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트님의 "[뒷북] 제 3자가 바라보는 장하준 논쟁(?)....."을 읽고 씁니다.


'주류'란 말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좀 정리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학계에 '주류'가 있느냐, 있다면 어떤 입장이 주류인지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되느냐란 질문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분명 널리 인정받는 주장들, 입장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학문에 '입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위험은, 이런 이점으로부터 곧바로 '주류'를 학문성 자체와 직결시키려는 시도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과관계의 혼동이 있습니다. 주류는 결과입니다.

어떤 입장이 학문적으로 옳을 때, 그 입장은 결과적으로 주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으로, 주류의 입장이 곧바로 학문적 옮음의 보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입장이 학문적으로 옳다는 것과, 어떤 입장이 널리 인정받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상호함축 관계 또는 직접적,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양자의 관계는 간접적, 매개적입니다.

옳은 입장이 널리 인정받기까지는, 여러 학문 외적 힘 관계들이 개입합니다.

작게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진 지배 언어의 사용 여부, 여러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권력과의

친화성 여부를 비롯한 복잡한 권력 관계망이 있습니다.

(물론 이 권력 관계망은 학문에 따라 그 개입 정도에서 편차가 있습니다.

아마도 수학을 비롯한 공통의 형식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연 과학의 경우

외적인 권력 관계망의 개입은 여타 학문에 비해 적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과학사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자연 과학 역시 사회적 권력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학문의 주류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입문"에 유용하지만,

일단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뒤에는 각각의 입장들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검토하면서

스스로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류를 형성하는 입장은 분명 완전히 틀린 입장은 아니고 대체로 옳은 주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장의 정확히 무엇이, 어느 정도까지 옳은지는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주류를 형성한다고 보는 입장도 알고 보면 단일한 하나가 아니라

때로는 양립 불가능하기까지 한 차이들을 가진 다수의 입장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류' 자체가 '어느 수준에는' 허구적인 것이며,

주류에 대한 공부는 어디까지나 입문 수준에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류'란 말로 학문적 탐구에 접근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입문자, 초심자에게 어떤 입장들을 공부해야 하는지만 가리킬 뿐,

그 입장들 자체의 타당성은 당연히 늘 별도의 검토를 요구합니다.


만약 '주류'란 말이 입문, 개괄을 위한 것 외에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세싸움을 위한 것입니다. 이미 상이한 입장들 자체를

하나로 묶어 주류로 만들고, 그에 속하지 않는 입장들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죠.


김리벌님의 사례가 이에 해당합니다.

김리벌님이 '주류'란 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뻘짓으로까지 보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매합니다. 주류는 때로는 한 학문 내에서 비주류와 대비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학문성과 대립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류 경제학을 학문적 규범성의 구현 자체로 말할 때, 비주류 경제학은

사실 경제학이 아니라 그저 사이비 학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을 그보다 세부적으로 어떤 특정 전제들에 기초한

입장으로 볼 때, 비주류 경제학은 여전히 학문입니다.

(이런 이중성은 세간티니님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김리벌님의 '주류'에 대한 조작적 정의는

이렇게 기초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한

방증에 다름 아닙니다.

그 양적 정의의 지시 대상은 제가 전에 말한 대로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릴 수 있는 논문들의 집합"인데,

이 정의로부터 이 집합이 정작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결코 직접 도출되지 않습니다. 

그 집합에 들지 않으면 사이비 경제학인지, 아니면 단지

경제학의 소수 의견일 뿐인지조차 불분명합니다.

김리벌님은 다른 규범에 따른 다른 활동이라고 얘기합니다만,

이 말 자체가 앞의 두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는,

전혀 명료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장하준이 경제학의 학문적 규범성에 맞지 않는 연구들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면서 장하준을 단지 비주류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이비 경제학자로 분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하준은 비주류이고

비주류는 비주류 나름의 연구 방법론이 있으니 각자의 취사선택 문제라고

얘기하는 게 김리벌님의 입장입니다.


거듭 얘기합니다만, 장하준의 논증들이 문제라면 직접 반박하면 됩니다.

주류니 비주류니 쓸데없는 딱지를 붙이는 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론삼아, 반복을 무릅쓰고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교과서에 실리고, 많은 학자들이 인용하는 논문들, 입장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지식입니다.

하지만 교과서에 실리고, 많이 인용된다는 사실이 곧 그런 입장들이

옳음을 직접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입장들을 다 일일이 검토해볼 수는 없고,

권위와 다수의 인정은 아마도 그 입장들의 옳음을 나타내는 간접 증거

일 것입니다.


그래서 초학자는 주류 입장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학문을 시작합니다.

그 초학자는 공부가 깊어감에 따라, 주류 입장 내의 다양성에 눈을

뜰 것이고, 비주류로 치부했던 입장들이 가진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발견할 것이며, 학문적 규범성, 연구 방법론이란 말로 단순하게
뭉뚱그릴 수 없는, 이성의 다원성을 주어진 사실로 확인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중요한 것은 주류, 비주류의 막연하고 도식적인

구분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교과서는 교과서일 따름이죠.


반대로, 어떤 초학자는 그 수준에서 갖게 마련인 도식적 지식들의 명석판명함에

도취되어, 그 수준에 맞춰 입장들을 재단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는 교과서와 개론서가 그어놓은 한계 너머로 자신의 교과서적,

개론서적 이해를 확장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입장을 비주류로

선언하면서 그를 간단히 기각하는 우를 범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어떤 입장이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즉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리지 않고 인용이 많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입장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류에 속하느냐 여부로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만큼 비학문적인 태도도 없습니다. 여기에, 주류란 말의

그릇된 사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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