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을 좋아하세요.

2018.11.02 21:48

크림롤 조회 수:1954

정가영감독의 오랜 팬이에요. 


개봉 첫날인 어제는 일이 있었기에, 


오늘 용산CGV박찬욱관에서 그녀의 장편 <밤치기>를 보았어요. 


그녀의 다른 장편 <비치온더비치>만큼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재밌고, 유쾌하고, 슬프고, 애닲고, 쓸쓸했죠. 


쨌든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듀게에 글을 씁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약간 스포가 되지만,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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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저 오빠랑 자는 거 불가능하겠죠?"  "응. 불가능해... 너 원래 이런 식으로 얘기해?"


'여자(정가영 분)'와 '남자(박종환 분)'는 둘이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감독인 '여자'역의 가영정이 '남자'역의 박종환을 캐스팅한 상황입니다. '여자'는 사실 다른 속셈이 있습니다. '남자'를 꼬시고 싶은 거죠. 그래서 '영화를 위한 자료조사'를 빌미로 술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다가 대차게 거절당하는데, 그게 보는 입장에서조차 뼈까지 아팠어요. 제가 '여자', '남자'라는 단어에 작은 따옴표를 사용한 이유는 엔딩 크레딧에 그렇게 명시 되어 있어서에요. '여자' 역에 가영정. '남자'역에 박종환. 참 인상 깊은 배역명이잖아요. 저는 좀 뜬금 없이 거기서 '시대의 트렌드가 어떠하든 난 신경 안 쓰고 내 영화를 찍고야 말겠다' 라는 독립영화 감독으로서의 정가영의 포부?가 느껴졌어요. 정가영 감독이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여러 매체에서 밝힌 '짝'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오마쥬일 수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술자리에서의 치기어린 고백을 대차게 거절 당했으니까, 가영정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 그럴 때 느껴지는 슬픔. 그런 어떤 보편적인 정서. 그 애닲음을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될정도로 정가영 배우가 정말 예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제 영화를 위한 '자료조사'를 더 이상 할 힘이 없는 가영정은 애처롭게 5분만 역할을 바꿔보자고 조릅니다. 남자는 거절합니다. 그러자 가영정은 스릴러로 장르를 설정해서 자신을 취조해보라 합니다. 남자는 그 요청을 수락하고 가영정을 '남편을 죽인 여자'로 상정하여 자료조사를 실시합니다. 왜 하필 남자는 여자에게 그런 역을 맡게했을까요? 알 수 없죠. 어쩌면 감독도 모를 지도요. 어쩌면 감독의 시나리오대로가 아니라 그저 박종환 배우의 즉흥적인 느낌이 촬영 당시에 그러했고, 그렇게 갔고, 그게 감독이 보기에도 괜찮아서 오케이를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가영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여러 매체에 이야기해왔으니,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그러다가 남자도 (방금 자기가 찬 여자에게 아무리 상황설정이라도) 이렇게 대하는 건 아니다 싶었는지, 가영정의 역할을 교통사고 당해서 죽은 여자로 바꿔줍니다. 이게 참 남자의 인간적이고 자상한 면모 같았어요. 정가영 배우가 방금 눈앞의 상대에게 차여서 울 것 같은 거를 매너있게 못본척 해주기 위한 방식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이제 울어도 되잖아요. 교통사고 당해서 죽은 여자가 되었으니. 


핸드폰을 판매하는 3:3인생의 '아는 형'(형슬우 분)의 연기도 참 좋았어요. 처음 등장했을 땐 '정말 상투적이고 진짜 싫은 캐릭터다' 싶었는데... 계속 극이 진행될수록 매력있게 다가오더군요. 사실 그래요. 여자역의 여자(정가영)랑 남자역의 남자(박종환)은 그닥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에요. 결정적으로 <봄 날은 간다>를 인생 영화로 꼽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영화를 봤음에도 그 엔딩을 기억 조차 제대로 못하죠(왠지 박종환 배우가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단 의심이ㅎ). 여러가지 면에서, 이를테면 대화의 쿵짝이나 취향등에서 여자는 남자의 아는 형(형슬우)와 잘 맞지만, 여자가 원하는, 추구하는 '경험'은 혹은 '체험'은 그런게 아닌 것 같아 보이네요. 사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사랑을 거절하면서도 그 자신의 존엄을, 또한 그렇게 하는 와중에도 상대방의 존엄을 지켜줄 수 있을만큼 '튼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일 걸 알면서도 들이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여자'의 무의식은 그렇게 다뤄지는 경험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게 영화 속 '여자'라는 인물이 실패율이 높다는 걸 스스로 알면서도 계속 그런 적극적 구애의 경험을 추구해온 원인이기도 할 것 같고요. 어쩌면 프로이트가 정말 맞아요. 정가영 감독은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에서 여자친구 있는 남자들에게 줄기차게 대시하는 '여자' 역을 주로 맡거든요. 그녀가 연기하는 그런 영화 속 인물들...의 쉬이 사랑에 빠지는 기질이나, 사랑 그리고 애정을 조르는 듯한 행동은 성숙한 성인(adult)간의 이성애적 감수성과 약간 결이 다르다고 보여져요. 이성애 보다 훨씬 더 깊고 내밀한 인간 내면의 차원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보편적인, 최초의 사랑과 최초의 서러움의 기억을 그 인물이, 또한 감독으로서의 정가영이 탐색하고, 다루려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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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와 노래방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 어둑어둑한 길목, 형슬우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해주세요.'라고 말해서 값싼 위로 혹은 '위안'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상상도 여자는 잠깐 해보는것 같아요. 이 잠깐의 상상의 장면(이라고 저는 보는데, 여자의 상상 혹은 여자와 형슬우 모두의 상상일 수도 있고...)이 제가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어 이런 단어를 쓰기 조심스럽지만, 정말 영화적으로? 탁월하게 연출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칠게 말해서 하룻밤 대쉬가 캐쥬얼해 보이는 '여자'와 '아는 형'이라는 두 인물은 마치 동족-동족 쌍이어서... (마치 '동성동본' 같은...) 그래서 그들은 이루어 지기 쉽지만, 또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여자는 형슬우와 키스를 하는 그런 상상도 잠깐 해보지만... 오늘 밤. 아무래도 '여자'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남자'가 아니면 도저히 안될 것 같습니다.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형슬우를 단호히 돌려보내고, '남자'를 잠깐만 나오라고 호출. '밤'에 마지막 '치기'를 부려봅니다. 남자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 요청을 군말 없이 들어줍니다. 눈 내리는 겨울 길을 걷는 장면(캐롤의 엔딩장면도 떠오르더군요). 카메라가 두 사람의 서로를 만나러 가는 그 걸음 걸이를 등 뒤에서 바짝 따라갑니다. 영상이 정말 아름 답습니다. 한국의 평범하고 현실적인 밤골목을 이렇게 낭만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없을 것 같아요. 남자와 여자는 다시 만나고 그녀는 실패율이 높다는 그녀 자신의 말처럼, 실패합니다. 







덧) 며칠전에 가영정 유튜브에 무료로 풀린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를 영업해봅니다. 


원래 긴말 않고, 이 단편만 영업하려 했는데,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어졌네요.


이 채널에 있는 그녀의 다른 단편들도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귀엽고,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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