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time goes by

2019.08.03 19:33

어디로갈까 조회 수:906

- 오전
발등 화상사건 후로 새벽산책을 끊었다가 오늘 두 달만에 나갔습니다. 토요일 이른 시간이라 공원이 거의 비어 있었는데 조깅 중인 청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달리는 소리가 정도 이상으로 큰 반향을 내더군요. 시선을 끄는 소음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는 운동화 끈이 풀린 채로 빙빙 돌며 달리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 놀라지 않도록 무심한 어조로 알려줬죠. "운동화 끈이 풀렸네요. 밟으면 위험합니다." 
누가 자기에게 말걸 리가 없는 상황에서 말을 걸었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잠시 경직되었지만 곧 환한 미소를 짓더니 조심스런 걸음으로 화단 쪽으로 가 무릎 높이의 돌난간에 발을 올리고 운동화 끈을 조였습니다.

4, 5 분이 지나서, 이번에는 그가 걷고 있는 저를 불러세웠어요.. 그러더니 불쑥 제 앞으로 내민 건 금박 포장지에 싼 탁구공 만한 초콜릿 두 알이었습니다. 아, 이건 좀 난처한 인사군~  싶었지만, 상황을 빨리 종료시키기 위해선 목례하며 받을 수밖에 없었죠.  (단맛을 싫어해서 사는 동안 초콜릿을 강제에 의해 딱 두 알 먹어봤음.- -)
잠시 후, 조깅을 마친 그가 잔디밭에 벗어둔 윈드자켓을 걸치며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옷을 뒤집어 입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번에는 지적해주려다가 참고 말았습니다. 끈을 밟고 넘어지는 건 미리 경고해 줄 만한 일이지만, 옷을 뒤집어 입고 다니는 거야 뭐 어떠랴 싶어서요. 그순간 제 입가에 번졌던 미소를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뒤집힌 옷차림으로 부디 여러 사람을 웃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 오후.
집에 있으니 자꾸 눕게 되는 그 까부라지는 느낌이 싫어서, 물과 시집 두 권을 챙겨 근처 성당으로 가 뜨락 벤치에 앉아 읽었습니다. 사실은 읽다가 말았어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시, 편마다 준비된 답을 나열해 놓아 무의미한 끄덕임을 반복하게 하는 시는 지루합니다. 저는 선량한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선량한 시들은 대부분 선량함을 표방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조급하게 증명하고 싶어하는 포즈를 저 같은 독자가 금방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시인이 좀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마치 바람이 불지 않아도 깃발이 펄럭이는 형세같아서 그게...

그렇지만 바람 없이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또한 시의 세계일 것입니다. 기이한 표상만으로도 세계가 이뤄지고, 그 표상이 다른 세계로 열린 문을 보여주고, 그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 들어와, 문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르게 감지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이건 대단히 관념적인 사고죠. 그러나 이 관념은 구체적인 감각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제가 자연이 발산하는 감각들의 넘침에 취해 있었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는 몇년 전 서울시에서 조경 1등의 평가를 받은 곳인데, 7~ 8월의 풍경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그런 오후였어요. 태양이, 나무들이, 따뜻한 바람이 저를 둘러쌌고, 저는 미사가 없어 조용한 성당 뜰에서 여름의 풍성한 울타리를 느끼며 힐링했습니다. 오랜만의 일입니다.
괴테풍의, 잠언풍의, 교과서풍의 말이지만, 자연에는 인생 전체에 대한 비유가 살아 있죠. 풀잎과 나무들을 보면, 그 생장의 역사와 운명에서 모든 삶의 문법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자연 속에서는 권태, 지루함, 사나움을 잊거나 덜 느끼게 돼요. 성당에 딸린 작은 공원이었지만,  깊은 숲속에 있는 듯 멍한 가운데 소리없이 몇 시간이 휙 지나갔습니다.

매순간 깨어 있었는데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떤 결 고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아름다움에게 얻어맞아 비틀거리는 느낌으로 지낸 한나절이었어요.

- 지금
두어 시간 째 마른 천둥이 무섭게 우르릉대서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베란다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바로 아래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데 주말 밤에는 아이가 아닌 청소년들이 점령하고 떠들떠들 노는 공간이에요. 지금도 고딩(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앉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휴대폰으로 옛노래를 듣고 있네요. 초집중해서 귀기울여보니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제곡 'As time goes by'입니다. (10~20대에게 뉴트로가 유행이라더니...)
"The fundamental things apply. As time goes by."
근본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죠.
이 가사에는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extra dimension 여분차원'의 뉘앙스가 깃들어 있어서 여운이 진해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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