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의 설계자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저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가장 오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창조된 세계는 제가 아수라 백작이 되어 세계를 정복한 후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저한테 뭐라 하지 못하도록 신하로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그림일기장을 가득 채웠던 저의 터무니없도록 야심찼던 저의 세계는 가족에게 들통나서 죽싸리 맞은 뒤 만방에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파괴되어 버렸지요. 이것은 첫 번째로 좌절된 저의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가 10연패를 하기 바랐던 야구팬의 세계도 아나키스트를 꿈꾸었던 청운의 시절도 자그만한 현실의 흔들림도 감내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젠가와 같이 되어 버렸고요. 그렇게 몇번의 무너짐을 겪은 끝에 저는 저의 세계를 현실과 닮게 정교하면서도 작고 안정되게 구축하려 했지만 그 초라함으로 구축된 세계조차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전전긍긍하는 두려움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의 세계가 공고해지기 위해 가족에게 저의 세계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해 봤지만 이런 저의 기대와는 달리 가족이 보여준 세계는 각자 그들이 원하는 세계였습니다. 사소한 갈등에서부터  무심한 타협에 이르기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계된 세계를 구축하려 했지만 홀로 구상된 세계만큼이나 이것 또한 불만족스럽고 불안정스러웠습니다. 가족의 논리라는 것은 때론 부실하고도 때론 자신을 옥죄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요령을 강구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슴아팠던 사실은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곤경에 빠진 가족의 보이는 환경적 장애물을 제거해 줄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의 무너짐을 막아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슬퍼했던 것은 부모였고 희망을 놓치 않았던 것도 부모였겠지만 저에게 가족이란 결코 저와 같은 세계를 가질 수 없음을 알게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현실의 타인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도 저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 이상, 종교, 논리, 철학, 돈, 사랑 등등 각자의 세계는 각자가 선호하는 질료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겠지요. 이렇게 구축된 각자의 세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 융합되거나 충돌하면서 조금씩 현실의 세계를 닮아갑니다. 그렇게 연결된 세계의 구축물 중 어떤 것은 자신이나 연결된 사람뿐만이 아닌 현실의 세계에서 자리매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가 연결되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자신의 세계와 꼭 지켜야 할 자신의 세계가 타인에 의해 부서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쟁취해야 하는 것과 양보해야 하는 것, 그리고 지켜내야 하는 것들. 타인과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이 같은 자신의 세계의 영역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세계가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과 백척간두의 세계가 자신을 추락하게 만들거라는 두려움. 삶이란 이 같은 자신의 세계가 명멸하는 역사의 흐름이고 그러기에 작아 보였던 삶의 모습은 가까이 다가갈 수록 더욱 알기 어렵고 거대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인은 그렇게 거대한 저의 세계를 작게 보기에 저 또한 작게 보이는 타인의 세계가 얼마나 거대하고 어려운 것인지 유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각자의 고유함 사이에서 서로의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논쟁하고 공감하고 때론 기만하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논쟁은 환부를 건드리는 논쟁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냉정하고 객관화된 논리로 접근하려 해도 논쟁을 하는 순간에는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픈 논쟁일수록 그 고름의 뿌리가 깊어서 논쟁을 하는 와중에 쉽게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논쟁이 현실의 대책이 되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과 더 많은 합의의 논쟁을 거쳐야 하기에 무의미하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차이가 발생하는 소란스러움은 현실의 목소리로 전달되어 무심한 방관과 섣부른 대안을 하기에 앞선 현재의 대책이 올바른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모든 논쟁이 현실의 대책이 되지 않지만 고민이 없는 대책이란 더 큰 환부로 각자에게 돌아올 수 있기에 사람은 치부에 대해서 논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날카롭고 예리한 논지라도 환부를 째기만 할 뿐 흘러나오는 피를 수습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더 큰 상처로 곪기 마련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생각을 지적하기에 앞서 존중이라는 거즈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피냄새에 우린 진짜 찾고자 하는 모순에 대한 최선의 해답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공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타인은 자신의 삶을 작고 단순하게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공감이란 어쩔 수 없이 작고 가끔은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이해하고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보다 더 절실한 공감을 타인에게 행할 수 박에 없을 테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공감의 어긋남이 장애가 되어 타인에게는 위선이라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자신만의 공감은 지나친 동정심이 되어 자존감을 불쾌하게 하거나 그 사람만의 자긍심을 댓가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각자의 자긍심은 논리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기에 자신의 자긍심에 빗대어서 타인의 자긍심을 평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름을 말하기에 느껴지는 소외감과 같음을 말하기에 느껴지는 불편함 사이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류를 줄일 수 있는 방편 중 하나는 작아보이는 타인의 모습만큼 자신을 작게 웅크려서 공감을 말하는 자세일 테지요.

 

  때론 일부러 때론 자신의 오류로 인해 누군가를 혹은 자신조차 기만하는 일이 발생되게 됩니다.  이런 기만이 당장의 효과로 남을 때도 있지만 기만은 언제가 더 무거운 부메랑으로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됩니다. 기만에 대한 두려움은 더 큰 기만을 불러 일으키므로 오류를 범하는 자신에 대해 겸허히 인정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만은 초라한 자신의 진실을 감추어 내기 위한 외피와 같은 것이고 때문에 이를 벗어내는 것은 많은 부끄러움과 용기가 필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타인의 기만에 대해서 너무 쉽게 적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기만이란 모두가 알 수 없는 자신의 여린 진실이 더욱 작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기만만을 파괴하여 온전한 진실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타인의 기만에 직설적인 비난을 가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큰 기만으로 둘러 쌓거나 이니면 도망가거나 아니면 온전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기만을 알아채는 것보다 기만을 벗어내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고 그러기에 더욱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가까운 기만이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면 기만을 외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직면한 기만을 사라지기 위해서라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이상에야 기만의 당사자가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작은 격려와 조심스런 조언이 조금 더 효과적인 조용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 혼자인 저에게  결혼의 세계를 찾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길을 나서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고래고래 내세의 세계를 찾으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이제 직장인의 세계를 가지라고 진지한 충고를 듣게 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조응하지 못할 경우 저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합리와 논리로 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닮지 않았기에 초라함과 두려움으로 자신의 세계를 깍아낼 따름이지만 그럴 수록 타임캡슐처럼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중구난방식으로 모아서 보물섬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조각들은 시간 속에서 쉽게 잊게 되거나 무심코 다른 이에게 무가치함으로 발견될 수도 있게지만 아직은 소중한 제 자신의 보물을 꽁꽁 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리고 전 이 보물들을 나중에 발견하기 위해 이정표를 만들어 냅니다. 이처럼 놀이터의 글 자취로 남기기도 사진기 안에 독특한 추억으로 찍어 놓거나 타인의 표정 뒤에 기억으로 새겨 놓습니다.  자유롭지만 부박할 따름인 저의 세계는 언제가 다시 한 번 부서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테지요. 그것이 삶의 이어짐일 테니까요.  그리고 심심하기만 새로운 세계에서 보물이 필요할 때 전 제 자신의 이정표를 따라서 보물을 찾아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만의 보물이 아니라 연결된 다른 세계의 슴겨진 보물 또한 함께 찾아 나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논쟁하고 공감하고 때론 사랑을 하기도 합니다. 

 

 이 글은 하나의 이정표 입니다. 나의 세계가 불행에 뼈져 있을 때 보물을 찾아 나서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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