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보고...잡담(스포)

2019.06.01 15:19

안유미 조회 수:2004


  #.감상을 쓰기 전에 한마디 하자면, 나는 현실에서 권위와 무게감을 빌려와 놓고는 그것의 개연성은 신경 안쓰는 창작자들은 안좋아해요. 현실에서 무언가를 빌려서 이야기 속에 끌어넣는 건 이야기에 쉽게 긴장감과 몰입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런데 그 대상이 현실에서 가지는 권위와 무게감만을 빌려와 놓고 책임을 안 지는 놈들은 돈을 꿔놓고 안 갚는 놈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밑에 어떤분이 기생충을 꽤나 혹평했더라고요. 하긴 관점만 살짝 바꾸면 이 영화는 노크 노크나 퍼니 게임이나 마찬가지인 영화예요. 선량한 박사장 입장에서 보면 어느날 불쑥 나타난 악독한 사람들이 가정을 박살내버리고 나서 사과는 커녕 자기연민에 빠져서 찌질대는 스토리니까요. 


 그러나 애초에 이 영화는 현실적인 내용이 아니예요. 일종의 우화라고 보는 게 낫겠죠. 벤츠에 있는 블랙박스를 돌려볼 생각도 못한다거나, 조금 전까지 로얄샬루트와 발렌타인과 싱글몰트 위스키를 펼쳐놓고 술판을 벌이던 곳에서 술냄새를 맡지 못하는 걸 보면요.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쓰기보다 그냥 캐릭터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영화에 대한 감상은 나중에 써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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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엾은 박사장(이선균)-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 시대의 가장. 사실 박사장을 죽어야 할 만큼 나쁜 놈이거나 죽어야 할 만큼 재수없는 캐릭터로 만드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었겠죠. 박사장 자체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면 영화에서 천착해야 할 계급의식이 희미해지니까요. 박사장의 '계급'이 아닌 '인간성'에 포커스가 가버리는 건 아마 봉준호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서 봉준호는 박사장을 꽤 괜찮은 놈으로 만든 거 같아요.


 문제는 박사장이 아무리 봐도 너무 좋은 사람이란 거예요. 자신이 책임져야할 가정에 돈만 벌어다주는 게 아니라 진짜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잖아요? 그는 무려 집에 들어온다고요! 밖에서 다른 여자와 며칠 놀다오거나 이상한 가게에 가거나 하지도 않고 꼬박꼬박 집에 들어와요. 게다가 회사를 운영하느라 힘들 텐데 그나마 쉬는 날에 아들을 데리고 캠핑까지 가요.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 따윈 아예 없어 보이고요.


 누군가는 '뭐야? 그런 걸 안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라고 할 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그는 일반인이 아니예요. 나름대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낸 남자란 말이죠. 저 정도의 자산을 가진 사람이 폭군 짓을 안하고 돌아다닌다? 게다가 게이조차도 아니예요! 그는 여자를 좋아한다고요! 그런데 딸이 고교생이 될만큼 오랜 결혼생활을 했는데도 아내를 섭섭하게 하지도 않아요.


 또한 박사장은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회사에 숟가락 올린 것도 아니예요. 중간에 잠깐 나오는 회사 장면에서 업종을 보아하니, 저건 부모에게서 이어받아서 하는 회사는 아닌거거든요. 그리고 추측해보자면 부모에게서 자본을 받은 것도 아닐거예요. 부모가 회사 초대 투자자일 정도로 입김이 세면 단독 주택에서 같이 살고 있겠죠. 적어도 작중에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보면 그는 자수성가로 저런 단독주택에 살 수 있을정도로 성공한 남자인 듯해요.


 그의 검소함에 대해서도 칭찬하고 싶네요. 앱 모임에 나가보면 벤츠쯤은 아무나 타고 다니는 차예요. 그야 벤츠S클은 좀 적지만 그것도 영끌해서 타고 다니는 놈들 꽤 있고요. 그런데 추정되는 자산 규모로 보아 박사장이 타고 다니는 벤츠는 너무도 검소한 차인거예요.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죠. 어지간한 회사 대표였다면 운전기사를 흠씬 두들겨줬을 상황을 겪으면서도 그는 딱 한마디 불평만을 하죠. '선을 넘으려고 하네.'라고요. 송강호가 박사장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 지금 박사장 인성테스트 하는 중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의식을 존나게 드러내요.


 박사장에 대한 칭찬을 좀 길게 쓰고 싶은데 그러기엔 내 체력이 모자라네요. 하여간 박사장이라는 한 사나이가 평생에 걸쳐 일궈낸 것들은 어느날 쳐들어온 불한당들에게 한순간에 박살나고 말아요.




 김기택(송강호)-분노에 관해 한번 말해보라면, 나는 이세상엔 양면의 비극이 있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한 분노한 사나이가 있다고 쳐요. 자신의 신세에 대한 비관이 분노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이 그 자신의 비극이겠죠. 그리고 그렇게 분노한 남자에게 주위를 파괴할 만한 기력이 남아있다는 게 타인들에게 비극이고요.


 물론 모든 가난한 사람이 분노한 사람은 아니겠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가난은 우리가 사는 고계에서 가장 빠져나오기 힘든 늪이예요. 어떤 사람의 분노가 가난에 의해 만들어진 분노라면, 그 분노는 해소되지 못할 확률이 높아요. 해소되지 못하는 분노를 안고 사는 한 명의 건장한 남자가 어느날 그것을 있는 대로 발산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죠. 


 물론 영화에서 보여지는 바로는 김기택은 한심해요. 그야 이 영화가 시작되기 전...몇십년 동안 김기택에게 얼마나 많은 좌절들이 있었는지는 관객이 알 수 없죠. 어쨌든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김기택은 더이상 일어날 수 없을정도로 부서져 있는 상태라고 봐요. 문명과 사회가 남자에게 원하는 남성성...'생산자'로서의 남성은 이제 사라져버린 상태죠. 사회가 남자에게 원하지 않는 남성성...분노한 야만인만이 그의 안에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김기택이 하는 거라곤 자의식을 드러내 보려고 애쓰는 것뿐이예요. 자신을 고용한 사람과 맞먹어보고 싶어서 그가 그어놓은 선 근처를 얼쩡거리고, 기회가 되면 자신의 일생에서 얻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남을 훈계해 보려고 하죠. 하지만 그에겐 안타깝게도 이미 그에겐 기술도, 매력도, 권위도 없는 상태인거죠. 울분과 건장한 몸뚱아리...두가지만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결국 무엇을 저지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를 시켜주려고 해도 김기택은 악인일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한 가정을 풍비박산내놓고 자수를 한 것도 아니고, 지하실에 틀어박혀 자기연민에 빠져 찌질대는 건...원래 인간성이 악한 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김기정(박소담)-한국영화에 매번 나오는 미쟝센화된 여자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어하기도 하면서 자포자기한 것 같은 태도가 양가성을 띈 게 아니라, 그냥 그 순간순간의 씬에 양념을 치기 위해 왔다리 갔다리 하는 느낌.


 하지만 인간성만큼은 이 망할놈의 가족들 중에선 그나마 괜찮더군요. 마지막즈음에 함박스테이크를 갖다주며 협상을 시도해 보려던 걸 보면요. 




 김기우-열등감과 패배감과 염치없음을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낸 듯한 캐릭터. 물론 이런 캐릭터는 늘 남자인 법이죠? 하 하 하!


 ...라고 말하고 끝내면 한남 소리 들을 것 같군요. 설명해보자면, 사실 이런 종류의 캐릭터가 언제나 남자인 건 당연해요. 내가 늘 떠들듯이 남자의 자존심은 생산성이거든요. 그리고 생산성은 궁극적으로 더 강력한 구매력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요. 생산성도 없고, 향후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기대하기도 힘든 김기우가 열등감에 빠져 있는 건 현실적인 설정이겠죠.


 어쨌든 이 놈이야말로 이 영화 최고의 악인이예요. 이 놈이 사기의 시초인데다, 지하실에 가둬둔 두 부부를 돌로 찍어 죽이는 걸 '계획'이라고 주절거리는 걸 보면 타고난 인성이 의심돼요. 송강호 캐릭터는 최소한 욱해서 그런 거기라도 한데 이 놈은 멀쩡한 정신으로 사람을 쳐죽이려고 마음먹었던 놈이 마지막엔 자기연민에 빠져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며 찌질대고 있어요.




 전직 가정부-이 사람은 꽤나 유능해요. 저택의 크기가 한 사람이 관리하기 만만한 사이즈가 아닌데 묘사되는 걸 보면 문제없이 해내고 있죠. 신체능력도 초반에 폴짝 점프랑 중간의 푸쉬(...)장면을 보면 나이치곤 대단하고요. 게다가 요리를 얼마나 잘하는 건지, 모범 가장인 박사장에게 작은 일탈(갈비찜 외식)을 부추길 정도죠.


 아무래도 이 사람은 남편을 잘못 만난 게 아닐까 싶어요. 남편만 괜찮게 만났으면 본인도 능력있고 하니 꽤 풍족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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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영화를 보는 기준은 그리 높지 않아요. 적절한 서사가 있거나 건질 만한 캐릭터가 하나라도 있거나 괜찮은 장면이나 대사가 한두개 정도 있기만 해도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할 수 있어요. 물론 마스터피스가 되려면 서사와 캐릭터, 몰입감 모든 부분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모든 영화가 마스터피스일 필요는 없죠. 다른 건 못 챙겨도 확실하게 건질 만한 부분이 한두개만 있어도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할 수 있어요. 한데 기생충은 글쎄요. 확실하게 이건 괜찮다고 콕 찝어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을 잘 모르겠어요. 봉준호가 이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교훈은 글쎄요? 잃을 거 없는 사람들 신경 건드리지 말아라...뭐 이건가? 


 사실 박사장은 어느정도 강자긴 하지만, 그의 본질은 갑에 가까워요. 나중에 한번 써보겠지만 '갑'과 '강자'는 매우 달라요. 이 사회에서는 갑도 을도 사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롤을 연기하는 사람들일 뿐이거든요. 그 역할을 제대로 연기 못하면 갑들은 을들에게 호구잡히고 말죠. 


 그러나 예전에 내가 부동산의 예를 들어서 했던 말이 있죠. 우리 모두가 평생 하는 이 게임은 의자뺏기 게임이라고요. 문제는, 의자의 갯수는 정해져 있고 이미 한번 의자에 앉아버린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의자에서 언제 일어날지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요. 그들이 그럴 마음만 먹으면 사실 의자에서 영원히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서로서로 약속을 정해서 의자에 돌아가면서 앉을 수는 없어요. 왜냐면 서로가 돌아가면서 의자에 앉는다는 건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이 세상이 잘못된 건, 내 생각엔 이거예요. 사실 인간에게 의자란 건 한 사람에게 하나만 있어도 돼요. 그러나 이 세상엔 혼자서 의자 5개를 가진 놈, 심지어는 의자 100개를 가진 놈들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걔네들의 무서운 점은 100개의 의자 중에 의자 1개도 남에게 나눠주지 않는다는 거고요. 


 거기까지라면 차라리 낫겠죠. 한데 모두가 모두가에게 열린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의자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을 켜면 의자 100개를 가진 놈들이 sns에서 자신이 가진 100개의 의자를 자랑하는 걸 봐야만 하죠.


 잘 모르겠어요. 의자를 안 가지고 사는 것에 익숙해질 수도 있겠죠. 의자를 가지지 않은 것에 분노하는 걸 그만둘 수도 있을거예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어떤 놈들은 의자를 100개씩 가지고 산다는 걸 모른다면요. 그러나 20세기처럼 피상적으로 그걸 아는 게 아니라, 이젠 진짜로 인터넷을 켜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의자 100개를 가졌거나, 물려받은 놈들이 행복해하는 걸 볼 수 있단 말이예요. 너무나 디테일하게 말이죠. 왜냐면 그들이 그들 스스로 의자 100개를 올려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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