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에서 이분 글을 꽤 많이 읽어보았는데도 사진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아마도 50~60대쯤의 여성 영화칼럼니스트 정도로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달시라는 이름은 어쩐지 여자이름 같지 않습니까. 도로시나 루시, 스테이시 같은 이름 때문에 그런듯.

실제로 보니 백인 중년 남성인데... 검색해보니 72년생. 아직 젊은 축이잖아? 멀리서 본데다 머리가 회색이라서 훨씬 더 들어보이더군요.

 

퀴리부인님이 게시판에 소개해주신 덕에 오랫만에 영상자료원에 들러 이만희의 [휴일]을 봤습니다. 끝나고 달시파켓의 해설도 있었고요. 사실 귀차니즘 때문에 갈까말까 망설였는데 듀나님 리뷰에 '60년대 서울의 초라한 풍경을 완벽한 미장센으로 아름답게 찍었다...'는 내용을 보고 꼭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예전 서울 풍경에 대한 페티쉬 같은게 좀 있거든요.

 

제 기대만큼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60년대 서울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남산도서관 앞은 정약용 동상 없는 것만 빼면 지금과 별다를 것도 없더군요.  신성일이 거리에서 만난 여인과 돌아다니는 술집 거리에는 손으로 쓴 간판들이 늘어서 있고요. 이십년전쯤만 해도 뒷골목에서는 심심치않게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붓에 페인트를 묻혀 쓴 간판과 현수막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군요.

 

남산 언덕에서 모래 바람 이는 장면은 달시 파켓도 어떻게 찍었을까 궁금해 하던데... 화면상으로는 인적없는 곳으로 보여도 아마 가까운 곳에 전기를 끌어쓸 건물이 있었을 겁니다. 대형 선풍기 몇대 동원했겠죠.

돈많은 친구 역의 김순철과 공사장에서 격투를 벌이는 씬이 나오는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격투신이 생각보다 리얼하고 위험해 보여서 박진감이 넘치더군요. 못과 철근이 마구 튀어나와 있는 곳에서 마구 뒹굴고 넘어지는데 자칫하면 크게 다치겠다 싶더군요.  여기서는 임권택이 [장군의 아들] 격투신에서 써먹었던 부감샷이 나옵니다.

 

여주인공 전지연은 60년대 배우 같지 않게 현대적인 미모를 자랑합니다. 어떻게 보면 [깊은밤 갑자기]에 나왔던 80년대 배우 이기선을 닮았는데 그녀보다도 훨씬 요즘 미인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유일한 필모그래피이더군요. 예전 여배우들 중에 이런 케이스가 많죠.

 

돈이 없어 지지리 궁상인 슬픈 연인들 치고는 옷이나 구두가 너무 멀쩡합니다. 여주인공은 드라이한 머리에 팔목에는 꽤나 고급으로 보이는 시계까지 차고 있고요.

 

마지막에 신성일이 전차를 타고 원효로 종점까지 가서 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당시는 전차 운행이 종료되는 시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한국영화에서 실제 운행되는 전차에서 찍은 마지막 전차 장면이라고.

영어자막이 나오는데 전차를 subway라고 번역해 놓았더군요. 지하철이 나오려면 아직 몇년 기다려야 하고... 전차는 땅밑으로 들어갈 일은 절대 없는데 말이죠. 달시 파켓은 street car라고 지칭하더군요.

 

전차에서 내린 신성일은 "머리부터 깎아야겠다"고 중얼거리는데... 당시 심의를 받을때 이 대사를 "머리깎고 군대에 가야겠다"로 바꾸면 상영을 허가해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거절하고 이 영화는 개봉 없이 곧바로 창고에 처박혔다가 2005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되죠.

 

[만추]가 지금이라도 필름이 발견된다면 [휴일]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만희의 최고 걸작을 만추가 아니라 휴일이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달시 파켓은 말합니다만... 머... 그건 발견된 후에 이야기해 볼 일이고요.

김수용의 만추로 이만희의 만추를 유추해 본다면.. 제 생각엔 그래도 만추가 휴일보다는 더 잘만든 작품이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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