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벌님께2

2011.06.15 22:14

raven 조회 수:1874

"주류 경제학과 자유주의1"을 보고 씁니다.

1.


일단 저와 관련한 부분부터 얘기해보죠. 먼저 지적할 점은, 저는 "주류"란 말이 가치함축적 술어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효율적"이란 말이 가치함축적 술어라고 얘기한 적은 있습니다.
주류 경제학 같은 표현은 쓰지도 않은 hubris님의 글 및 그에 대한 님의 비판을 다룬 제 글들이
왜 갑자기 "주류" 경제학이 무엇인가란 엉뚱한 논의에 불려나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텍스트 해석을 그토록 강조하신다면, 일단 상이한 논쟁의 맥락들부터 구분해서

정리한 뒤에 논의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닥 관심도 없는 장하준이 주류인가 비주류인가란

문제에 괜히 제 논의를 끌어들여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고요. 제가 기다리는 건,

hubris님의 글에 제가 가한 비판들에 대한 답변들 뿐입니다. 아마 이미 준비하고 계실 테니,

그 때 저를 불러주시고 애먼 데에 저를 끌어들이지는 마시길.


이 점을 일단 양보하더라도, 김리벌님의 논의는 님 말 그대로 돌려주자면 정보값 0라서, 제가 더 코멘트할
부분이 없습니다. 정확한 기술이 필요하다면 할 말이 많아지겠으나, 그럴 가치도 없고 논점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저와 관련하여 쓰신 내용에서, "주류"가 가치함축적 술어가 아니라는 점에 관한 논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밖에 사실/가치 구분에 대한 논의는 너무 기초적인 내용이라서 이런 얘길 왜 쓰셨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입니다.



2.


다만 "효율적"이란 술어와 관련한 마지막 언급만 조금 얘기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면,

이것은 정도의 문제, 즉 계량적인(quantitative) 문제, 크기에 관한 문제이므로

크기와 관련된 근거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A가 효율적이다라는 사실명제의 술어에 가치함축이 있다는 명제는

적어도 제게는 정보값이 0입니다. (다른 분에게는 새롭고 의미 있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 가치함축으로 인한 왜곡의 크기가 얼마인지

그리고 그 왜곡을 교정했을 때 구체적인 선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유의미한 정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님은 사실/가치의 기초적 구분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가치는 사실의 왜곡이 아닙니다. "A가 효율적이다"란 명제가 가치 함축적이라는 말이,
이 명제는 사실을 왜곡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 명제가 어떤 당위 내지 규범에 대한
요구를 함축하며 그래서 거기에 함축된 당위 또는 규범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해 토론하지 않고
그것을 단순한 사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사실로 간주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양화되어 측정될 수 있는, 사실 관계 상의 오류, 왜곡이 아닙니다.
문제의 명제는 실재의 다양한 측면들을 효율성이라는 특정 잣대로 측정한 결과입니다.
A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 이는 실재 속에 있는, 분명한 하나의 사실입니다.
침대 길이가 2미터라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지만, 미터 자체는 사실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의 개념입니다.
마찬가지로 효율성이라는 이 기준 자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재를 재단하는 개념적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다른 기준이 아니라 이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지,
이 기준의 선택은 무슨 의미인지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 없이, 우리가 효율성의 기준을 사용하여
실재를 재단하고 그런 현실을 사실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다른 기준들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 실재를
놓치게 됩니다. 이는 부분적 현실을 현실 전체로 확장하는 오류로 이어집니다. 제가 앞의 글들에서

경제학주의를 비판했던 요지는 바로 그 점에 있었습니다.


경제학은 양적으로 정밀하게 규정된 효율성의 조작적 정의에 따라 여러 연구들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양화된 정의를 사용한다 해도, 그렇게 해서 연구하려는 대상이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일상 언어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이 자연과학과 경제학이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경제학은 인간 현실에 관계되는 한,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조작적인 정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가치 함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제학이 사용하는 여러 전문적, 기술적 개념들과

제가 말하는 가치 함축성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이 학술적으로 기술해내는 사실들은

결국에는 해석 작업을 통해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의미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학의 엄밀한 학술적 한계 내에 있는 사실 명제들은, 보다 큰 틀에서는 결국

가치 연관망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실과 가치의 이 매개를 망각할 때, 우리는

경제학의 명제들은 사실 은폐된 가치 명제라거나, 아니면 순수한 사실 명제라는 식의

도식화된 극단적 입장들을 취하게 됩니다.


제가 "효율적"이란 말의 가치 함축을 얘기한 것은 경제학주의와의 논쟁이란 맥락 속에서입니다.

여기에서 경제학주의란, 경제학이 생산해내는, 특정 잣대로 재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정치적, 윤리적 판단의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로 제시하려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이런 입장은 사실에 근거한다는 미명 하에, 정치적, 윤리적 토론의 장 자체를 삭제합니다.

마치 어떤 것이 사회에 좋고 옳은 것인지 경제적으로 계산해낼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마치, 경제적 인식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들(가령 도덕적, 윤리적 가치들)은 비합리적, 비이성적이기라도

한 양 말입니다. 하지만 이 비경제적 요소들 또한 엄연히 어떤 힘을 갖는 실재들이며,

사실 경제학이 다루는 경제적 현실 자체가 이런 비경제적 요소들에 의존해 있습니다.



3.


만약 제가 님의 주류 경제학의 정의에 대한 비판을 하려 했다면,

저는 그것을 가치/사실의 구분에서 접근하지 않고, "주류"란 통속적 관념이 과연

엄밀하고 유용한 학술적 개념일 수 있는지부터 따져봤을 것입니다.

과학은 다수결로 진리를 결정하는 담론체계가 아닙니다. 

어떤 명제가 사실이면, 아무리 많은 학자들이 부정해도 사실인 것이고,

과학은 이 사실의 힘, 진리의 힘만을 존중할 따름입니다. 이상적인 차원에서는 말이죠.

그런 점에서, "주류"를 아무리 통계적으로 양화해서 규정한들, 

저는 그것이 과학성, 학문성의 간접적 기준이면 모를까, 결코 직접적 기준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장하준의 논증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반증불가능하면 반증불가능하다고 하면 됩니다.

어느 진지한 학자가 다른 학자의 연구를 비주류라고 비판합니까?


님이 제시한 정의는, 경제학계 내에는 어떤 일관된 논증 규범들이 존재하며,

학자들이 그를 의식하고 그를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대표적인 몇몇 학술지의

논문 선별 기준으로 실질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전제를 놓고 있습니다.

저는 일단 이 점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

논증 규범이란 말 자체가 매우 폭넓고 광범위한 것입니다.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형식 논리학의 규범들을 모를 학자는 없고 그를 거부할 학자도

없습니다.

실제 연구 규범들은 그런 형식 논리학적 차원보다 복잡한 차원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 실제 연구 규범을 과연 찾아낼 수 있는지조차 여전히 과학철학계에서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어떤 이들은 객관적 사실의 판별과 관련한 내재적 기준들, 규범들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의 외재적 규범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철학의 표준 논의 운운하셨는데, 어느 과학철학자가 그런 식의 주류-비주류 개념을 갖고

과학성을 규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쿤식의 패러다임론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쿤의 얘기가 도대체 그런 식으로 번역될 수조차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다 제쳐두고라도

그게 "표준 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묻고 싶습니다.


과학철학이 철학 일반의 문제와 닿아 있는 측면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과학철학이 결국 이성, 합리성은 하나인가 다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성, 합리성의 통일된 규범을 "결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김리벌님의 논의는 이 질문에 아무 근거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 뒤에 모든 논의를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 실용주의적인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큰 오산입니다.

즉, 만약 그런 통일적 이성 규범이 있다고 가정한 뒤 논의를 전개시켰을 때,

보다 설명력 높고 유용한 결론들을 내놓을 수 있다 해서,

이 점이 애초의 가정이 옳음을 입증해주지는 않습니다.

가치가 사실이 아닌 것처럼, 유용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 그런 가정을 하고 도출해낸 결과들이 정말 실제로 더 유용한지조차

불투명하죠. 제가 보기에 김리벌님은 많은 경우 근거 없는 가정들만으로 실제 증명과 논증을 대체합니다.



"주류"란 말은, 권력 관계를 포함합니다. 다수가 주류가 아니라, 힘 있는 편이 주류입니다.

주류에 대한 일상 언중의 이해 방식은 그렇습니다.

님은 이런 주류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양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가치 함축적 측면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가치 함축적 측면이 제거되었습니까?

님이 말하는 주류는 하나의 객관적 사실입니까?

그 주류는,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권위 있는 잡지에 실릴 수 있는 논문이면 주류"란 얘깁니다. 

이로부터 그런 논문은 학문적으로 진리를 담고 있다란 얘기까지

나아가려면, 매우 많은 것들을 전제해야 하고 매우 많은 것들을

증명해야 합니다. 학자들의 상호 인용 체계가 견고하게 짜여져 있고,

님이 정의하는 식의 주류 집단의 외연이 아무리 탄탄하게 유지된다 한들,

이런 것들이 권위 있는 잡지에 실린 논문이 곧 참임을 보증해주지는 않습니다.

객관적 사실로서의 주류는 단지 힘 있고 논의를 이끌어가는 집단을

가리킬 뿐입니다.

김리벌님은 이로부터, 그런 집단은 어떤 합리적이고 합의된 연구 규범을

갖고 있고 그래서 그 집단의 승인은 곧 합리성의 승인과 같다고

부당전제합니다. 이런 식의 주류는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주류란 말의 정당한 사용과 그릇된 사용 간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용하신 새뮤얼슨의 세계화를 지지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에 관한 논문은,

주류 경제학이 무엇인지 님처럼 정의하지 않고 그냥 전제하고 사용합니다.

그리고 특정 문제에 대한 그 주류 경제학의 주장이 사실 옳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상호 인용 및 검증 체계의 틀을 거쳤으므로 그 학자들의 주장이 그냥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즉, 새뮤얼슨이 주류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냥 기술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 그대로 학계에서 힘 있고 널리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주장이 옳으냐는 별도의 검토가 항상 필요합니다.

김리벌님은 이런 별도의 검토를 주류에 속하느냐 여부로 대체하려 합니다.

그래서 님의 주류 개념은 기술적 의미가 아니라 규범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다 떠나서, 이렇게 얘기해보죠.



"장하준은 주류 경제학자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주장들이

틀린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습니다. 그의 주장들의 진위 여부는 별도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아마 이 말에 당연히 동의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 번잡하고, 스스로 인정했듯이

뻘짓에 불과한, 주류 정의하기를 치워버리고 장하준의 주장들 각각이

어떤 점에서 정당한 논증들이 아닌지 얘기하면 됩니다.

경제학의 본령이란 그런 구체적인 논증들에 있는 것이지, 누가 장하준의 주장을 인용했는지,

누가 그 논문에 대해 이상하다느니 논쟁적이라느니 따위 말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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