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봤다'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2시즌까지 나와 있고 그걸 다 보긴 했는데 완결이 아니거든요. 어쨌든 늘 그렇듯 스포일러는 없도록 적겠습니다.



 - 1950년대 미국, 뉴욕이 무대입니다. 주인공 메이즐 여사께서는 떡두꺼비 같은 자식 둘을 놓고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하며 사는 유태인 주부입니다. 사람은 나쁘지 않지만 좀 많이 괴퍅한 부모와 돈 많지만 대놓고 진상 캐릭터인 시부모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행복하다고 믿고 살아요. 뭐 그렇게 보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집에 돈도 많고 애는 유모가 다 봐 주고 본인이 신경 쓸 일이라곤 몸매 관리 하면서 남편 기분이나 좀 맞춰주는 것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삼촌네 회사에 낙하산으로 얹혀 있는 주제에, 뭣보다 별로 웃기지도 못 하는 주제에 '내 꿈은 스탠드 업 코미디언!'이라며 취미 활동 마냥 허접한 클럽에 나가 재미 없는 개그를 치던 남편이, 갑자기 이별을 선언합니다. 자기는 사실 그동안 결혼 생활이 숨막혀 왔고 자기 꿈을 찾고 싶으며 심지어 자기 비서랑 바람이 났대요. 이런 망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에 맛이 간 메이즐 여사는 병나발을 불고 고주망태가 되어 남편이 즐겨 찾던 클럽을 찾았다가 술김에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아 버리는데...



 -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대놓고 정직하게 노골적인 페미니즘 스토리입니다. 걍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이 세팅해 놓은 가치관에 사로잡혀 자기가 행복한 줄 알고 미련하게 살던 한 여성이 예상치 못한 역경에 부딪혀 세상의 불합리함도 깨닫고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적성과 능력도 깨닫고 그래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깨져가며 스스로를 단련하여 주체적이고 성숙한 여성으로 자라나는 이야기죠. 최근 서양 드라마들 보면 페미니즘 메시지를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이 드라마처럼 그냥 그걸 아예 메인 서사로 다루는 작품은 또 의외로 흔치 않아서 인상적이었네요.

 그런데 메시지의 강도에 비해 부담스러운 느낌은 거의 없습니다. 전 원래 '메시지가 선명한 작품들' 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일단 재밌으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고. 또 보면 이야기가 여러가지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기도 해요. 이 얘긴 조금 있다가 다시 하도록 하고.



 -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건 '때깔'입니다. 그동안 제가 본 넷플릭스와 아마존의 '오리지널 시리즈'들을 통틀어서 거의 독보적일 정도의 때깔을 자랑해요. 작품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이 그냥 매끈한 정도를 넘어 최고급이라는 느낌. 

 일단 화면에 비치는 거의 모든 것이 아주 호사스럽고 정성스럽게 예쁘고 화사해요. 등장인물들의 의상, 메이크업부터 시작해서 세트 디자인, 소품들, 거리의 풍경까지 그냥 무조건 다 예쁩니다. 감독에게 예쁨 강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의도적으로 굉장히 컬러풀한 색감에 깔끔하고 예쁜 느낌을 강조해서 어떨 땐 무슨 cg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기분까지 들게 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높은 확률로 마주치게 되는 '부족한 예산을 센스 있게 극복해냈구나!'라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또 내용상 그 시절 클럽이 이야기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다 보니 음악의 비중도 큰데 그 또한 선곡부터 퍼포먼스까지 완벽한 느낌이고, 배우들도 정말 역할에 잘 맞게 생긴 사람들을 귀신 같이 뽑아다 적재적소에 꽂아 놓은 데다가 연기의 질도 아주 높습니다.

 그리고 연출까지도 종종 '쓸 데 없이 고퀄'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정성을 들였어요. 예를 들어 시즌 2의 유대인 부자들 여름 캠프(?) 장면을 보면 주인공이 그 캠프 참가자들 무도회에서 춤을 추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그냥 원컷으로 찍었습니다. 수십명이 춤을 추는 무대에서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면서 원경이 되었다가 근경이 되었다가 하면서 5초 간격으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 추는 주인공의 모습을 잡아내는데... 사실은 이 장면이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면이 아니거든요. 굳이 그렇게 힘들게 찍을 필요가 없는 장면인데 그 짓(?)을 하는 걸 보며 연출자가 배우와 스탭들 괴롭히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ㅋㅋ 

 


 -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인상 깊은 건... 주인공입니다. 미세스 메이즐. 레이첼 브로스나한... 이라고 읽어야할 것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인데 전 여기에서 처음 봤거든요.

 근데 뭐랄까... 그냥 완벽하십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부잣집 딸래미 겸 며느리. 집에서 남편 돌보고 애 잘 보면서도 외모 관리 완벽하게 하는 게 여자의 인생이라고 믿는 순진한 젊은 여성. 그런데 괴상할 정도로 입담이 좋고 공격적인 성격에 철 없고 충동적이며 정의감 넘치고 발랄한 사람. 어찌보면 되게 일관성 없는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모습들에 완벽하게 잘 어울려서 캐릭터에 개연성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50년대 부잣집 여성 스타일'이 정말 대단히 잘 어울려요. 이걸 보고 호감이 생겨서 구글 검색을 좀 해 봤는데 평소엔 별로 미세스 메이즐처럼 안 생기셨더라구요? ㅋㅋ 그런데 어쨌거나 이 드라마에선 완벽해요. 중간중간 잠깐 쉬다 볼까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냥 이 분을 계속 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습니다(...)



 - 근데 보다보면 좀 애매한 기분이 드는 순간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위에서 인상적이었다고 말한 미세스 메이즐씨. 정말 매력적이고 훌륭한 주인공이긴 한데 좀 엉뚱한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면, 말하자면 1950년대의 부잣집 여사님들 스타일링이라는 게 사실 페미니즘과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 장면이나 대사들도 종종 나와요. 그런데... 이 양반이 그 스타일링을 하고 화면을 누비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눈이 심히 즐겁습니다. =ㅅ=;; 게다가 시즌2가 끝나가고 나름 캐릭터가 각성(?)을 꽤 마친 후에도 이 양반의 패션쇼는 그치지를 않고 그게 계속해서 드라마의 재미 요소들 중 하나가 되거든요. 뭔가 이야기의 주제를 스스로 흐리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또 이게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에요. 미세스 메이즐이 스탠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면서 성차별적인 쇼비지니스 업계와 충돌하고 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가족 친지들과 충돌하고 그런 내용도 중요하지만 주인공의 연애가 어디로 흘러갈지 또한 그만큼 중요합니다. 다행히도 주인공이 막 사랑 없인 못 살고 남자에게 집착하고 이런 식으로 흘러가진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연애담이 분량상의 비중을 상당부분 잡아 먹다 보니 뭔가 캐릭터의 성장이 좀 지지부진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 같은 경우엔 그냥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더 크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또... 역시 우리 미세스 메이즐이 문제입니다. 이 분의 능력이 너무 출중해서 이야기가 너무 쉽게 풀리는 경향이 있어요.

 스탠드업 코미디 잘 하는 무대 체질인 거야 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그 쪽으로 나가게 되는 거라는 설정이라서 그러려니 합니다만. 자기 용돈 벌이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부분을 봐도 뭐... 그냥 무슨 일을 시켜도 다 잘 하는 데다가 워낙 친화력이 좋아서 경제적 계층이 다르고 살아온 삶이 다른 사람들이랑 엮여도 그냥 척척 적응해버리고 이런 식이라 늘 예상에 비해 일이 싱겁게 풀리고, 더불어 '이건 비현실적이야'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뭐 그냥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라면 이게 단점이 아니겠지만 애초에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그게 좀...;


 그래서 이 세 가지 애매한 느낌들을 머리 속으로 종합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사실은 이게 페미니즘 스토리를 예쁘고 재밌게 보여주는 드라마인 게 아니라, 그냥 50년대 배경으로 귀엽고 예쁘게 흘러가는 로맨틱 코미디에다가 맛깔나는 토핑으로 페미니즘을 얹어 놓은 드라마인 게 아닌가. 


 ...근데 뭐 어때요. 재밌으면 된 거고 재밌습니다. ㅋㅋㅋ



 -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최상급의 때깔을 자랑하는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주변의 조연급 캐릭터들도 하나 같이 다 매력적이고 대사빨도 좋고 이야기도 충분히 재밌구요. 특히 여성 시청자들이라면 어지간해선 취향에 안 맞기 어려울 것 같아요. 초절정 꽃미남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긴 하지만 뭐 그게 필수 요소는 아니겠구요. ㅋㅋ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구독자 분들이라면 최소한 1화 정도는 시도해보시라고 추천드릴만한 훌륭한 물건이니 아직 안 보신 구독자분들께선 한 번 시도를. 

 다만 뭐 되게 진지하고 그런 류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



 - 중요한 이야기는 다 했고 이제부턴 전부 사족인데요.

 사실 시즌 2를 끝까지 보고 나니 좀 불안한 느낌이 듭니다. 대체로 주인공 본인의 이야기에 집중했던 시즌 1과 달리 시즌 2에서는 주변 인물들 이야기의 비중이 꽤 커지는데... 그러다보니 얼른 킹왕짱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우뚝 선 미세스 메이즐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제 입장에선 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시즌 2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면 그런 식의 흐름이 시즌 3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 같아서... =ㅅ= 제가 이래서 짧은 드라마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ㅋㅋㅋ



 - 그 전남편놈은 천하의 개xx로 시작해서 점점 철드는 모습을 나름 설득력있게 보여줘서 좋았는데. 시즌 2 후반부터 다시 슬슬 짜증이 올라오게 만드네요. 작가님 배려 좀요(...)



 - 전 길모어 걸스를 안 봐서 이 드라마 작가 겸 연출가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는데. 지금 찾아보니 아버지가 유태인인데 어머니는 아니고. 아버지 직업이 코미디언이었고 어머니는 댄서였다네요. '그럼 그렇지 ㅋㅋ' 라는 느낌. 보다보면 이야기상 좀 쓸 데 없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유태인 가정의 일상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자전적인 게 아닌가 싶었죠.



 - 언제나처럼 정신 없게 주절주절 길게 늘어 놨는데, 그냥 드리고 싶은 말씀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재밌으니 한 번 보세요'라는 겁니다. ㅋㅋㅋ 뭐 보시고 취향에 안 맞으면 바로 접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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