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

2019.03.12 15:57

흙파먹어요 조회 수:842

박찬일 요리사의 말마따나 맛의 절반은 추억이지만, 떡볶이만큼은 초등학교 앞에서 사먹었던 떡볶이가 진짜로 맛있었습니다.

하교 시간이 가까워오면 문방구 옆 구멍가게 아주머니께선 얼른얼른 밥을 잡수시고 일어나
판데기처럼 커다란 조리구에 물, 설탕, 미원, 고추장을 아낌없이, 또한 대충 턱! 턱! 퍼 넣으셨습니다.
집에선 재현 불가능한 강불에 휘휘 저어가며 훅 익혀내면 그 어느 별미보다 맛있는 떡볶이가 금세 완성이 되는 거지요.
그걸 딱 다섯 개 담아 100원에 팔았는데, 지금이야 겨우 100원이지만, 라면 한 봉지가 100원
(그러니까 이게 노태우 때 얘기에요)
이었던 시절이니 결코 싼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 프로레탈리아의 자식들이라 없이 살기는 매한가지라 그걸 도저히 사먹을 길이 없었는데,
다행인 것은 저희에겐 윤재라고(실명) 아버지께서 가전제품 밀수업에 종사하시어
정원에 분수가 있는 으리으리한 이층가옥에 개를 집안에 들이고 사는 부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하교를 할 때 하다못해 신발주머니라도 잠깐 들어주면
바로 그 매끈매끈 붉은 실루엣이 농염한 떡볶이 하나를 얻어 먹을 수 있었어요.
하교길 내내 신주머니를 들어줘야 겨우 밀떡 하나를 얻어먹을 뿐인데,
그게 뭐라고 그 조차 경쟁률이 치열했습니다.

그럼 윤재는 무려 한 개에 500원을 하는 햄버거를, 뭐 이것쯤 하는 표정으로 씹으면서
100원 짜리 하나를, 마치 "여기 글렌피딕 더블" 하듯이 목로 위에 놓아 두고
그날의 시종들이 각자 하나씩 떡을 나눠 먹는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고는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비굴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가오가 있지 어떻게 남의 가방 따위를 들어주고..
다만, 숙제를 대신 해줬을 뿐.

가끔 간식으로 떡볶이를 사먹는데, 아무래도 사오는 사람의 입맛에 결정이 되다보니까(돈은 내가 내는데)
그때 그 매콤달콤한 맛의 떡볶이가 아닌, 도대체 얼마나 더 매워질 셈인지 그 새빨간 속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맛으로 혀를 괴롭히게 됩니다.

정말 가끔은 먹는게 괴로울 정도여서, 에이 니들이나 먹어! 젓가락을 탁 놔버리면,
마치 우문에 현답이라도 적선한다는듯이 "치즈를 섞어 드세요" 따위의 말을 합니다.
아니, 치즈로 맛을 죽일거라면 애초에 안 맵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늙어서 매운 거 먹으면 오늘 혀만 매운 게 아니라 내일 똥꼬도 맵다니까?

여튼, 어여쁜 일본 처자(카오루상♥)가 한국 음식을 리뷰하러 다니는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는데,
그녀뿐 아니라 외국인들 사이에 한국의 맛이란 끝간 데 없이 매운 맛으로 각인이 돼가는 것 같습니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서 김치랑 육개장에 먹는 괴이한 민족이 맞기는 한데,
제가 기억하는, 적어도 금강 이북의 입맛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렇지가 않았어요.

본래 전라도 맛의 대척점을 경상도가 아닌, 평안도의 그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 맛도 저 맛도, 내 맛도 네 맛도 아니지만, "슴슴하다"는 고유어로 굳이 겁을 만들어 아는 사람끼리 환장하는 그 맛.
일단 한번 잡숴봐, 너 며칠 있다가 오밤중에 갑자기 생각난다 장담하게 하는 그 맛.
서울의 맛은 굳이 따지자면 그 맛에 더 가까웠다는 거지요.
여기서, 그럼 서울의 맛만 한국의 맛이냐? 성을 내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만,
굳이 따지자면 금강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면적을 따져볼 때
매앱고, 쯔아고, 양념이 쎈 맛이 한국의 맛으로 인식 된다면 그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서 문득, <그대 그리고 나>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납니다.
신인배우 손승헌이 이본을 짝사랑 하는 꼬맹이로 나왔던 그 드라마. 거기 이런 장면이 나와요.
신혼 생활의 스트레스로 열이 오르는 최진실. 이모 박원숙 씨와 만나 어마어마하게 매운 떡볶이를 먹으러 갑니다.
매운 양념에 부채질까지 해가며 "매운거 먹으니까 스트레스 확 풀리지?"라는 대사를 주고 받던 그녀들.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무렵이었을 겁니다. 해찬들 태양초 고추장이 "맛있게 맵다"는 카피로 대성공을 거둔 것 또한.

그때, 외환위기 때였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1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7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68
125981 기생수 더 그레이 (스포) [3] skelington 2024.04.14 313
125980 [일상바낭] 백수 1주차입니동ㅎㅎㅎ [9] 쏘맥 2024.04.14 273
125979 '라스트 콘서트' [10] 돌도끼 2024.04.14 238
125978 [티빙바낭] 감독들과 배우 이름만 봐도 재미 없을 수가 없는 조합!! 'LTNS' 잡담입니다!!! [8] 로이배티 2024.04.13 429
125977 리플리에서 일 마티노 지 보고 마침 이강인 기사 daviddain 2024.04.13 129
125976 프레임드 #764 [6] Lunagazer 2024.04.13 49
125975 2024 코첼라 시작 [4] 스누피커피 2024.04.13 290
125974 칼라판 고지라 - 아마도 고지라 최고의 흑역사? [6] 돌도끼 2024.04.13 222
125973 넷플릭스 [리플리] [11] thoma 2024.04.13 359
125972 Eleanor Coppola 1936 - 2024 R.I,P, [1] 조성용 2024.04.13 143
125971 #기생수더그레이 6화까지 다보고..유스포 [5] 라인하르트012 2024.04.13 417
125970 [웨이브바낭] 알뜰 살뜰 인디 아마추어 하이스트물, '터보 콜라' 잡담입니다 로이배티 2024.04.13 124
125969 [KBS1 독립영화관] 교토에서 온 편지 [2] underground 2024.04.12 232
125968 프레임드 #763 [4] Lunagazer 2024.04.12 54
125967 넷플릭스 시리즈 종말의 바보 공식 예고편(이사카 코타로 원작, 안은진 유아인 등 출연) [2] 상수 2024.04.12 298
125966 칼 드레이어의 위대한 걸작 <게르트루드>를 초강추해드려요. ^^ (4월 13일 오후 4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 마지막 상영) [2] crumley 2024.04.12 144
125965 '스픽 노 이블' 리메이크 예고편 [4] LadyBird 2024.04.12 201
125964 리플리 4회까지 본 잡담 [3] daviddain 2024.04.12 220
125963 란티모스 신작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 티저,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놀란영화 12편 순위매기기 상수 2024.04.11 190
125962 [왓챠바낭] '디 워'를 보고 싶었는데 없어서 말입니다. '라스트 갓파더' 잡담입니다 [13] 로이배티 2024.04.11 32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