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 내게 무해한 사람 중

2019.07.07 11:34

Sonny 조회 수:512

자꾸 제목을 헷갈리게 됩니다. 아마 최은영 작가의 다른 단편집 「쇼코의 미소」에 있는 "한지와 영주"라는 단편 제목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분명히 "그 여름"이라는 작품인데 저도 모르게 "이경과 수이"라는 두 인물의 이름으로 제목을 외우려고 하네요. 그래서 더 고민해보게 됩니다. 왜 최은영 작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 그것도 여름 뿐 아니라 몇번의 사계절을 순환시킨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굳이 그 여름이라는 특정 시간대로 제목을 지었는지요.

여름이라는 계절의 역설을 곱씹어봅니다. 폭력적 수준으로 열기가 쏟아지고 가장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계절이죠. 그런데 그 계절은 특히 식물들의 성장이 가장 왕성한 시간입니다. 다른 동물들이 그늘에 숨을 때 식물들은 그 햇볕을 모조리 다 받아들여야해요. 그래야 당분과 영양분을 열매로 맺으니까요. 흔히들 봄을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라 생각하지만 진짜로 "약동"하는 시간은 여름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름의 뜨거움이 과연 사람의 성장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걸까요. 누구에게나 갑작스레,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외부에서 쏟아지고 그걸 안으로 갈무리하느라 정신없는 시절이 찾아옵니다. 식물은 홀로 자라지만 사람은 그 열기를 반드시 관계로 맺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날, 난데없이 축구공이 머리를 강타하면서 이경과 수이에게도 그 운동에너지가 둘을 엮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정말 얼얼하게 다가오기도 하듯이요.

때로는 물가에서, 때로는 모터사이클의 바람을 타면서 둘은 둘의 열기를 자연스레 순환시킵니다. 그러나 각자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는 무사히 자라진 못합니다. 수이는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해야했고 이경은 수이의 등을 보는 일이 잦아집니다. 아무리 좋아해도, 둘만의 비밀을 많이 쌓아도 각자의 인생은 늘 갈림길의 가능성을 내포하니까요. 이경에게 여름은 점점 그리운 시간이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비추고 데웠었는지. 왜 똑같은 열기를 주고 받으려하는데 수이의 인생 안에서는 그저 입김이 나오는 것 같은지.

둘의 달라진 삶이 연애를 위협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위험은 다른 사람에게서 문득 찾아옵니다. 아니면, 수이의 옷차림과 사고방식과 카센터 일은 극복되지 못한 채로 이경 안에서 점점 축적되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널 만나기 전의 시간이 너무 가난하게만 느껴진다던 이경의 그 말은 역으로 현재의 불충분함을 시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너를 만나도 나의 시간은 모자란 것 같다고. 원래 익숙해진다는 건 관성 속에서 덜 원하고 덜 재미있어한다는 거잖아요.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라는 결론을 얻은 시점이 이경에게는 둘의 여름이 끝나는 시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름이 끝나고 드디어 가을이 되어 뭔가를 맺은 것처럼요.

은지의 등장을 과연 사람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이경의 "가을"에 찾아온 또 다른 여름처럼 느껴졌습니다. 잔인하지만 계절은 순환하고 또 다른 태양이 필요해지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이경과 수이는 너무 무난하게 통했는지도 모릅니다. 수이와 서로 햇볕을 반사시키며 가까워졌던 거에 비하면 은지는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눈부신 존재감으로 이경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어둠을 드리우고. 그는 아마 이경의 두번째 여름이라기에는 너무 잦았던 장마 혹은 일식이었을까요. 말리거 싶었습니다. 충동이 이끄는 애달픈 소망은 사람이 아니라 그 닿을 듯 말듯하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간극에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경을 나무랄 순 없을 겁니다. 어리석다 해도 모든 약속을 저버리게 하고 거짓말을 내뱉게 하는 충동이야말로 가장 진실된 순간이기도 하니까요.

결국 이경이 이별을 고하고 수이가 그걸 받아들일 때, 너무 절절해서 좀 눈물이 났습니다. 사람이란 헤어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재야말로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일지도요. 수이는 늘 담담해보였지만 이경을 삶의 축으로 삼고 자랑스러워했던 걸 고백합니다. 축구 따위 못하게 되어도, 대학에 못가도, 나는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있어서 남 부러울 게 없었다고. 그러니까 자기를 꾸밀 필요도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경은 수이 하나로는 충만할 수 없던 사람이었구요.

이경은 은지와의 연애를 시작하지만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은지 역시 늘 자신의 여름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시간이 흐른 후 고향에 돌아와 수이와의 시간을 추억합니다.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남는 게 아니라 시간이 되어버린다는 걸요. 그리고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또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기에 우리는 상처를 안고 계속해서 가슴 속 시간을 박제해 홀로 끝없이 순환시킨다는 걸요. 그 사람, 그 시간, 그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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