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러분은 페미니즘 좋아하나요? 하긴 대체로 좋아하겠죠. 나는 그렇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페미니즘의 불꽃이 더욱 타오르기를 바라곤 해요. 페미니즘이란 건 누군가에겐 확실히 유용한 도구이자 사다리거든요. 그걸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페미니즘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라고 굳이 묻는다면 싫어하는 쪽에 가깝겠죠. 어쨌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시끄럽고 짜증나니까요. 하지만 페미니즘이 있는 세상이 재미있는가 없는 세상이 재미있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있는 쪽이 재밌어요.


 

 2.아니 진짜로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던데...다른 이념들보다 특별히 더 싫어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페미니즘은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데 내가 싫어할 필요가 없잖아요? 어차피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법으로 신분상승을 해내야만 하죠. 우리들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하나...신분상승이니까요.


 페미니즘도 누군가의 신분상승 수단이 될 수 있어요. 실제로 그러는 중이고요. 다른 놈들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신분상승을 해내는 걸 구경하는 게 나의 여흥이라서 페미니즘이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기를 바래요. 구경거리가 하나 줄어드니까요.



 3.다만 문제는, 내 생각보다 페미니즘의 불꽃이 빨리 꺼지고 있어요. 약빨이 점점 안 먹히고 있다고요. 2015~7년에는 정말 기세가 대단했잖아요. 페미니스트들은 기세등등했고, 남자들도 여성들의 피해자 서사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어서 모두가 동조하는 흉내라도 내야 했죠.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뭐라고 말만 하면 어지간히 논리나 이해관계에서 앞서 있어도 한수 접어줘야 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무언가를 팔아대면, 좀 조잡한 물건이라도 사람들은 돈을 내고 사 주곤 했고요.


 당시에 '씨발, 이 지랄맞은 광기가 못해도 10년은 갈 것 같아.'라고 투덜거리는 마초들을 보며 한동안은 페미니즘이 세상을 잡겠구나...라고 주억거렸죠. 한데 남자들은 의외로 빠른 속도로 대응논리를 개발해내고 의외로 빠른 속도로 결집하고 있어요. 남자들 주제에 말이죠.


 게다가 요즘은 '그냥 페미니즘은 좋은 거, 래디컬 페미니즘은 나쁜 거'라고 외치던 남자들조차도 '페미니즘 하는 것들은 모조리 정신병'이라고 외치기 시작했고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죠?



 4.휴.



 5.어째서 이렇게 반발이 거세지는 건가...라고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페미니즘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밑천을 소모한 것 같아요. 페미니즘 열풍이 현실에 스며들다가 미투운동으로까지 전개되면서 고발 한방에 탑급 배우를 몰락시키고 고발 한방에 현직 의원을 낙마시키는 파워를 보여준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하긴 생각해 보면 그래요. 배우는 연예인이니까 뭐 그렇다고 쳐도, 국회의원 금뱃지는 아무나 다는 게 아니예요. 국회의원은 일개 직업이 아니거든요. 공인된 귀족 신분이죠. 정말...당선만 되면 몇년 동안 말도 안 되는 파워를 가진 사람이 되는 거라고요. 그런 사람을 아무런 증거 없이 고발만으로 그냥 떨어뜨려 버릴 수 있다는 걸 감안해보면 페미니즘은 정말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이념이었던 거예요. 문제는 그 잠재력을 진득히 잘 키워서 제대로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한번에 바닥까지 긁어내서 발산해버렸다는 점이겠죠. 시도때도 없이 미투를 걸고 넘어지고, 젠더 감수성 들먹이고, 온갖 패악질과 욕설을 있는 대로 하고 다니는 놈들 때문에요.


 

 6.적당히 남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서사를 전개하면서 몇 년에 걸쳐 어린 아이들을 단계적으로 세뇌시키고 끓는 물 속 개구리를 죽이듯 조금씩 온도를 올렸으면 사회를 장악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몇몇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너무 신바람이 난 나머지 불필요한 힘의 과시에 지나치게 집중한 거예요.


 불만분자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거든요. 한 2017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 세력은 불만분자들을 잘 진압하고 있었어요. 진압할 수 없는 종류의 불만분자들에겐 '부적응자 한남들' '한심한 루저, 사회의 패배자들'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조롱하고 고립시켰고요. 영리하게 잘 하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지나친 힘의 과시가 불만분자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요. 회색분자들에겐 고개를 돌리게 만들고요.



 7.그래서...나는 몇몇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싫어해요. 걔네들에겐 1세대 페미니스트(인터넷 세대 기준)로서, 페미니즘이라는-후배들에게 잘 물려줘야 할 금과옥조를 전수해야 할 임무가 있었죠. 페미니즘으로 꿀을 적당히만 빨았어도 아직 페미니즘 완장이 유효했을걸요.


 한데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완전히...자기가 퍼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은 놈들이란 말이죠. 후배들도 계속 나눠마셔야 할 우물에 말이죠. 불필요한 힘의 과시에 집중하다 보니 어그로를 있는 대로 끌어버렸잖아요.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것에도 관심없고 같은 편끼리 유산을 이어가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그냥 자신의 초라한 인생, 순간적인 기분만 나아지면 된다는 몇몇 사람들의 못난 근성 때문에요. 위에는 신분 상승이 중요하다고 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팀 플레이를 못하는 놈들은 머리가 정말 나쁜거고 인격도 덜된 거예요. 그게 자기 혼자만의 우물이면 얼마든지 빨아먹어도 되겠지만 자기 혼자만의 우물이 아니잖아요?


 물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헛발질에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정말 재미없게 되어버렸어요. 한 10년만 우아하게 굴면서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넓혔으면 페미니즘이 현대의 기사도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남자들에게만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에티켓 말이죠. 



 8.현대 사회란 게 그렇잖아요? 여성들의 야만성은 '멋있고 쿨한 것'쯤으로 인정받지만 남성들의 야만성은 제어되고 제거되어야 할 독성으로 취급되니까요. 오죽하면 '독성 남성성'이란 용어가 나왔겠어요?


 그야 지금도 종종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군가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 '은성아, 넌 마음속에 페미니즘을 믿고 받아들였니?'라고 물을 수 있어요.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겠죠. '페미니즘 전도사들은 시간당 얼마를 받니?'라고요. 


 하지만 페미니즘이 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면? 법보다 페미니즘이 우선되는 사회라면? 내가 어느 그룹에 가자마자 대뜸 '은성아, 마음속에 페미니즘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였니?'라고 사람들이 묻는 게 일반화된다면? 그 때는 '물론입니다. 페미니즘 서적들을 모조리 읽은 덕분에 저의 독성 남성성은 제거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겠죠. 일체의 빈정거림 없이요.


 그렇게 대답하지 않고 빈정거리는 대답을 한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테니까요. 그 세계에서는요.


 '그래? 너를 위해 너의 독성 남성성을 우리가 제거해 줘야겠구나. 물론 물리적으로 말이야. 아, 고마워할 필요는 없단다. 네가 남은 평생을 괴물로 살지 않아도 되도록 도울 의무가 우리에겐 있으니까. 자, 수술을 시작하자.'



 9.하지만 젠장...페미니즘 완장이 힘을 잃어가고 있단 말이죠. 밤이 늦었네요. 아니...밤이 늦은 게 아니라 이제 아침이군요. 사실 여기까지가 서론이었고 이제야 본론을 얘기할 차례인데...이젠 자야 하니까 이건 다음에 이어서 써보죠.


 어쨌든...나는 진짜로 그렇게 믿어요. 나의 친구들이든 나의 친구들이 아니든 간에, 우리 모두에겐 사다리가 필요하다고요. 다른 사람들이 신세 한번 펴보자고 나름대로 궁리하는 것들에 딴지를 놓고 싶지는 않아요. 그 수단이 어지간히 짐승같지만 않으면 말이죠.


 내가 진짜로 혐오하는 건 같은 편끼리 함께 올라가야 하는 사다리를 부러뜨리고, 함께 나눠 마셔야 하는 우물을 혼자 다 퍼마시는 소시오패스 놈들이예요. 위에 쓴 래디컬 페미니스트 같은 놈들이요. 그래서 나는 그럴 일이 없도록 아예 혼자서 사다리를 올라가고 혼자서 우물을 퍼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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