부에 대한 모델을

현실 전체에 대한 모델로, 더 나아가 현실 자체로 주장하게 됩니다. 순전히 경제학적 판단에 따라, 즉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효율적인가의 관점에 따라 정책을 입안하고 여러 사회, 정치적 문제를 판단하려 할 때 이런 오류가

발생합니다. 경제학이 사실에 대한 제한된 경험적 학문이 아니라 규범마저도 제공하는 선험적 학문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런 경제학주의의 가장 큰 폐해가 바로 현실 공산주의의 계획 경제이고, 더 나아가 그의 바탕이 되는 경제결정론적 유물론

입니다. 이 잘못된 맑스주의자들은, 인간 현실의 복잡다단한 현실 밑에는 그를 규제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경제 법칙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무 규칙이 없어 보이는 역사는 사실 경제적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여왔다는 것이죠. 저는 이와 유사한 주장을,

노예제 폐지의 주 원인은 수익성의 하락이라는 bankertrust님의 짧은 언급에서 엿봅니다. 모든 현실 변화는 당연히 경제적

변화를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경제적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적

관계를 외부에서 결정하는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한 사회의 도덕적, 정치적 가치들, 자연 변화들, 국제적 역학 관계들,

학문의 진보들 등등 그 요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이 요소들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들도 경제적 지수들로 나타날 것이고.

그렇게 변화한 경제가 다시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들도 경제적 지수들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지수의 표현 가능성이 곧 모든 변화의 근본적인 또는 주요 추동 원인은 경제적 차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지수는

다른 사회적 변화의 반영일 뿐이고, 어떤 지수는 경제적 차원 자체의 변화를 나타낼 것이며 또 어떤 것은 경제적 차원의 변화가

사회 전체에 낳은 결과가 다시 경제적 차원에 나타나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사회, 역사의 변화는

이 다수의 요인들의 복합적 인관관계망을 통해 이루어지지, 경제적 변화가 중심이 되어 끌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긴 논의를 끌어온 것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적 현실의 제한된 일부를

합리적으로 설명해내고 예측해내려는 학문입니다. 우리가 이 제한성을 잊을 때, 경제학은 손쉽게 선험적 규범학이, 따라서

일종의 형이상학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경제학이 한편에서는 객관적으로 중립적이면서 단지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기술하는 것처럼 주장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이 경제학이 설명하는 대로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됩니다.

현실이 정말 경제학이 기술하는 대로 합리적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굳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자고, 경제학적으로

사고하자고 힘주어 주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현실은 사실 경제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경제학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현실은 경제학적 사고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데 왜 경제학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우리가 이성적,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든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론적 사고를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난감한, 경제학의 객관성을 해치는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경제학을, 인간의 현실 전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 일부만을 기술하는 학문으로

제한하는 것이죠. 인간 현실을 움직이는 다른 요소들이 존재함을 인정할 때, 경제학은 경제학적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의 '일부' 속에서 그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보론 격으로 몇 마디 덧붙입니다.


1. 지금까지 비판한 경제학적 사고, 즉 방법적 합리성의 영역과 정치, 윤리의 영역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정치적, 윤리적 토의의 장은 참여 주체들이 스스로 대화를 통해 규범을 정초하는 차원입니다.

그에 반해 경제학적 사고(또 법절차적 사고)는 이미 주어진 일정한 규범들, 규칙들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계산적 이성의 차원입니다.

전자는 후자로 환원되지 않으며 후자 못지 않은 중요성을 지니지만, 전자의 차원은 동시에 항구적인 분쟁 상태에 있기 때문에

후자의 명료함으로 그 분쟁을 잠재우고자 하는 항구적인 유혹 또한 있습니다. 경제학의 우월성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사람들, 또

더 넓게는 과학적 사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에는 저 항구적인 유혹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절대적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도덕주의 못지 않게 계산적 합리주의 또한 근본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자신과 다른

합리성, 이성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제거하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악과 싸우고 동시에 근본주의와도

싸우는 일이 핵심입니다.


2. 사실 제 입장은 자연주의적 오류에 따라 사실과 가치를 양분하는 상식적 입장에 가깝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손쉬운 입장이고, 게다가 현실적으로는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든 형식 논리가 그렇듯이 자연주의의 오류 또한

만능키가 아니며 그 형식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항상 형식 논리의 현실 적용에 있습니다. 자연주의 오류의 적용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가치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사실 명제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의 여부입니다. 물론, 자연과학의 명제들은

사실 명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령 경제학의 효율성에 대한 명제들은 순수한 사실 명제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란 명제는 사실 명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란 가치 판단 명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용자의 오독이 아니라, "효율적"이란 말 자체가 이미 가치 함축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인간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사실들은 그 자체로 이미 가치의 영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사실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영향을 평가하고 가치를 매기도록 만듭니다. 그런 가치 평가 없이는 그런 사실들의 의미 자체가 이해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파악하는 몇몇 사실 명제들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지 않지만, 따라서 "~이다"로부터

"~을 해야 한다"를 직접 끌어낼 수는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던지게 만듭니다.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 명제, 사실 파악은 우리로 하여금 곧바로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때문에, 자연주의적 오류가 그어놓은 형식적 구분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고의 차원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숙고의 차원이 오늘날 바로 윤리적, 정치적 토론과 사고의 장입니다. 따라서 경제학은 단지 객관적 중립성이란 안전한 성채에

머물 것이 아니라(실제로 그러한 성채는 이미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열띤 토론들 속에서 20세기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이 숙고의 장 속에 "하나의" 대화자로 참여해야 합니다.


저의 이런 교과서적 합리주의의 입장은 아마 매우 익숙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 따분한 익숙함 속에서 몇 가지 토론거리들이

있다면, 긴 글을 쓰며 당연한 입장을 반복하는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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